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행복 파장

아이루다 2015. 4. 11. 08:29

 
인간은 행복을 원하기에, 행복 그 자체를 매우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이 말은 좀 헷갈릴 수 있는데, 왜냐하면 행복 그 자체가 어떤 가치들을 통해서 만들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진 행복이 가치가 있다고 하면, 행복과 가치가 각자 서로에게 원인이 되어버리는 관계가 되어버리고 만다. 즉, 가치는 행복의 원인이 되고, 행복 또한 가치의 이유가 된다.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복에 대해 좀 더 근원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복잡하거나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행복을 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목표는 행복함을 향하고 있다. 그런데 이 행복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만들어지며,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자신의 안전함이나 미래의 불투명성이 줄어들었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뭔가 하고 싶다는 욕구를 실현했을 때이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거나,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갔을 때 행복해 한다. 그 이유는, 미래의 안정성을 획득했으며, 그로 인해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각종 이득에 대한 보장으로 인해 여분의 행복을 잠재적으로 획득했기 때문이다. 또한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은 돈도 많이 벌고, 짝을 찾을 때도 유리하며,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남들보다 좀 더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다는 추가적 장점도 있다.
 
우리는 또한 먹을 것을 먹거나, 가고 싶은 여행을 떠나거나 하는 등의, 끝없는 욕구를 실현하는 것을 통해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욕구들을 모두 모아 놓으면, 사실상 그것이 삶이라는 단어로 표현되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이다. 즉, 우리 인간의 삶의 정의가, 끝없이 생겨나는 욕구들을 가능하면 최대한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그리 무리한 표현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두 가지 형태의 행복을 다르게 표현하긴 했지만, 사실은 같다. 안전함 역시도 일종의 욕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안전함은 배가 고플 때 먹는 것처럼 단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동안 평생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절대로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목표라는 점만이 다르다. 그래서 이 둘 모두가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행복은 이렇게나 좋은 것이기에, 우리는 누구나 어떤 경로를 통해 행복을 얻든 상관없이, 자신의 현재가 행복한 상태 이길 바란다. 즉, 원래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생겨난 욕구를 실현하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얻었는데, 이제는 행복을 욕구화 시켜서 행복한 것 그 자체가 목표가 되고 만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길 원하듯, 불행하다고 느끼면 행복 하기를 원하게 되었다. 문제는 배고픔의 욕구는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명확하지만, 불행함을 해결할 수 있는 행복은 얻어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욕구를 실현하는 행복은, 일단 욕구 자체가 생겨야 실현 가능하다. 아무리 먹을 때가 행복한 사람도,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먹을 수는 없다. 그런데 행복을 욕구하는 심리는 행복을 원하기에 무엇을 통해 행복할지에 대한 생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최종 결론적으로 행복하면 된다. 즉, 배가 부르다면, 토하기라도 해서 속을 비우고는, 먹으면서 행복함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욕구화된 행복은, 마치 행복에 대한 욕망이 다른 욕망들과 같다는 식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즉, 행복이란 것 그 자체가 다른 것들처럼 가치화 되고, 욕구화 되며, 실현해야 할 목표가 된 것이다. 일반적인 욕구 중 하나인, 오랫동안 가고 싶었던 여행은 그 사람에게 가치화 되고, 욕구화 되며, 실현해야 할 목표가 되는 것이 맞다. 그래서 여행을 떠남으로써 그것을 통한 행복을 얻는다.

 

그런데 이젠 행복 자체가 그런 대상 중 하나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행복에 대한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그것은 먹을 것도, 여행도, 만남도, 데이트도 아니다. 사실 행복은 실체가 없다. 행복은 단지 여러가지 욕구들이 실현된 후에 얻어질 수 있는 선물이다. 그런데 이젠 그 결과물인 선물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아무튼 결론적으로, 그래서 행복은 그 자체가 욕망화 되고 말았다. 그리고 행복을 욕망화 한 우리는, 점점 행복하기만 하다면, 어떤 경로를 거치는지에 대해서 그리 큰 관심이 없어지고 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원했던 행복만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얻는 중간 과정을 점점 덜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사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만약 결론적으로 동일한 행복을 얻었다면, 누구나 그 중간 과정이 그리 어렵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는 한 시간을 꼬박 일해서 얻을 수 있는 행복을 다른 누군가는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는 1분이면 얻어 낸다면, 과연 누가 한 시간을 일하길 바라겠는가? 우리가 행복 그 자체만을 원한다면 말이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해서 행복할지에 대해서 고민하기 보다는, 어떤 것들이 우리를 쉽게 행복하게 해주는지에 대한 정보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그런 정보는, 옆 사람, 친구, TV, 기업이 광고, 책 등을 통해서 얻어진다. 사실 이런 현상은 돈을 통해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돈은 원래 일하고 노력해서 얻는 결과물이었으며, 행복을 위해 쓸 수 있는 자산이었다. 그래서 돈이 있으면 쉽게 행복을 얻을 수 있다. 

 

이런 돈의 이런 특징은, 행복에 대한 욕망과 합쳐져서 결국엔 행복을 쉽게 얻는 수단으로써 너무도 중요해졌다. 과거엔 먹고 살기 위해서 돈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본격적으로 쉽게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돈이 필요해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 돈만 있다면 언제나 편하게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힘들게 요리를 하거나,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서 고생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지 유명한 식당에서 사먹거나, 많은 돈을 들여서 잘 만들어진 제품을 사면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돈만 있다면 불행해도 괜찮다고 믿는 사람들까지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욕망화 된 행복은, 그 행복함 자체를 다른 이들에게 자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아주 오래된 인간의 습성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행복을 다른 이들에게 자랑하는 것을 즐겨 했다. 그리고 그 행복함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축하해주거나 부러워해줬다. 또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질투하면 안 된다는 암묵적 협정도 맺어져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행복한 사람의 행복을 망쳐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고, 그 질투심으로 인해 심각한 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질투심을 느낀 당사자 역시도 언젠가는 자신 역시도 행복을 자랑할 기회가 있을 수 있는데, 평소에 질투심을 너무 드러냈다간, 어느날 자신이 행복할 때 아무도 자신의 행복을 축하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소에 질투심을 감추고 사는 것이 좋다.
 
그런데 기술 문명이 그리 발달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단지 주변 이웃이나 친인척 정도의 행복에 대한 소식을 듣고 살면 되었지만, 이제는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그 대상이 지구 전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더해서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자랑할 수 있는 아주 좋은 도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SNS 라고 불리는 컴퓨터 프로그램들이다.
 
이런 도구들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서 매우 빈번하게 다른 이들의 행복함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더해서 그런 행복들은 주로 사진을 통해 증명되고 있기 때문에 대상 숫자가 좀 더 많아진다. 왜냐하면 사진은 얼마든지 상황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 순간이라도, 사진을 찍는 순간엔 웃으면서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띠울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욕구화된 행복에 대한 어떤 반발심 같은 것을 느끼고 그것을 비판하거나 거부하기도 한다. 즉, 음식을 먹을 때 사진을 찍는 사람을 보고는, 왜 그런 짓을 하냐고 비난하거나 왜 그러는지 의아해 한다. 그런 사진을 찍어서 남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사실 행복한 것도 아니고 가치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어떤 면에서 이들의 비난과 거부는 나름대로 타당하다. 왜냐하면 행복이 욕구화 된 세상에서, 과정은 너무도 쉽게 생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맛난 먹을 것을 먹을 수 있는 행복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자랑할 수 있다면, 어떤 희생을 치뤄도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단순한 시점에서만 바라보고 비난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도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욕구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그것은 비난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그래서 음식 사진을 찍는 이들은, 그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며, 그것이 남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면, 왜 그것을 비난하냐고 화를 낸다.
 
그리고 이들의 분노 또한 타당하다. 왜냐하면 비판하거나 거부한 사람 역시도 무엇인가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좀 더 본질적인 시선을 바라보면, 이 상황에서도 비판하는 행위 그 자체가 그 사람의 행복을 높여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사람은 다른 이들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형식은 다른 이들에 대한 비판으로 채워졌지만, 사실 내용은 자신의 행복을 충족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결국 다른 이들의 행복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판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은 온전히 타당할까는 조금 다른 얘기다. 그들이 말하는 대로, 단지 어떤 행동들이 다른 이들의 삶에 영향을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행복 추구는 이해되어야 할까?
 
사실 이 질문은 정말로 답을 내기가 힘든 문제이다. 쉽게 예를 들어서 마약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원래 마약은 사람의 삶을 망치기 쉽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마약을 하는 것을 매우 위험한 행동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돈이 매우 많다. 그래서 평생 마약을 해도 전혀 재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약을 하면서도 건강을 충분히 생각해서 운동도 하고 관리도 한다. 결국 그래서 마약을 통해 나타나는 일반적인 부작용도 별로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마약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질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법은 어겼으니까 처벌을 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 말고 또 다른 어떤 기준에서 이 사람의 행동을 비판할 수 있을까? 사실 담배와 대마초의 문제를 생각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담배와 대마초는, 단지 담배는 합법화되어 있고, 대마초는 불법이란 것만 차이가 난다. 그리고 더해서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도 있다. 그러니 대마초가 불법이라는 것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음식 사진을 찍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람과 그것은 각자 행복인데 왜 오지랖을 떠느냐라고 반문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아이를 잃은 후,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친구를 만나 위로를 해주는 자리에서 나온 음식 사진을 찍는 친구의 모습에 대해서는 각자 과연 뭐라고 말을 할지 궁금하다.
 
아마도 이런 경우가 되면, 비판의 입장에 서는 사람이 대다수이고, 그래도 자신의 행복인데 나둬야 한다고 하는 사람이 소수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수라는 말이 아무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작년에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유족들이 광장에서 단식 투쟁을 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 어떤 소수의 사람들은 그 옆에서 닭을 먹었다. 말 그대로 유족들을 대상으로 자신이 믿는 믿음에 따라 비웃음과 비난을 온몸으로 퍼부은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비판했었다. 그런데 이때도 역시 소수의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을 용기 있는 것이라고 말했으며, 좀 심하긴 했지만 속 시원하다고 말했다.
 
이 경우는 어떨까? 이들이 통닭을 먹으면서 말 그대로 '인증 샷'을 남겨서 SNS에 올렸다면 말이다. 물론 엄청난 욕을 먹긴 하겠지만, 여전히 소수는 그들의 행동을 용기 있다고 해줄 것이다.
 
누군가는 어떻게 음식 사진을 찍는 것과 유족 앞에서 통닭 먹는 것을 비교할 수 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행동 모두 본질적으로 행복하고 싶어서 하는 행동이란 점에서는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단지 여기에서 차이점이라면, 과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불편함이나 불행함을 어디까지 무시할 수 있느냐에 따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기준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보통 사람들이 단순하게 음식을 먹기 전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행위는 사실 다른 이들의 삶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소수의 어떤 사람들은 사진 속의 행복한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질투심뿐만 아니라, 불행에 빠져서 헤어나올 희망이 없는 자신의 처지에 깊은 좌절과 절망감을 느끼고는, 결국엔 자살을 할 수도 있는 가능성도 부정할 수만은 없다.
 
그런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모두 신경 써서 살 수는 없자 나요' 라고 스스로를 변호할 것이다. 사실 이 말은 충분히 인정할 만한 변호이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가시적으로는 이해하고 예측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영역에서 어떤 행동이 일어날지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알지 못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비록 그것이 자살과 같은 심각한 사건을 야기시켰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어떤 관점과 기준에서 분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상 사람들의 의견이 늘 다르게 표출되며 결국 자신의 생각과 입장에 따라 나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히 음식 사진을 찍는 행동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음식 사진 자체를 거부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즐거운 자리라는 한정에서만 허용하고, 어떤 사람은 평소에 먹지 못해본 것이라면 비록 그곳이 장례식장이라도 허용하며, 어떤 사람은 다른 이들을 조롱하는 자리까지도 허용하는 형태로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각자의 기준에 맞춰서 판단되기 때문에 사실상 표준화 된 기준이 없는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정색해서 그런 행동을 비판을 하거나 그것에 발끈해서 당위성을 주장하게 될까? 사실 누구도 맞지 않고, 누구도 틀리지 않는데 말이다.
 
여기에서 딱히 누군가의 입장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하게 인식해야 하는 포인트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들어내는 각종 영향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것을 파장이라고 부른다. 즉, 우리는 존재 자체가 파장이다. 이것은 때로는 물 웅덩이에 일어난 둥근 동심원 형태의 파장처럼 크게 오랫동안 지속되기도 하고, 생기자마자 사라지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어떤 파장이 일어나면, 이것은 계속 주변부로 퍼져나가는 현상은 동일하다. 물론 파장의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약해지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파장이 중심점에 가까울수록 더 큰 영향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우리는 존재 자체가 파장이며, 행동은 더욱 더 큰 파장이다. 그래서 우리 개개인이 하고 사는 모든 행위는 다른 이들에게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여기에서 다른 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선한 행동이라고 하고, 다른 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악한 행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선악 조차도 어떤 이들에겐 선한 것이 다른 이들에겐 악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나눌 때는 비율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즉, 10명 중 9명이 좋은 영향을 받고 1명이 나쁜 영향을 받으면, 이것은 선한 행동이 된다. 반대로 9명이 나쁜 영향을 받고 1명이 좋은 영향을 받으면 악한 행동이 된다.
 
경찰이 도둑을 잡은 것은 좋은 것이지만, 도둑의 가족에게는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에 대한 큰 위기가 온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반드시 도둑은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이 파장은 인간들 모두가 각자 자리에서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뒤섞인 파장이 어떤 문제를 복합적으로 만들어 낼 지 예상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우연히 다리를 지나는 군인들이 발을 맞춰 걸어서 고유 진동수로 인해 다리가 심하게 흔들리는 상황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연과 우연함이 겹쳐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고, 각자는 별 일이 아니지만, 이것이 좋지 않은 시기에 좋지 않는 장소에서 일어나서 대형 사건화 되는 것도 목격한다.

 

그래서 우연히 길을 걷다가 넘어져서 버스를 놓쳤는데, 그 버스가 바로 사고가 나서 승객 전원이 죽는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반대로 버스를 타자마다 운좋게 빈자리를 발견하고는 앉았는데, 그 자리에 누군가 토해 놓은 자리라서 아무도 그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 내는 파장이 전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쳐서 결국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이것은 마치 카오스 이론과 같다. 북경에서 나비의 날개 짓이 뉴욕에서 폭풍을 만들어 낸다는 이론처럼 우리의 행동이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킬 지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단지 모르기 때문에 영향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식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행동이 그리 문제가 될 리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사실 음식을 먹는 행위부터 우리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 가게의 영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그 가게를 찾은 사람들 중, 자리가 꽉 차서 다른 식당에 가고 있는 사람들이 다른 식당에 갔다가 봉변을 당한 사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가게의 종업원의 서빙을 기대하면서 그들의 기분이나 컨디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나마 이런 현상은 그 가게라는 공간에 국소적인 공간에서만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행동은, 그 파장을 전 지구로 넓힌 행동이 된다. 물론 좁게 보면, 자신의 SNS에 방문하는 친구들에게만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그래서 어떤 이슈화된 사건이 터진 날에는, 그 사건 당사자의 SNS에는 엄청난 사람들의 방문이 이루어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다른 이들을 불편하게 한 것도 아니고, 문제가 될만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간섭하냐고 되묻는다. 사실 그것이 어떤 영향도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그 어떤 근거도 없으며, 차라리 어떤 식으로든 의도하지 않는 영향을 미치는 것이 훨씬 더 이론적으로 타당하게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결국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다면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자신의 생각으로만 끝나야 한다. 이것이 옳을 수는 없다. 그냥 자신과 잘 안 맞는 것이다. 설령 만 명 중에서 9천 9백명이 지지한다고 해도 숫자는 단지 숫자에 불과하다. 만 명 모두 지지한다고 해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독일에서 히틀러에 대한 지지는 엄청났다.
 
또한 이런 사람들의 지적이나 비난에 대해서 다른 이들에게 큰 영향도 미치지 않는, 단순한 행복을 위한 행동을 하는 것을 비판하냐고 반박할 수는 있지만, 이 역시도 자신의 생각으로 끝나야 한다. 이것이 옳을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의 행동이 세상에 어떤 파장을 일으킬 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이것은 단지 우리 자신들의 머리 속에서만 유효한 이론이다.
 
설령 집에서 혼자 한 행동이라고 해도 사실상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만약 혼자 있을 때 홀딱 벗고 거울 앞에서 춤을 추는 사람이나 옆집을 훔쳐 보면서 자위 행위를 하는 사람이, 그런 행동을 남들이 모르면 전혀 어떤 파장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그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사람들은 춤을 춰서 기분이 좋아질 수도 있고, 자신의 은밀한 변태 행위로 인해, 그런 행동을 하고 난 후 심리적 상처를 입어서 기분이 나빠질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진 사람은 밖으로 나와서 다른 이들을 만날 때, 어떤 식으로든 다른 감정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즉, 혼자서 하는 행동조차도 영원히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엔 어떤 식으로든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아무런 의견을 표현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의 비판에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해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사실 이런 과정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다. 단지 그것은 선과 악의 싸움도 아니고, 정당함과 부조리함의 싸움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가치들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생각의 차이로 인한 각자의 입장 차이일 뿐이다.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믿으면서 말하는 순간, 우리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많은 돈을 벌었다면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써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노력해서 번 돈을 자기 마음대로 쓰는데 왜 시비를 거냐고 말하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 둘 모두에게 정당한 것이란 없다. 그래서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다.

 

단지, 우리가 인간이란 존재이기 때문에, 선택이란 것이 가능하다. 그래서 자신에게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남을 돕는 것이 좀 더 나은 행동이 될 수 있다. 사실 그리고 그런 행동은 자신을 좀 더 행복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돈을 내 마음대로 쓰는데 왜 시비거냐고 큰소리 치는 것도 웃기는 행동이다.
 

그럼에도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면 그 사람은, 그 자신은 세상에 전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존재감이 전혀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를 주장하고 있는 꼴이 되고 만다. 즉, 스스로가 세상에 어떤 파장도 일으킬 수 없는 허깨비 같은 존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다면 정말로 비참한 삶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단세포 생물도 어떤 것이 부패할 때 썩은 부위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내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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