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구속에 대한 이야기

아이루다 2015. 2. 2. 09:18

인간은 살아가면서 수 많은 종류의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그런 수 많은 관계를 각자 이름 지어서 분류하곤 하는데, 가족, 친구, 연인, 부부, 친척, 지인, 그냥 아는 사람, 사업상 아는 사람, 옆집 사람, 동네 사람 등등이 그런 용도로 사용되는 용어들이다.
 
인간의 삶은 관계에서 시작해서 관계로 끝난다. 특히나 시작과 끝 지점에는 가족이 중요한데, 태어날 때는 부모가, 죽을 때는 자녀가 그 곁을 지킨다. 우리가 가장 약해지는 시점에 각자의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을 무척 소중히 여길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나머지 관계들 역시도 살아가면서 많은 도움을 주고 받기 때문에, 사실 타고난 능력과 맺은 관계로 인해 삶이 결정된다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수 많은 관계 속에서, 그 다양한 만큼의 다중적인 모습을 보이곤 한다. 물론 이 모든 종류의 다양함은 단 한 명의 개인에게서 나타나지만, 이것은 각자의 관계 속에서 일관성이 유지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은 이것에 대해서 잘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려운 자리에서는 조신하고 얌전한 척 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만날 땐 정신 없이 떠드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과 자리를 함께 할 땐, 냉막한 분위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수 많은 종류의 모습 중에서 우리가 그다지 선호하지 않고, 또한 주변에서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구속적 관계를 원하는 사람의 모습이다. 사실 구속은 관계의 종류라고 말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럼에도 구속은 많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런 관계를 원하기도 하고, 그래서 맺고 살아가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구속에 대한 우리들의 입장은, 개 목걸이와 비슷하다. 우리는 목줄에 묶인 개를 그다지 좋게 바라보지는 않는다. 물론 인간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서 인간과 같은 판단을 할 수 없는 개는 목줄을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명백히 개의 행동을 제약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개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유가 구속된 상태를 싫어한다. 사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우리는 자유를 잃었을 때, 죽을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수용소에 갇히거나, 감방에 갇혔을 때, 어딘가 추락해서 구덩이에 갇혔을 때, 방에 갇혔을 때 늘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다. 물론 이런 물질적 공간에 대한 갇힘 말고도 정신적인 갇힘도 존재하는데, 이때도 비슷한 두려움을 느낀다.
 
물론 이때는 두려움이라고 하기 보다는 답답함이라고 해야 더 옳지만, 그 강도가 자신이 감당하는 수준을 넘어서면, 그때는 정말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겪어야 하는 슬픔이기도 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인간은 또한 구속을 원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개의 목줄은 개를 구속하기도 하지만, 개의 안전을 보장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해서 그 목줄을 쥔 주인이 개에게 어떤 악의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개에게 목줄을 준 사람의 존재는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좋은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아이들은 어릴 때는 부모의 구속을 원한다. 물론 세네 살만 되어도 아이는 틈만 나면 뭔가 흥미에 이끌려 부모 곁을 떠나려고 하지만, 언제라도 겁이 나면 금새 부모에게 달려와 안겨서 자신을 보호주길 바란다. 그리고 이 행동은 바로 안전함을 위해서 부모의 구속을 요구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구속 받길 원하는 것에는 안전함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일단 첫 번째는 바로 결정에 대한 어려움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 많은 순간을 결정이란 과정을 통해 선택을 해야 하는데, 사실 이런 선택들은 옳을 것일 수도 있지만, 틀릴 경우도 꽤나 된다. 그래서 우리는 잘된 선택에 대한 만족도 얻을 수 있지만, 잘못된 선택에 대한 후회도 책임을 져야 한다.


특히 나 홀로 하는 선택인 경우라면, 잘못되더라도 그냥 나 혼자 후회하고 말지만, 다른 이와 함께 하는 선택인 경우에는 그것이 잘못되었을 경우, 그 책임감은 꽤나 묵직하다.
 
그리고 더해서 그것이 꽤나 심각한 경우엔 다른 이들의 강한 비난을 들어야 하고, 실망감을 안겨서 관계가 틀어질 수 있음을 알기 때문에 더욱 더 선택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목줄이 잡힌 개는 어디로 갈지 선택할 필요가 없다. 설령 잘못된 방향으로 가더라도 주인이 알아서 목줄을 당겨주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더해서 그로 인해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는 모르지만, 책임감을 느끼거나 비난을 들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설령 그 선택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니 그냥 뒤에서 대표로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지내면 된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리의 대표로 나서서 선택하는 사람, 즉 일명 리더라고 불리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리더를 뽑아서 우리를 대표해서 선택하도록 하고는, 그 선택이 마음에 들 때는 추종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비난을 한다.


이것은 사는 것을 매우 단순화 시켜주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앞에 나서서 스스로 리더가 되는 이들은, 자신이 속한 무리를 어디론가 옳은 곳을 가게 할 수 있다는 믿음과 다른 이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그런 행동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구속 받기를 원하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구속을 통해 관계가 깊어지기 때문이다. 개의 주인은 다른 이의 개의 목줄을 쥐지 않는다. 주인은 바로 자신의 개의 목줄만을 쥐는데, 이때 개와 주인은 다른 개와 다른 사람의 관계와는 다른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중이다. 주인은 개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하고, 개는 주인에게 충성심과 한결 같이 꼬리를 흔들어 반가움을 제공한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구속한 상태를 못 견뎌 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서로 적절하게 잘 어울리게 되면 매우 좋은 관계를 맺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이것이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 그 구속을 한쪽이 견디지 못할 때 일어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도한 구속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이것은 관계를 망치는 흔한 이유가 되곤 한다.
 
구속 받기를 원하는 세 번째 이유는 삶 속에 완전히 녹아 든 구속 그 자체 때문에 그렇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는 ‘쇼생크 탈출’ 이란 영화에서 레드라는 이름을 가진 배역으로 나온 모건 프리먼이 가석방을 받아 어느 식품점에서 일할 때, 주인에게 화장실을 갈 때마다 허락을 받는 장면에서 나온다.


그는 그때 나레이션으로 허락 받지 않고는 화장실에서 오줌도 나오지 않는다는 표현을 썼다. 사실 수 십 년간 교도소 안에서 허락을 받고 오줌을 싸던 그가, 밖에서 갑자기 자유로워지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나온 더 늙은 죄수는 그 자유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자살을 했었다.
 
인간에게 이런 종류의 구속은, 그 다른 이유를 달고 있는 구속에 비해서 가장 질이 좋지 않다. 이것은 오랜 동안 구속 환경에 노출된 사람에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것을 극복하기란 정말로 쉽지 않다. 다행인 것은, 이런 환경에 장시가 노출된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점과, 설령 어린 시절에 그것을 경험했더라도 어른이 된 후에는 어느 정도 스스로 그것을 극복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구속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인이 된 이들 중에서 구속에 대한 집착과 구속을 원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사실 구속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구속에 대해 가장 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다.
 
사실 구속을 원하는 사람들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중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 나쁘지 않는 구속 중 하나는 바로 결혼을 통해 삶을 살기로 마음을 먹는 사람이다. 보통은 여자들이 이런 입장이 많은데, 이것은 사람에 대한 구속이기도 하지만, 사실 남자가 가진 돈에 대한 구속이기 때문이다.


남자를 잘 만나 인생을 변화시키고 싶은 여자는, 그것이 분명 구속된 삶이긴 하지만 돈에 대한 욕구로 인해 그 자유를 스스로 포기한다. 이것을 주변에서 보면 그 여자의 삶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도 일종의 삶을 사는 방법론 중 하나이니 그리 심하게 비난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런 식으로 삶을 살아갈 때, 그 자신은 관계 속에서 거의 어떤 의미나 가치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가진 돈을 이용해 과도한 소비나 혹은 자녀에게 과도한 기대를 거는 문제를 야기시키는 경우가 흔하다. 즉 이들은 사실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구속적인 삶을 원하는 유형 중에서 가장 좋지 않는 경우는 바로,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로 인해서 부모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났지만, 사실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남편으로써, 아내로써 매우 권위적이고 고집이 세며, 자신이 하고픈 데로만 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성격을 가진 존재를 선택하는 경우가 된다.
 
이것은 생각보다 흔히 나타나는데, 여자들이 어린 시절에 그토록 싫어했던 아버지의 성격과 닮은 남자를 선택하거나, 남자들 역시도 엄마와 같은 성격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결국 어린 시절에 겪은 구속에 대한 악영향이 성인이 되어서도 치유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에게 확실하고 제대로 된 치료법이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스스로 이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혹은 이 모든 상처를 이해하고 그 존재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어린 시절에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한 자존감을 채워줄 수 있는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행운은 쉽게 오지 않는다.
 
이런 경우들 말고 아마 사람들이 가장 구속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바로 연인이나 기타 깊은 관계를 맺은 지인들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구속과 친밀함의 경계지점에 대한 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이것을 모두 다르게 정의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연인이라면 밤에 자기 전에 잘 자라고 꼭 문자를 남겨야 한다고 믿고, 모든 기념일은 꼭 챙겨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행동은 별로 필요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은 늘 표현해야 한다고 믿고, 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사랑은 마음 속 깊이 숨겨져 있다고 믿으면서 표현하는 사랑을 거짓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들에 대한 모든 개인의 입장은 다른데, 바로 가치관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경험이 다르고,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은 없고 서로가 상식이라고 우기는 것만이 존재한다. 그리고 보통은 아쉬운 쪽에서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구속을 원하는 사람은 자신이 구속을 받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상대가 자신에게 어떤 집착 같은 것을 하길 바라는데, 사실 이 부분에서 두 사람 간의 관계에 틈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은 마치 개가 사람에게 끝없이 달려들어서 자신을 어루만져주길 바라는 모습과 같다. 사람은 보통 그 모습을 보면서 개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지만, 가끔 이것이 심하다 싶으면, 개에게 싫증이 나기도 한다.
 
만약에 구속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있고, 사회적으로 법률적으로 정해진 규약이 있다면, 이것을 구별하고, 판단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서 해결해 낼 수 있지만, 구속은 다른 수 많은 인간 사회의 그것들과 같이 구속이란 단어를 적용시켜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늘 다툼이 일어나고 갈등이 만들어지게 된다.
 
아무튼 스스로가 구속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결국엔 상처를 받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이것을 해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왜 자신이 구속 받길 원하는 지에 대한 진정한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구속 받길 원하는 진정한 이유는 바로, 그것밖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기에 다른 것이 필요 없고, 또한 다른 것이 필요 없을 만큼 그것이 소중한 가치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고, 그 집착이 바로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하루 종일 연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도 하지만, 그 사람과 보내는 시간 이외에 자신이 혼자서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 없어서 그렇다. 이것은 꽤나 치명적이지만, 사실 본인은 그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인정하더라도 다른 행복거리를 찾는 것 역시도 그리 쉽지 않다.
 
더해서 구속 당하길 원하는 두 번째 이유를 하나 더 붙이자면,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책임을 지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정을 못하는 결정 장애도 연결되는데, 자신의 삶에 대한 주도권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는 말 그대로 순종적인 삶을 살겠다는 태도이다. 즉, 이 태도는 삶에 대한 소극적 태도, 다른 말로 하면 두려움으로 인해서 나타난다.
 
자신의 선택이 잘못되었을 때, 자신이 겪어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 큰 부담감을 안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삶을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이것을 순종이란 단어를 적용하고는 이것 역시도 하나의 삶을 사는 방식으로 여긴다.
 
사실 순종은 말은 그럴 듯 해 보이지만, 이 말이 가진 의미는 원래 책임지지 않겠다는, 자신의 삶을 남에게 맡기겠다는 생각일 뿐이다. 물론 두 사람의 의사 결정을 할 때는 의견 절충이란 과정이 필요하기에 갈등도 일어나겠지만, 순종은 오직 상대의 결정에 따르겠다는, 어쩌면 따르길 바라는 이들이 만들어 낸 개념인 것이다.


이 땅에도 수 많은 남자들이 순종적인 여자를 원하는데, 사실 이것은 개 목걸이를 걸어도 불평대지 않을 여자를 고르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격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있기 때문에 순종은 마치 미덕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이런 순종적인 성격은 사실 거의 고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평생을 그렇게 남의 선택에 기대어서 살았기 때문에 어느 날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한다면, 평생을 교도소에서 살다가 노인이 되어서 풀려난 어떤 죄수처럼 견딜 수 없게 된다. 또한 목줄이 풀려서 가고 싶은 데로 가라고 말하는 주인의 다리 곁에서 떠날 줄 모르는 개와 같은 입장이다.
 
이것을 스스로 알기는 하지만, 고칠 방법이 없다. 이것을 바꾸려면 책임지는 자세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거대한 용기가 필요하거나 정말로 소중한 것이 생겨야 한다. 그나마 소중한 것이 생기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이를 낳아서 그것을 얻는다.
 
결국 구속은 삶을 살아가는 두려움과 행복하지 못함을 증명하는 태도이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행복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구속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두려워하고 더해서 행복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러니 어떻게 구속을 원하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물론 적당한 구속은 삶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충성심이나 혹은 의리와 같은 단어로 표현할 수도 있다. 요즘 시대엔 이것이 너무 없어서 탈이기도 할만큼 요즘은 구속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도 심한 알러지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우리 인간은 모두 그 자신을 위해 산다. 그 누구도 남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그리고 구속은 분명히 관계 속에서 나타난다. 즉, 스스로 살아갈 때는 아예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혼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서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야 상대가 기댈 때, 혹은 기대고 싶을 때 버텨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이미 흔들리고 있는데, 어떻게 상대의 기댐을 받아줄 것이며, 자신이 온전히 체중을 다 실어서 기대버리면서 상대가 버텨주길 바라는가.
 
그 자신 하나만도 책임지기가 힘든 세상이다. 사실 그리고 다른 이를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원래 말이 안 된다. 우리가 맺는 모든 관계는 이득을 기반으로 한다. 단지 그 이득이 행복등으로 환산되는 경우를 우리는 좋은 관계로 인정할 뿐이다. 가족이 그렇고, 친구가 그렇다. 그리고 관계는 균형이 맞아야 한다. 또한 균형을 위해서는 서로가 정해진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그 자리는 바로 자존감에서 만들어 진다. 구속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 부족인 셈이다. 그래서 아무리 관계에서 구속 받지 않으려고 애써도 결국엔 스스로 비참함만을 느낄 뿐이다.
 
결국 이것의 해결책은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어렵지만, 이것 이외에 다른 모든 방법은 결국엔 실패하게 된다. 하지만 성공하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 지금 오늘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구속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결국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아주 작은 불씨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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