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미안함에 대해서

아이루다 2014. 12. 19. 07:34

 
살다가 보면, 가끔 자신의 실수나 혹은 의도치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그 원인이 주로 자신에게 있다고 판단될 때, 그것으로 인해 어떤 육체적이든 심리적이든 어떤 손해를 입은 타인들에게 마음 속 깊이 미안함을 느끼게 될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미안함을 느끼는 정도는 미안함을 느끼는 당사자의 성격과 또한 상대방의 태도로 인해 좀 많은 편차를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양심이나 상식 그리고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성격이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일한 상황일 때, 다른 사람들보다 미안함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느끼는 사람은, 보통 타인에 대한 배려나 같이 사는 세상에 대해 좀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상대적으로 더 적게 느끼는 사람은 세상을 좀 더 자기 중심적으로 두고 산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함께 미안함을 느낀 당사자가 그 상황에 대해서 심하게 화를 내거나 짜증 혹은 손해배상을 청구하게 되면 미안한 마음이 덜해지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그 태도로 인해서 받는 스트레스로 인해서 미안함이 줄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안함을 느끼는 정도는 서로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미안한 상황인데, 상대가 덜 미안한 듯 행동하면 피해를 입은 상대는 좀 더 화를 내게 되고, 반대로 상대가 많이 미안해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화를 내면, 미안하다고 말하는 상대는 말은 그렇게 계속 하지만 속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많이 사라지고 결국엔 태도나 말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미안함은 그다지 유쾌한 감정은 아니다. 일단 먼저 자신의 어리석음이나 부족함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며, 그로 인해서 자책감도 들고 후회도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우리는 미안함의 감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곧잘 미안함을 느낀다. 왜 그럴까?
 
원래 어떤 상대에게 미안한 감정은 두 가지 주요한 심리적 상태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그 미안함을 불러 일으킨 자신의 실수나 혹은 의도치 않았지만 아무튼 그 상황이 벌어진 것에 대한 후회나 자책감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에 대한 순수한 미안함이다.
 
그것은 그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서 상대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떤 손해나 상처를 입었기 때문에 역지사지로 생각했을 때, 자신도 얼마나 짜증이 날 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니, 그것에 대해서 미안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뜨거운 물 컵을 들고 가다가 실수로 다른 이의 옷에 쏟았을 때, 일단 처음에 드는 생각은 그런 실수를 저지른 자신의 덤벙거림이나 혹은 부주의함에 대해서 스스로 짜증이 나고, 두 번째로 이 실수로 인해서 옷이 젖거나 심하면 화상까지 입게 되는 상대의 짜증난 마음에 대한 예측이 이루어지면서 무척 미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국 상대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다.
 
그래서 미안함은 자신의 자책감을 빼고 나면 어떤 면에서 순수하게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보통 사람들은 상대에게 나름대로 순수하게 미안함을 느낀다. 즉, 정말로 상대에게 미안함을 느낄 때, 그 마음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그 상대를 위한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이 말을 다시 말하면 비록 실수를 저질러서 미안함을 느꼈지만, 그 미안함을 느낄 땐 이기적인 것이 아닌, 이타적인 감정이란 뜻이다. 즉, 미안함은 언뜻 생각하기에 인간의 이타적인 성향을 표현하는 감정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과 같이 미안함은 정말로 다른 사람을 위한 감정일까? 또 다른 말로 하면 미안함이 진정하 의미에서 이타적인 것일까? 좀 더 확장하면 인간이 조금이라도 이타적일 수 있는 것은 사실일까?
 
지금부터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로 하자.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장난을 가끔 친다. 그것은 바로 상대가 나 자신에게 어떤 상황으로 인해 사과를 해야 할 경우가 생겨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때 '정말 미안하면 돈을 줘. 한, 만원 정도 주면 용서해주께' 라고 말한다.
 
보통 나의 이 말을 처음 듣는 사람은 당황하는 표정을 짓곤 하는데, 아마도 내가 진심으로 달라고 하는지, 아니면 농담으로 하는지를 헷갈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물론 나 역시도 이런 농담은 정말로 친한 사람들에게만 하고 만다. 뭐 지금은 주변 사람들이 나의 이런 농담을 다 알고 있어서 얘기해도 무시하고 말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 진짜로 돈을 주는 사람도 있긴 하다. 정말로 미안하다고 느껴서 그러는 것 같다. 나 역시도 그 돈을 마다하지 않고 받는다.
 
원칙적으로 정말로 미안하다면 돈을 주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했다간 어떤 오해를 받게 될지 모른다. 아마도 나를 돈만 아는 인간으로 낙인 찍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정말로 이것이 잘못된 요구일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잘못된 요구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미 미안하다고 했는데, 정확 치도 않은 손해보상을 요구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손해보상을 실제로 하면 안될까? 정말로 미안한데 말이다.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태도가 바로 우리가 가진 미안함의 실체를 드러내어 준다.
 
우리의 미안함에 대한 순수한 해석과는 달리 실제로 미안함의 근원적 본질은 자기 손해에 대한 두려움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에서 살아 본 것은 아니지만, 들어 본 이야기에 의하면 그들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I am sorry' 라는 말을 가능하면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을 하는 순간 스스로 잘못 했다고 고백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상황은 아마도 모르는 두 사람이 시시비비를 확실하게 가리기 힘든 상황에서 그러는 것 같다. 그것은 차를 운전하다가 서로 접촉 사고를 낸 경우나, 서로 딴 곳을 보고 걷다가 충돌하거나 하는 상황일 것이다. 즉, 명백히 어떤 물리적 손해를 입어서 잘못하면 법정에 가서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처지에 놓일 수 있는 상황에 자신이 스스로 미안하다는 말을 통해 잘못을 시인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뜻인 것이다.
 
하지만 동일한 상황에 우리나라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곧잘 한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경우엔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을 시인하는 말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것인 누구의 잘못이든 간에 서로가 어떤 손해를 입게 되었으니 그것을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잘못을 한 사람도 손해를 입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엔 매우 큰 차이점이 하나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미국이란 나라의 문화와 우리나라의 문화이다.
 
미국은 개인주의 사회이다. 이것을 이기주의로 잘못 해석하는 사람이 많은데, 개인주의는 모든 판단의 범위가 개인과 가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를 말한다. 그래서 어떤 실수로 인해서 어떤 사람에게 손해를 입혔을 땐, 거의 그것에 대해 보상을 해야 하는 사회이다. 그래서 친한 친구라도 그 사람의 물건을 실수로 부수거나 고장 냈을 때, 그것에 대해 보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내 것, 내 물건이란 개념이 무척 강한 것이다.
 
반대로 우리나라는 개인보다는 전체 개념이 훨씬 강한 사회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라는 말보다 '우리' 라는 말을 매우 많이 쓴다. 그래서 내가 쓴 글도 보면 '우리' 라는 말이 '나' 라는 말보다 훨씬 자주 노출되고 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 가족', '우리 누나, 엄마' 같은 특이한 말도 쓴다.
 
그리고 우리는 개인이 어떤 실수를 하고 그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고 사죄를 할 때, 전체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용서해주는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느낀다. 가족 사이에, 친구 사이에, 아는 사이에, 동향인데, 선후배 사이에, 같은 동포인데 하면서 말이다. 어떤 큰 잘못을 저질렀던 간에 상대가 진심으로 사죄를 할 때 그것을 받아 주지 않는 것은 그리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명 관용의 정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것을 금전적으로 제대로 보상하기 보다는 이단 미안하다는 말로 넘기려고 하는 심리가 강하다. 자신의 실수로 상대의 차를 망가뜨렸을 때, 그 정도가 심하지 않다면 일단 머리를 조아려서 미안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상황을 모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 그 사람은 손해를 입은 당사자에게 '정말로' 미안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이 미안함은 손해에 대해 보상을 안 할 때까지만 유지가 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보통은 상대가 제대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면, 뭐 이리 팍팍하게 사느냐 라든가 사람이 인정이 없다 라든가 라는 말을 생각하거나 말하면서 더 이상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친구나 지인간의 관계일 때는 제대로 보상을 받는 경우보다는 그것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무마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특히나 이런 문화에 매우 익숙하다. 그래서 친구네 집에 갔다가 자신의 아이가 그 집 아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을 부숴먹어도 그냥 '미안하다, 어떻게 하냐' 라고 물으면 상대는 '괜찮아 뭐, 애들이 다 그렇지 뭐' 라고 대답을 해준다.
 
이것이 만약 '저게 얼마인데!' 라고 짜증을 내면서 '얼마를 보상해 줘야겠어' 라는 식으로 나오면 잘못을 자신이 했으면서도 서운함을 느껴 결국엔 서서히 인간관계가 단절되게 된다. 그리고 이때 꼭 이런 생각을 한다. 반대의 입장이라면 자신은 그냥 넘어가줬을 텐데 라고 말이다.

 

물론 이것은 훗날 자신의 실수나 지인의 실수에 대해서 일종의 저축을 해두는 것은 맞다. 오늘 친구의 실수를 넘어가주면, 나중에 자신의 실수를 친구가 용서해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넘어간다고 해서 실제로 이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들이 바로 우리가 미안함을 표현할 때 진심이 담기는 이유가 된다. 우리는 진심이 담긴 미안함을 말할 때,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의 실수로 인해서 상대가 손해를 입었을 때 그것에 대한 보상을 하지 안 해도 되는 가능성을 만들게 된다.
 
또한 더불어서 이런 명백한 손해를 보상해야 하는 경우가 아닌, 약속 시간에 늦었거나 하는 등의 잘못에 대해서도 상대에게 자신의 평판을 떨어지지 않게끔 미리 노력을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약속 시간에 늦은 사람은 입에 '미안해, 미안해. 차가 막혔어' 라는 말을 오면서부터 한다. 물론 숨을 헐떡이면서 반쯤 뛰어오는 행동도 한다. 하지만 이 때 상대가 '괜찮아' 라는 식으로 이것을 받아주지 않고 늦은 것에 대해 따지기 시작하면, 점점 미안하다는 태도는 사라지고 결국엔 그 자신도 같이 화를 내고 만다.
 
아마도 이런 모습이 연인들이 약속 시간 때문에 싸우는 상황의 90%이상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고 해서 미안함에 대한 심리가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설령 손해에 대해 물리적으로 명백히 보상하고도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경우라도, 자신의 양심에 대한 자책을 덜기 위한 욕구가 숨겨져 있다. 즉, 인간은 누구나 미안함을 표시하고 그것을 용서 받음으로써 자신을 덜 가책하게 되는 것이다. 이 역시도 어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한 욕구 중 일종이다. 즉, 좀 덜 불행하려는 욕구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린 자신이 어떤 실수를 해서 상대에게 미안하다고 말할 때, 그 감정을 꽤나 순수한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상대가 이렇게나 순수한 마음을 너그럽게 용서해주지 않는 것을 서운하게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바램과는 달리 우리가 미안함을 느끼고 상대에게 사과하는 과정엔 그 당사자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손익에 대한 미묘한 계산이 깔려 있다. 그래서 마음 속에서는 순수하다고 느껴지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바라는 것은 바로 손해를 무마시켜서 금전적인 손해를 줄이거나 혹은 양심의 가책을 줄이려는 목적이 자신도 모르게 숨겨져 있다.
 
그래서 결국 이 목적이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 즉 우리가 확실하게 보상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을 땐 보통 더 이상 미안함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이미 돈으로 그것을 보상해줘야 하게 되었는데 상대에게 자신을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자신을 낮추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때는 자신의 손해가 명백해졌기 때문에 미안함보다는 그런 실수를 한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이 훨씬 크게 들고 기분도 상해서 더 이상 미안하다고 할 마음의 여유조차도 없어지게 된다.
 
물론 이런 경우도 상황에 따라서는 미안하다는 표현을 계속 해야 한다. 그래야 혹시나 상대가 마음을 바꿔서 손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이 때 상대가 자신의 예상보다 좀 더 과한 보상을 원한다면 이젠 미안한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 상대의 어처구니 없음에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럴 땐 이미 알고 있던 관계도 끊어져버리고 서로 평생 얼굴을 안보는 사이가 되기 십상이다. 또한 서로 주장하는 것이 달라서 경찰서나 법정에 가서 서로 추가적인 손해를 보게 되는 경우도 많다.
 
물론 모든 보상을 치르고도 미안함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의 소중한 사람을 차 사고와 같은 실수로 죽였거나 해서 감옥에 갔더라도, 그것을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기에 자신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을 때는, 우리는 미안함에 대한 감정이 멈추질 못한다. 그런데 여기엔 미안함에 존재하는 두 가지 심리 중 바로 첫 번째인 후회라는 감정이 숨겨져 있다.
 
즉, 비록 타인이 그것을 용서를 했더라도 그 자신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을 평생 동안 용서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상대를 위한 이타적인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끝없는 자책감인 것이다. 자신의 양심을 도저히 어길 수 없어서 당하는 고통인 셈이다. 그리고 거기엔 자신의 삶을 망친 후회, 자책, 절망감이 가득 차 있다.
 

결국 미안함을 표현하는 것에는 미안함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목적을 달성시켜 준다. 일단 첫 번째는 당연히 이것으로 인해 생겨날 수 있는 손해에 대한 가능성을 낮추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미안한 행동으로 인해 낮아질 수 있는 자신에 대한 평판, 즉 사람들의 평가 점수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사자의 마음 속에 작동하고 있는 양심의 가책을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실제로 양심의 동작 원리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양심을 매우 좋은 것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양심은 자신에게 닥칠 불행에 대해서 대비하게 만드는 우리 마음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대비책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에 반대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미안함이 순수하게 타인을 위한 마음이라고 믿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이런 생각을 해보면 된다.
 
이 미안함보다 훨씬 진실적이고, 이타적이고, 고귀한 것으로 알려진 '사랑' 은 과연 우리가 믿는 것 만큼 이타적인지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할 마음까지도 의미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우리가 왜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소중하다는 말은, 그 사람 자체가 소중한 것이 아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소중한 것이다.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그 상대가 죽거나 떠나는 고통보다 자신의 희생이 덜 불행하기 때문에 선택을 한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아이로 인해 자신이 행복하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한다. 그래서 남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에 비해 훨씬 덜 소중하다. 그리고 어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행복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아이로 인해 불행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이들은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의 아이로는 행복하지 못하다. 그래서 남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리는 개나 고양이나 토끼를 키우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개나 고양이나 토끼를 남의 아이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모든 종류의 사랑엔 자신의 행복이 기준이 된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든 연인의 사랑이든 심지어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든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랑은 100% 자신을 위한 감정이다. 말 그대로 진정한 이기주의인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가치가 모자란 미안함이란 감정이 어떻게 타인을 위한 감정이 될 수 있겠나.
 
미안함은 언뜻 보기엔 상대를 위한 감정처럼 착각 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잘 생각해보면 그 감정은 여러 가지 상황을 돌고 또 돌아서 결국엔 자신이 당할 불행을 최소화 시키려는 목적이 된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불행을 최소화 시키는 것 역시도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동일한 본질이다.
 
우리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에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목적을 벗어나는 것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못한다. 이것이 우리 인간이 가진 절대적 한계점이다. 또한 미안함을 포함한 어떤 감정이 정말로 순수한 의도로 우리가 믿는 것만큼 본질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모든 인간은 어떤 형태의 삶을 살든 간에 똑같이 그것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말 그대로 본질적 가치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것에는 오직 행복에 대한 욕구만이 유일하다.
 
그나마 인간이 정말로 진정한 의미의 후회를 하고 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 있긴 하다. 그것은 바로 더 이상 행복을 추구할 필요가 없는 순간인데, 바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 그렇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시기는 어떤 면에서 인간이 모든 감정에서 가장 순수한 시간이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어떤 사람들은 이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사과와 용서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이 정말로 착해지는 유일한 순간은 바로 죽기 직전이 된다. 혹은 죽음을 선고 받고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인 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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