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누가 더 사랑할까

아이루다 2015. 4. 16. 09:02

 
사랑은 인간의 여러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단어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은 바로 남녀간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랑일 것이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그 어떤 관계보다도 강렬하고, 모든 것을 타버릴 듯 하며, 단 하루만 살 것처럼 산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랑은 주로 젊은 사람들의 몫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생식이 가능하며 삶이 서툴기 때문이다. 즉, 경험이 부족하고 아이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이들이 가장 강렬한 사랑을 경험한다. 물론 중년의 나이나 노년의 시기에도 사랑은 할 수 있다. 단지, 그때에 경험하는 사랑은 부드럽고 은은하다.
 
우리는 보통 젊은 사람들의 사랑에 관심이 많다. 일반적으로 늙은 사람들의 사랑은 보기에는 좋지만, 너무 밋밋하다. 반대로 젊은이들의 사랑은 지켜보는 사람까지도 같이 흥분에 빠뜨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다. 젊은이들의 사랑에서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즉 자신의 목숨마저도 그것을 위해 내 놓을 수 있는 각오가 되어 있다. 그들은 서툴기에 순수하다.
 
그런데 이렇게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젊은이들도 언젠가는 그 사랑으로 인해서 싸움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싸움의 거의 대부분은 과연 누가 더 사랑을 하는지에 대한, 도저히 잴 수 없는 것을 서로 비교함으로써 일어난다.
 
즉, 상대가 평소와 달리 소홀하다고 느끼거나, 상대가 자신보다 남을 좀 더 신경 써주는 듯 느끼거나, 자신 이외의 다른 이들에게 친절하게 대했거나,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이나 시간 등을 아깝게 여기는 듯한 행동을 하거나, 다른 이성에게 눈길을 돌리거나, 자기를 잘 이해해주지 못하거나, 약속에 늦었거나, 배려심이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할 때 그들은 각자 감정이 상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싸움이 일어나면, 서로 얼마나 사랑이란 감정에 더 충실한지, 덜 충실한지를 가지고 싸운다. 이때 보통은 자신이 상대보다 더 충실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상대는 그것을 반박하거나 너도 역시 그렇지 않냐는 식으로 반격한다. 그래서 그들은 일어난 싸움을 이기기 위해서 오래 전 사건들까지도 모두 끄집어 낸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을 더욱 격렬하게 할 뿐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감정이 그렇게 격렬했던 만큼 그 사랑으로 받는 상처 역시도 매우 크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매우 심한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이렇게 사랑은 우리를 좋게 하기도 하지만,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우리는 왜 사랑을 하면 좋을까?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사랑의 본질에 대한 답을 생각해낼 수 있는 질문이다. 사실 답도 정말로 단순하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 그 무엇보다도 행복하다. 그리고 강렬한 사랑일수록 더 행복하다. 심한 경우엔, 너무 행복해서 그것을 얻지 못하거나 뺏기는 것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로 강렬하다.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자발적으로 내놓는 경우는 자살이나 사랑에 빠졌을 때이다. 이것은 단지 젊은이들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마찬가지다. 이 외에는 오직 종교적 믿음이나 사상의 신념 등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누구를 위한 감정일까? 너무도 사랑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수 있는 상대를 위한 감정일까? 아니면 자신을 위한 감정일까?
 
이 질문은 언뜻 생각하면, 상대를 위한 감정이라고 답할 수도 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지면,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까지도 내놓을 수 있으니, 어떻게 이것이 자신을 위한 감정이 되겠는가? 이 모든 것은 상대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질문에서 사랑을 그것의 최종 목적인 행복으로 바꾸면, 이렇게 변한다. 행복은 누구를 위한 감정일까?
 
바꾸고 나니, 이 질문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사랑은 그 대상이 있지만, 행복에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누구를 향해서 일어나는 감정이 아니다. 그냥 우리들 모두 그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니 행복이 누구를 위한 감정일까 하는 질문은, 질문 자체가 틀렸다. 행복을 누구를 위해서 느끼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사랑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로를 통해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그래서 사랑은 행복을 가장 높게 끌어 올리는 수단으로써 의미 있을 뿐이다. 즉, 사랑만큼 행복 도우미로써 좋은 도구가 없다. 사랑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행복의 최대치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사랑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이 모든 행복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이 요구는 그리 부당하지는 않다. 실제로 그렇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것은 모든 행복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게 되어 있다는 특성 때문이다.

 

이것은 행복의 불문율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요리도 365일 동안 매일 먹이면 나중엔 냄새만 맡아도 토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행복도 시간 앞에서는 답이 없다. 우리가 그것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느끼려면 그 행복에 대한 기억을 잊는 수 밖에 없다. 우리가 행복한 것들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매일 다른 음식을 먹으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은 불가능하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람을 매일 바꾸면서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으로써 얻는 행복은 처음 사귀기로 한 순간에 가장 높아졌다가 육체적 접촉에 따라 몇 번의 등락을 거듭한 후, 서서히 줄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빠르게 줄어든 사람은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사랑이 다른 친구들과의 만남 수준으로 줄어든다. 하지만 비극은 한쪽만 먼저 줄어든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생겨난다. 사실 둘 모두가 비슷하게 줄어들면, 단순히 헤어지면 끝이다.
 
우리의 머리는 오래된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대한 근거 없는 의무를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만든 주체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영화, 책이다. 우리는 사랑을 그것들로부터 정의 당했다. 그래서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는다.
 
사실 사랑은 변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행복은 변한다. 반복된 자극은 분명히 지겨움과 권태를 부른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랑은 유지하지만, 사랑으로 인해 얻는 행복은 줄어들고 만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의 사랑에 대한 가치를 믿으면서 그것을 부정한다. 사랑은 변하면 안 된다.
 
이것이 결국 남녀가 사랑이란 감정을 저울질하면서 싸우는 이유가 된다. 이제 갓 사귀기 시작한 남녀는 좀처럼 저울질을 하지 않는다. 남자는 저돌적으로 나오고, 여자는 최대한 방어적이면서도 남자가 지치지 않을 정도를 유지하려고 애쓴다. 사실 여자들도 본능적으로 안다. 남자가 원하는 것을 모두 다 들어주면,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새 지겨움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문제는 사랑 이외에서 것으로부터 얻는 행복이다. 그리고 보통 여자의 행복은 남자와 함께 할 수 것들이 많다. 쇼핑만 빼면 말이다. 여자들의 행복인 대화, 먹거리, 여행 등은 모두 남자와 함께 할 수 있다. 사실 남자들도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 심지어 쇼핑도 좋아하는 남자도 있다. 하지만 남자는 그것 말고도 좋아하는 것들이 더 있다.
 
남자들은 운동처럼 몸을 쓰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얻기도 하고, 낚시하면서 밤을 새거나 하는 취미를 즐기기도 한다. 남자들은 술을 밤새워 먹거나, 당구장에서 몇 시간이고 당구를 치기도 하고, 게임을 하면서 밤을 새기도 한다. 사실 평균적으로 남자들이 즐기는 행복의 종류는 여자들의 그것에 비해서 정말로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여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수의 여자들도 남자들이 즐기는 취미를 즐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리 흔하지 않고, 그런 경우 남자들이 그녀를 그냥 놔두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남자들에게 가장 좋은 여자 친구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같이 해주는 여자이다.
 
이런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서로 사랑에 대한 집중도를 차이 나게 만든다. 남자는 여자가 없는 상황에서도 다른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여자는 보통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남자들은 이 모든 것을 한번에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행복한 자리에 여자를 데리고 다니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결론적으로 어리석은 짓이 되고 만다. 여자는 그것에 대한 더욱 더 큰 불만을 갖게 된다.

 

이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남자는 자신이 행복한 공간에 가면, 자신의 여자보다 자신이 행복을 느끼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친구들과 만남에 여자친구를 데려가면, 여자친구보다는 자신의 남자 친구들과 대화에 더욱 열중하게 된다. 당연히 자신의 여자에게 소홀하게 대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사실 그래서 이것은 명백하게 남자의 어리석음이다.
 
그래서 이제 둘은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하지 말기를 강요한다. 자신의 사랑을 방해하는 요소,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행복을 방해하는 요소에 어떤 도덕적이거나 사회 통념상의 문제가 있다는 근거를 갖게 되면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공격하는 것이다.
 
일단 술자리는 가장 큰 공격 대상이 된다. 여자들은 남자들의 술자리를 반대한다. 그래도 그러다간 남자의 인간 관계를 모두 막을 수는 있으니, 적당히 조절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 요구를 조금 냉정히 생각해보자. 친구들과 만나면서 술을 마시고 노는 것은, 술을 조절하는 순간, 관계까지도 조절이 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술을 끊으면, 술만 끊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까지 모두 끊겨 버리는 것이다.
 
사실 운동, 여행, 게임 등등 다른 이들과 함께 해서 행복한 많은 것들이 그렇다.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먹을 것을 좋아해서 같이 몰려다니던 친구들이라도 다이어트를 위해 먹을 것을 조절하려고 하면, 그 관계가 소원해질 수 밖에 없다. 같이 있는 것도 좋지만, 먹을 것을 먹는 것이나, 술을 먹어서 기분 좋아지는 것 역시도 매우 좋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그 분위기가 좋지 않아지는 경우도 생긴다. 술에 취할 때는 모두 취해야 한다. 먹을 것을 먹을 때는 모두 행복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으면, 분위기가 쳐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랑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그것을 줄이거나 없애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랑도 행복하기 때문에 하고 있는 것뿐인데 말이다. 그나마 사랑은 결혼이라는 결말이 있기에 버틴다. 누구나 그렇듯, 결혼은 하고 살아야 결국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다. 가정을 꾸린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산다.
 
그렇다고 해도 사랑을 통해 얻는 행복이 계속 같은 수준으로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행복해 보이는 많은 가정에서, 그들이 키우는 아이가 없다면 그 가정의 행복이 유지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그리고 부부는 사랑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필요성, 즉 기능적 역할로써 살아간다. 많은 부부가 그렇게 산다.
 
일반적으로는 여자가 남자의 사랑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만, 여자가 아이를 낳게 되면, 상황은 돌변한다. 보통 아이를 낳기 전의 여자들은 남자를 바라보고 살지만, 아이를 낳으면 여자의 사랑은 남자가 아닌 아이를 향한다. 그리고 남자에게는 육아 도우미로써 역할을 요구한다. 이것은 당연한데, 그 아이가 남자의 아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때 어떤 남자들은 상처를 받기도 한다. 여자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낯선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행복에 편승하거나 혹은 도저히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면, 밖으로 돌게 된다. 모든 남자가 아이를 키우는 것에 행복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행복한 것을 기반으로 한 인간 관계는, 행복하게 해주는 그 주체를 제거하기가 힘들어 진다. 즉, 술을 끊거나 하는 등의 행동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이젠 다시 생각해보자. 과연 상대와 자신이 서로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유효한 행동일까? 사실 그것은 정말로 불필요한 짓이다. 그런 행위는 사랑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행복을 얻는지를 비교하는 것이다. 친구와 쇼핑을 할 때, 술을 마실 때, 먹을 것을 먹을 때, 여행을 할 때, 자신이 느끼는 행복만큼 그들도 느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행복은 각자의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자신만큼 사랑에 행복해 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행복 코드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그때는 비교하지 말고 헤어져야 맞다. 한 명이 술을 잘 먹고 다른 한 명은 술을 못 먹는데 둘이 꼭 어울려서 술 먹을 때 마다 스트레스 받는 짓은 그만둬야 한다.
 
사실 이때 사랑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믿음처럼 사랑해서도 아니라, 사랑이 소중해서도 아니다. 그 사랑을 포기하면 행복을 잃어서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많은 헤어진 연인이 흘리는 눈물은 사랑의 아픔이 아닌, 행복을 잃은 슬픔이다. 이것은 마치 너무도 좋아하던 로봇 인형을 잃어버리고 우는 아이와 같다. 단지 그 로봇은 다시 사면 되지만, 사랑은 다시 사기가 힘들다.
 
그래서 모든 헤어짐은 다른 만남으로 치유된다. 즉, 그 만큼의 행복을 다시 누릴 수 있는 상대를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책에서 교육을 받았다. 사랑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서 자꾸 이미 없어진 사랑을 그리워한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자신을 힘들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거부한다.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자신의 그 사랑이 훼손된다고 믿는 듯 하다.
 
이것은 착각이다. 그냥 없어진 행복이 그리운 것이다. 그 강렬했던 행복을 다시 맛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헤어짐의 고통을 빨리 잊는 방법은 최대한 마음을 비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된다. 그리고 정 이것이 잘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통해서 비슷한 수준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사랑은 행복지수로써는 최고치였다. 도대체 어떤 것이 그것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의 이런 속성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나름대로 잘 굴러가는 편이다. 만약 우리 인간이 사랑을 아무런 제약 없이 그냥 뒀다면, 세상은 정말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목숨을 걸게도 하지만, 사랑은 상대의 목숨도 뺏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현명한 대책을 내 놓았다.
 
그것은 바로 사랑에 대한 의무이며,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변해가는 사랑에게 경고를 보내고 있다. 그래서 변해도 변하지 않은 척 해야 한다. 누구도 사랑은 변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것은 사랑의 신성함에 대한 도전이 된다.
 
단지 행복 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마치 종교처럼 믿어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이다. 사랑의 본질은 다른 모든 것들처럼, 인간의 행복인데, 사랑은 특별한 취급을 받아서 그 자체가 성역화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근거로 상대의 변화를 억제한다. 그래서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의 다른 행복들을 포기해야 한다고 강요한다.
 
우리는 사랑의 신성함을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상대의 행복을 제거시켜 버린 꼴이 된다. 그러면서도 떳떳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랑이 그런 권리가 있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사랑에 대한 편견은 사실 좋은 면이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정을 꾸리고 미래 세대를 키우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데, 이때 사랑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 사랑이란 것은 가정을 유지시키고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보편화된 방법이다. 누구나 사랑을 할 때 그렇게 행복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여행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듯, 누구나 사랑을 최고의 행복으로 꼽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사랑이 최고라고 결정된 사회를 살아간다. 그래서 거부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이 변한 것 같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펄쩍 뛰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하지만 더욱 더 시간이 흐르면, 남는 것은 의무감뿐이다. 이것이 오래된 연인들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들은 관성적이며, 타성적이며, 의무감 만으로만 사랑을 유지한다. 그래도 사랑은 소중하며, 변하지 않으며, 과거에 좋았기 때문에 놓을 수가 없다. 이때 해결책은 결혼을 하든가, 헤어지는 방법뿐이다.
 
사랑은 변하기에 우리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인정해야 할 것은 사랑이 변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믿는 사랑의 신성성을 버려야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사랑이 완성될 수 있다. 정말로 진정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면 말이다.
 
한 눈에 반하는 사랑은 가능하다. 하지만 잘된 경우만 알려진다. 영화는 영화이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것이 주는 환상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을까? 당연하다. 그런 사랑을 꿈꾸고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고 믿어야 그만큼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싶기에 비록 꿈이라고 해도 그 행복한 꿈을 깨려고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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