나의 이야기

착한 사람

아이루다 2015. 4. 17. 13:41

 
참 착한 사람들이 있다. 누가 봐도 부당한 손해를 입은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조차도, 그 손해를 입힌 당사자를 향해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라든가 '얼마나 힘들면 그랬겠어' 라는 말로 이해를 해준다. 이들은 참으로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졌다.
 
그런데 이렇게 착하고 관대한 사람은 보통 자신에게만큼은 그렇지 못하다. 남한테 항상 금전적 손해를 입거나 혹은 다양한 형태의 손해를 보는 것은 별 것 아니라고 감내하면서,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은 무척 아까워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보면 마치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성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자신을 위해서는 단 한 푼의 돈도 안 쓰면서, 다른 이를 위해서는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성자가 아니면 누가 성자겠는가?
 
정말로 그 상태라면 성자인 것이 맞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그런 선한 마음이 오직 자신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착한 사람들은 보통 다른 이들의 이목이나 혹은 다른 이들과의 다툼 그 자체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 대다수이다.
 
쉽게 말해서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도 돈을 빌려주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부탁을 거절함으로써 서로 불편해지는 것이 싫어서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이미 사기를 당한 것으로 판단되는 상황에서도 조차도 서로 얼굴 붉히고 싸우는 것이 싫기 때문에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넘어가 버린다.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성격으로 인해서,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입힌다. 그래서 이들은 주변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욕을 먹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주변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가 없다. 할 수 있었으면 이미 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견뎌낼 수 있는 자기 방어 논리가 필요하다. 결국 이렇게 말을 한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 '때가 되면 다 갚겠지.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라고 말이다.
 
물론 그럴만한 사정은 있을 것이다. 세상에 사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문제는 이런 이해가 진정한 의미의 용서나 무한대의 관용이 아닌, 자기 합리화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즉, 이런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가진 문제점인 다른 이들과의 불편한 다툼을 회피하는 것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도록 한다.
 
사실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본인은 비록 손해를 입었지만, 다른 사람과 불편해지는 것이 돈을 못 받는 것보다 더 힘든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에게 더 불행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즉, 이 사람들도 역시나 다른 이들처럼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선택한 것뿐이다.
 
여기에서 진짜 문제는 가족이다. 왜냐하면 가족은 보통 다르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만약 가족들까지 모두 그 사람과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이 손해를 입고, 같이 합리화를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보통 그런 집안은 드물다. 왜냐하면 누구나 결혼을 해야 하기 때문이고, 결혼은 보통 다른 기질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되어있다. 더해서 키우는 아이는 전혀 다른 성격으로 자라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평범한 수준의 손해와 이득 개념을 가진 사람이 배우자나 아이가 있게 되면, 이때 본격적으로 갈등이 시작된다. 그것은 보통 손해를 감수하자는 남편과 손해를 참아내지 못하는 아내의 싸움이 된다. 왜냐하면 이런 기질은 보통 남자들한테 나타나기 때문이다.
 
왜 이런 기질이 남자들한테 주로 나타나는지는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단지 추측 건데,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좀 더 불편한 관계를 참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부분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가니, 다음 기회에 다뤄보도록 하겠다.
 
결국 그래서 부부는 자주 싸움을 자주하게 된다. 한쪽은 손해만 입고, 사기를 당하고, 제대로 돈도 받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한쪽은 그런 배우자를 감당하기가 힘들고, 그런 바보 같은 짓만 골라서 하고 다니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서 화병이 난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이런 경우에 착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배우자에게만큼은 매우 큰 소리를 친다. 즉, 싸움이 벌어져서 불편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이 필하고 싶은 욕구와는 달리, 공격을 하는 쪽에서는 손해를 만회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상대를 몰아 붙인다. 그래서 피할 수 없으니 결국 싸워야 한다. 피할 구석도 없어서 싸우는 것이다. 이 사람의 자기 합리화는 배우자에게는 개똥같은 소리일 뿐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누가 뻔히 보이는 손해를 감수하겠는가? 그리고 자신들도 돈이 없어 힘들어 죽겠는데, 남의 사정을 이해해줘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것을 이해해줄 사람은 거의 없다. 자기 자식들이 당장 돈이 없어서 학원비를 내기가 힘든 상황인데, 남의 사정을 헤아려줘야 한다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끝없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가서 돈을 찾아오라고 한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돈을 받기 위해서 싸우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착한 사람은 배우자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냐고 자신의 배우자를 탓한다. 어차피 참고 넘어가면 될 일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싸움이 날 수 밖에 없다. 부부로써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은, 사실 가장 참기 힘든 배신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 중에서, 그 성향이 좀 더 발전하면, 이젠 본격적으로 선한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믿으면서 상대를 설득하기도 한다. 즉, 세상을 선하게 살아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자기 합리화가 너무 자주 일어나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으면서, 이젠 정말로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믿는 현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운 좋게 돈이 많아서 다른 이들을 도울 기회가 많은 사람이 우연하게 언론에 소개되거나 혹은 그 미담이 다른 이들의 입을 통해서 퍼지면 이젠 세상으로부터도 인정을 받는다. 사실상 성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가끔 이들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증언들이 나오면서 그 신뢰도는 더욱 더 높아져간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 정의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끝없는 찬양과 인정을 받기 때문에, 이젠 자기 합리화를 할 필요도 없다. 이미 세상이 인정해주고 있는데, 뭐 하러 합리화를 하겠는가? 거기에 더해서 이렇게 유명해지고 나면 엄청난 돈이 들어온다. 세상 사람들이 이 사람을 믿고 기부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흐르면, 주변에 돈 냄새를 맡은 이들이 모여들게 되어있다.
 
그래서 보통 착한 사람과 성자가 된 사람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보통 착한 사람들은 사는 동안 가족에게 많은 민폐를 끼치면서, 주변에 베풀기만 하고 산다. 사실 베푸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쩔 수 없으니 놔두는 것이다. 하지만 운 좋은 이들은 그런 삶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성자가 된다. 하지만 이 두 사람 간의 차이는 거의 없다. 삶이 어떤 방식으로 풀렸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악한 것보다는 착한 것이 낫지 않냐고 할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착하긴 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젠 그것을 생각해보자. 과연 우리가 믿는 선함이 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일반적으로 착한 사람들은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다른 이들에게 선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가족에게는 악한 존재가 된다. 누군가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를 불러온다. 모두가 이득을 얻는 경우는 거의 없다. 단지 우리는 자신의 이득은 계산을 잘하지만, 다른 이들의 손해는 거의 계산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것을 잘 모를 뿐이다.
 
이 사람은 천 명의 사람에게 착한 존재지만, 단 두 명이 가족에게는 악한 존재가 된다. 그럼 이 사람은 선한 것일까? 악한 존재인 것일까?
 
이것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다. 누군가는 선한 것이라고 할 것이고, 누군가는 아무리 그래도 가족에게는 잘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게 판단된다. 즉, 모든 판단은 개인적이란 뜻이다. 그러니 당연히 절대적 선함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착한 사람과 같이 사는 사람은 평생을 그 착함으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게 된다. 열심히 노력해서 모은 재산을 남이 부탁한다고 해서 쉽게 준다. 그리고 당연히 못 받는다. 사실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이런 사람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막 빌려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신부터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미 악한 의도를 가진 사람일 경우가 많다. 말 그대로 호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배우가 호구인 사람은 평생을 그것으로 인해 속을 썩는다. 그래서 제발 좀 그만 착했으면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과 얼굴 붉히는 것을 좀 참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조언이지만, 말이 곱게 나가지 않는다. 속으로 화병이 도졌는데,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다. 그래서 결국 심한 말을 하게 되고, 싸우게 된다.
 
그래도 착한 사람은 자신이 착하다는 것에 위안을 받는다. 적어도 남들에게 해코지 한 일은 없으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처럼 남들 속여서 이득을 얻거나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그래서 삶이 조금 불만족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합리화를 해서 나름대로 살아간다. 사실 그리고 이런 성격이라서 인기도 많다. 원래 호구가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 누구도 손해보다는 이득을 얻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래서 착한 사람 주변에 있는 그나마 착한 사람들도 사실은 어떤 이득을 얻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관계를 유지한다. 단지 이들은 양심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과도한 이득을 얻거나 상대에게 큰 손해를 입히면서까지 이득을 추구하려고 하지는 않을 뿐이다. 조금 덜 착한 사람들은 소소한 이득을 챙기면서 관계를 유지한다.
 
인간은 우리가 아는 착함으로써는 자격이 없다. 우리는 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정의한 착함과는 다르다. 그것은 마치 배가 부른 사자의 온순함과 같다. 우리는 배가 부를 때만 착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착한 사람은 그 배고픔을 좀 더 오래 참는다. 왜냐하면 싸우기 싫기 때문이다. 풀을 먹고 사는 동물들은 싸울 줄 모르고, 싸워봐야 먹을 것도 안나 오기 때문에 배고프면 그냥 굶어 죽는다. 이들이 싸울 때는 오직 짝을 찾을 때뿐이다. 즉, 식욕에 관해서는 싸움이 도움이 안되지만, 성욕에 관해서는 싸움이 도움이 된다.
 
만약 스스로 나름대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착함에 대해 의심을 해야 한다. 사실상 성인이라고 칭해지는 이들도 자신의 착함의 정체를 제대로 되돌아봐야 하는데, 일반 사람들이야 뻔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스로를 착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이유는, 착하다고 믿고 살아야 양심이 좀 덜 불편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우리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그런 것들마다 모두 마음에 담아두면, 행복할 수 있는 겨를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히 자신을 착하다고 믿고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
 
그것이 악당이든, 성자든 상관없이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착한 면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벗어나기에는, 우린 너무 오랫동안 인간 사회에 속해서 양심을 훈련 받았다.
 
마지막으로 알고만 있는 진리를 하나만 얘기하면, 진정한 착함은 오직 선과 악을 초월할 때 나타날 수 있다. 선한 것은 악한 것의 반대이고, 악한 것은 선한 것의 반대일 뿐이다. 즉, 이 둘의 차이는 단지 비율의 차이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선택하지 않는 다른 것도 같이 가지게 된다. 악하고 싶지 않다면, 선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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