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상처가 치유되는 과정

아이루다 2015. 4. 6. 09:34

 
사람은 두 가지 형태의 상처를 입는다. 첫 번째는 육체적인 상처이다. 이 상처는 아프고 괴롭다. 그나마 작은 상처는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어느 정도 회복되지만, 큰 상처는 몇 달이 가기도 한다. 그리고 복구 불가능할 만큼 큰 상처는 죽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많은 병원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해주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두 번째 상처는 심리적인 부분이다. 이 상처 역시도 아프고 괴롭다. 하지만 실제로 아픈 것은 아니다. 그냥 마음이 괴롭고 아픈 것이다. 이 상처 역시도 작은 생채기들은 오래 지나지 않아서 회복되지만, 큰 상처는 평생을 가기도 한다. 그리고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큰 상처는 당사자를 자살로 내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육체적 상처를 치료하는 곳은 많은데,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병원은 아주 소수이다. 거기에다가 정신 병원이란 어감은 그곳에 향해 갈 때, 더 상처를 입는 기분이 든다. 우리는 마치 우리 정신은 절대로 상처를 입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듯 하다.
 
육체의 상처는 그 치료에 따라 거의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고, 희미한 꿰맨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상처들은 덧나서 보기 싫은 흉터 자국을 남기기도 한다. 특히나 화상과 같은 상처는 나중에 따로 성형 수술을 받아야 할 만큼 보기 싫은 흉터를 남긴다. 그래서 그나마 흉터를 최대한 적게 남기려면, 우리는 제 때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따로 치료해주는 곳이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에 상처를 입을 때 찾아 갈 곳이 없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이 상처도 역시 아물기는 하는데, 흉터가 남는지 안 남는지 알 길이 없다. 과연 마음의 상처가 치료된 후에, 그 곳엔 과연 어떤 것들이 남아 있을까? 이것은 보이지 않아서 볼 방법이 없다.
 
마음의 상처는 치료해주는 곳이 거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정형화된 치료 방법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나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일반적인 치료 방법은 바로 다른 이의 위로이다.
 
사실 현재로써는 마음의 상처에 대해서 다른 사람의 위로만큼 좋은 치료법도 드물다. 단지 문제는 이 치료법은 원인은 해결해주는 것이 아닌, 마치 마취를 하듯, 상처를 좀 덜 아프게 해준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치료법이 괜찮고 많은 사람들이 애용하는 이유는, 마음의 상처는 육체의 상처와 달리 방치한다고 해서 덧나거나 감염이 되어 죽음으로 이르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의 거의 유일한 확실한 해결책은 '망각'이기에, 상처를 입은 사실이 머리 속에서 망각이 될 때까지 최대한 아프지만 않게 유지하는 것도 꽤나 현명한 치료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위로는 치료는 안되지만, 효과적이다.
 
하지만 위로는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일단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위로를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당연하지만 치료를 해줄 사람이 제대로 된 치료법을 모를 경우, 사실 상처가 덧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돌팔이 의사에게 찾아간 환자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좋은 인간 관계를 맺으려고 노력한다. 주변에 있는 좋은 사람들은 힘들때 위로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단지 문제는 정말로 제대로 위로를 해주는 사람을 찾기도 힘들며, 또한 그런 사람을 찾았다고 해도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위로는 마음이 아닌, 입에서 나온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육체적 상처는 외부적으로 드러나거나, X-레이, 초음파, MRI 등의 장비를 통해 내부까지 어떻게든 제대로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반면, 마음의 상처는 그것을 다른 이들 앞에서 드러내는 것 자체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런 상처를 내보는 것은 위로를 받을 수도 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을 때는, 그 상처가 자신의 약점이 되기 쉽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인간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요즘이라도 해도, 적에게 쫓기는 긴급한 순간에 놓인 몇 명의 군인들은 자신의 육체적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꺼내놓기를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상처가 심각하다는 판단되는 순간, 그 자신이 그 무리에서 버려져서, 결국 남겨질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과거에 육체가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육체적 약점을 드러내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육체적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그다지 크게 개의치 않는데, 그것은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며, 문명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육체적 상처가 있다고 해서 버림을 받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의 상처는 반대로 점점 더 중요도가 높아지면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는 일이 그다지 좋은 일이 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보이고 싶어하지 않으며, 화를 내거나 혹은 격한 감정적 흔들림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그런 반응들은 감정 조절력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게 만들거나, 쉽게 상처 받는 사람이란 인상을 심어준다.

 
그래서 우리는 육체적 약함보다 마음의 약함이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훨씬 더 경계를 한다. 왜냐하면 사실상 인간에게 있어서 능력이란 것은 육체적인 부분이 아닌, 정신적인 부분에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마음의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은, 문제가 있다는 평가를 받기가 쉽기 때문에, 우리는 친하고 신뢰할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을 숨기려고 한다. 문제는 신뢰할만한 사람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마음이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문제를 드러내는 일과 동일시 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은 쉽게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곤 하지만, 문제는 그럴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약한 마음으로 인해 미묘한 실망감을 갖게 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한다.
 
즉, 너무 자주 자신의 마음의 상처를 다른 이들에게 드러냈다가는 약한 존재가 되어버리거나, 귀찮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그런 약함을 이용해서 이득을 보려는 무리들까지 생겨난다. 사실 많은 사기꾼들이 노리는 목표는 육체적인 상처를 입은 사람이 아닌, 육체적인 상처를 입어서 마음이 약해진 사람이나, 마음 자체가 상처 입어서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하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를 최대한 숨기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을 결정하는 심리에는 바로 자존심이 깔려 있다. 즉, 자존심은 자신의 약함을 숨기려는 심리이며, 자신은 약하지 않다고 믿고 싶은 심리이다.
 
사실, 마음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자신의 약한 부분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다. 그래서 아무리 위로를 받아서 치료를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자신의 약함을 증명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은 마음의 상처를 대하는 방법에 따라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하나는 마음의 상처를 쉽게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고 그것을 위로 받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상처를 꽁꽁 숨긴 채, 마차 자신이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인 냥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단 첫 번째인, 자신의 상처를 잘 드러내어 다른 이들의 위로를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은, 일단 어떤 식으로든 치료가 되기 때문에, 삶이 상대적으로 좀 더 쉽다. 그리고 이런 위로를 통해서 좀 더 빠르게 회복이 되기 때문에, 좀 더 긍정적인 삶을 살면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상처를 입었더라도 이런 식으로 빨리 회복되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상처로부터 빠져 나와 다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이것은 나름대로의 선 순환이 된다. 그래서 상처를 받아도 곧 치료를 하고 다시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나름대로 큰 문제는 있다. 앞에서 말했듯, 위로는 심리적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아닌, 자기 위로와 망각이라는, 사실상 마취의 효과를 지니고 있어서, 결국 원래 원인은 해결이 되지 않은 채 이 상처를 줬던 원인들이 평생에 걸쳐서 극복되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열등감화 되고 만다.
 
예를 들어서 얼굴이 그다지 예쁘지 않아서 다른 이들의 말에 자주 상처를 받는 여자들는, 친구를 만나 자신의 외모를 비하했던 사람들에 대해 같이 욕을 하면서 위로를 받아 좀 편해질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가진 외모에 대한 열등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그 순간 욕을 하면서 조금 마음이 편해질 뿐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무시하거나, 자신을 질책하거나, 자신을 화나게 한 상대에 대해서 친구들과 만나서 그들의 뒷담화를 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하는 마음의 치료의 과정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필요하면서도, 과도하게 하게 되면, 매일 다른 이들의 뒷담화만 하고 사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리고 매일 아무런 변화도 없고, 발전도 없이 평생을 그렇게 살게 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이런 대화 내용을 빼면, 과연 우리가 나눌 대화는 하루에 몇 마디나 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상처를 입는 과정에서, 보통은 서로가 잘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위로의 과정에서는 주로 자신의 잘못은 줄어들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잘못만이 과도하게 부풀려지게 된다. 사실 이런 일종의 착각이 결국엔 위로가 되는 주된 이유기도 하기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바로 잡으려 하면, 위로는커녕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되기 때문에, 너무 심한 수준의 자기 합리화가 되고 만다. 즉, 세상 모든 일을 모두 자신 위주로만 보게 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못해서 질책을 들어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나 노력 부족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별 것도 아닌 인간이 잘난 채 한다고 화를 내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은 너무도 많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하면 할 수록 점점 더 중독 되듯 빠져 들어간다. 하지만 이것은 치료가 아닌, 마취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 그 상처의 본질을 해결 할 의지보다는, 점점 더 마취제에만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되고 만다.
 
이 해결책의 두 번째 문제는, 사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들에게 말하면서 위로를 받고 있다고 느끼지만, 생각보다 다른 이들은 자신의 상처에 관심도 없다는 점이다. 또한 입으로는 맞장구를 쳐주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상대의 불행을 은근히 즐기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이 들은 어떤 사람의 불행함에 대한 이야기를 또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하면서 걱정하는 연기를 한다.
 
즉, 우리 인간은 생각보다 다른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면서도 즐기는 성향이 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 드러낼수록 점점 그 자신만 속없고, 불행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상대의 상처를 정말로 진심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그 자신 역시도 그래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대부분은 보통 처음엔 자신의 입은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는 성향을 가졌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서 그런 치료를 시도했다가 상대의 성의 없는 태도로 인해 더 큰 상처를 입어서 마음을 닫아 버리는 경향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성적 문제로 좀 질책을 받고 온 아이가, 상심한 마음에 엄마에게 이것을 털어 놓을 때, 엄마가 그것을 열심히 사는 것이 중요하지, 성적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위로해주기 보다는, 선생님과 같은 입장으로 그러니까 평소에 공부 열심히 하지 라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되면, 아이는 상처를 입게 된다.
 
물론 누군가는 이 험한 세상에서 그 정도의 말에 상처를 입냐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비웃음 역시도 상처를 입은 당사자를 더욱 크게 상처 입히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실 우리는 많이들 그렇게 한다. 자신은 별 것 아닌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누군가 크게 상처 입은 듯 말하면, 그것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대 놓고 비웃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말들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이, 자살하는 사람들에게 그럴 용기가 있으면 열심히 살라고 말해주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번이라도 크게 상처를 입은 사람은 이젠 마음의 문을 닫고는 가능하면 자신의 상처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즉, 마치 무심하고, 무덤덤하며, 상처 따위는 받지 않을 것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처를 대하는 두 번째 태도가 된다.
 
이 두 번째 태도는 크게 자존심이 강해서 자신의 약함을 외부로 드러내지 않는 사람과 과거에 상처를 드러냈다가 더 큰 상처를 입은 사람들로 구성이 된다. 이 두 과정은 비록 원인은 다르지만,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은 동일하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치료되지 않은 채 지속적으로 쌓이면서 남는 상처이다.
 
육체적 상처와 달리 마음의 상처는 외부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당사자가 그것을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 두 번째에 속한 사람들은 표현을 하지 않기 때문에, 상처가 있는지 없는지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더해서 위로를 원하지도 않기 때문에 위로를 해줄 수도 없다.
 
하지만 이들이 남들보다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그나마 상처를 덜 받으려면, 돈이 많거나, 지위가 높아서 자신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 해야 할 경우만 가능하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혼자가 아니기에 결국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들끼리 비교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처를 받는데, 그것을 끄집어 내어서 치료를 받지 않게 되면, 즉 위로를 받지 않으면, 그 상처는 결국 모두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것이 되고 만다. 이것은 상당히 힘들다. 이것은 마치 살이 찢겼는데, 마취를 하지 않고 꿰매는 수술과 같다. 그래서 결국 치료는 되겠지만, 그 순간 순간이 너무도 아프다. 그리고 심한 경우엔 평생 치료가 되지 않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아프기 때문에, 이 사람은 더욱 더 삭막해져 간다. 상처를 입지만, 그것을 부드럽게 치료하지 않아서 점점 상처 입은 짐승처럼 더욱 더 날카로워지기만 한다. 그래서 일명 싸움 닭이 되기도 한다. 또한 분노조절 장애 증에 걸리기도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을 통해 위로를 받는 것에 너무 의존해서도 안되지만, 너무 거부해서도 안 된다. 그것을 거부한 채, 너무 오랫동안 지내게 되면 성질이 고약하고 다른 사람이 대하기 힘든 사람이 되고 만다.
 
사실 이것은 오랫동안 육체적 상처로 인해 고통 받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증상이다. 비록 육체적 상처는 정식 치료를 받기 하지만, 그것이 잘 치료가 되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어서, 당사자가 너무도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면, 그 원래 성격과 상관없이 매우 신경질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도 위로 받지 못한 마음과 같다. 아픈 상처가 오래 지속되면 우리는 누구나 신경질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자존심이나 혹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다른 이들의 위로를 거부하면 살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신경질적인 성향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사실 너그럽고 마음 좋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그다지 꺼려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잘 들어준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상처를 치료 해주기도 하고, 자신의 상처를 치료 받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성향에 나타나는 장점도 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자신의 의지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상처를 입은 만큼 이를 악물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시간도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좀 더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도 많다.
 
그리고 다른 이들과 교류를 최소화 시킬 수 있어서, 인간 관계에 대한 많은 어려움들을 해결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엔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사는 세상에서, 어떤 면에서는 가장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선택을 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성공만 한다면, 결국엔 사람들이 꼬이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꼬인 이들은 더 이상 상처 주는 말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하다. 한번 꼬인 마음은 좀처럼 풀리지 않으며, 그것은 삶을 행복하게 하기 보다는 불행하게 만들 가능성이 많다. 거기에 더해서 잠재적으로 쌓인 상처들이 치료받지 못한 채 날뛰고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매우 폭력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해서, 모든 현상을 자신이 보고자 하는 방향으로만 해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불이 난 집을 보면, 졸지에 집을 잃은 사람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 보다는, 왜 처음부터 화재 예방을 하지 않았냐는 식으로 그들을 질책 하는 것이다. 즉, 이들은 또 다른 이들에게 끝없이 상처를 주고 살아가며, 그로 인해서 결국엔 주변에 사람이 남아나질 않게 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들처럼 변해간다. 즉,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상처에 대해서 마취제를 쓰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를 하지만, 죽음이 임박한 사람에게는 힘들지 않게, 최대한 마취제를 처방하는 방법을 쓴다. 그리고 고통이 심한 수술을 받을 때도 국부적이든, 전신이든 마취를 하고 한다. 그래야 적어도 그 수술 시간만큼은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술이 끝난 후에는 가능하면 마취제를 최소화 한다. 비록 아픔을 약하게 하는 진통제를 주사하긴 하지만, 적당하게 할 뿐, 절대로 고통 자체를 못 느끼게 하는 수준까지는 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마음의 상처 역시도 이런 수준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이들의 위로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것은 당장 힘든 것을 버텨내는 순간 정도에서만 머물러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마취제를 거부하면서 고통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비록 그런 태도는 마음의 의지를 키워 성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도 해주지만, 우리는 결코 성공하기 위해서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성공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성공하면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을 원하는 이유 역시도 돈이 많으면 행복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비록 어린 시절에 돈이 없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무시 당했던 기억 때문에, 평생 돈을 위해 살아온 삶을 살아서, 결국 많은 돈을 모았다고 해도, 행복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많은 돈이 자신에게 과거에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스스로 복수를 했다고 믿게 해줄지는 모르지만, 과연 그들 중 누가 상처를 줬던 말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우리는 자신이 받은 상처는 잘 기억하지만, 자신이 남에게 준 상처는 금새 잊는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를 다른 이들에게 털어 놓으며 모두 위로를 받아 해결하고 나면, 결국 자신의 모습은 끝없는 불만만 늘어놓는 사람이 되고 만다. 사실 많은 인간관계가 이런 용도로 이용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우리는 자신의 상처를 다른 이들에게 말함으로써 치료를 받을 목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자신의 잘남을 떠들기 위해서 사람들을 만난다. 이 둘 모두 우리를 좀 더 행복하게 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좋아한다.
 
사실 인간 관계가 주는 행복 중 대부분은 이 둘 중 하나일 뿐이고, 아주 가끔 공감이나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해서 느끼는 행복이 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매우 얻기가 힘들며, 그런 상대를 만나는 것도,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힘들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치료의 목적이나 자랑의 목적으로 관계를 맺는다.
 
문제는 치료의 목적으로 한 이야기는 결국 상대의 은밀한 행복의 수단이 되고, 자랑을 목적으로 한 이야기는 결국 상대의 은밀한 질투심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되다는 점이다. 이 둘 모두 사실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며, 결국 많은 관계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단절되고 마는 원인이 되고 만다. 그래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인간 관계의 폭이 좁아질 수 밖에 없다. 결국엔 끝없이 단절되어가기 때문이다.
 
상처를 어떤 방식으로 다루든, 그것은 모두 자신의 그릇의 크기나 성격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료할지는 알아서 결정할 문제이다. 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 법에 숨겨진 자신의 심리를 이해할 때, 우리는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상처를 드러내거나 숨기거나 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마지막으로 상처를 주는 말을 하나 덧붙이자면, 우리는 사실 받을 상처 같은 것은 없다. 우리가 받는 대부분의 상처는 자신에 대한 과도한 판단으로 인해 일어난다. 우리는 스스로 좀 더 잘나고, 좀 더 예쁘고, 좀 더 매력있고, 좀 더 똑똑하고, 좀 더 센스 있고, 좀 더 필요하고, 좀 더 가치 있으며, 좀 더 살아 갈 이유가 있는 존재라고 믿고 싶어한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그냥 한 시대를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존재들일 뿐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상처를 받고 싶지 않다면, 그런 자신을 인정하면 된다. 그 누구의 말도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이 마지막 말은 읽은 후 바로 잊어버리기 바란다. 행복한 삶에 방해가 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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