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도덕의 절대성

아이루다 2015. 3. 7. 10:06

 
미래의 어느 날, 인간의 유전자에 대한 비밀이 모두 밝혀졌을 때, 만약 인간의 행동 모두가 이 유전자적 특성에 의해서 발현되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물론 이것은 확정된 사실이 아닌, 단순한 미래에 대한 가정이지만 말이다.
 
이 질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예를 들어서 어느 특정한 유전자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도둑질을 할 가능성이 높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심한 경우엔 강도,살인 등의 범죄까지 저지를 수 있다는 것으로 밝혀지거나 혹은 다른 이들을 잘 돕는 것 자체도 타고난 유전자적 특성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들의 범죄를 처벌하거나 선행을 칭찬할 수 있을까?
 
물론 선행은 그것이 유전자적인 특징이든 후천적으로 얻어진 것이든 상관없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딱히 따질 필요가 없다. 하지만 악행으로 분류된 범죄 등은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한다. 타고난 성향이 도둑놈인데, 도둑질을 했다고 해서 처벌할 수 있을까? 이것은 마치 다리 근력을 타고난 사람이 점프를 잘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말이다.
 
사실 이런 범죄에 관련된 질문은 아주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긴 하다. 그것은 그것이 유전적으로 타고났든, 아니면 후천적으로 발달되었든지 상관없이, 범죄를 저지르면 그 죄값을 치르게 하면 된다. 즉, 도둑질을 하면 감옥에 가면 아주 단순하고 쉽게 해결이 된다.
 
하지만 범죄는 아니지만 갈등이 생길 수 있는 행동들에 대해서는 애매해진다. 쉬운 예로, 길을 걷다가 상대와 어깨가 부딪힌 경우, 그것으로 인해 잠시 시비가 붙을 수가 있다. 그리고 그때 부딪힌 사람은 서로 상대의 부주의를 비난하게 될 것이고 보통은 잠시 실랑이를 하다가 서로를 노려보면서 갈 길을 가게 될 것이다. 물론 아주 상황이 좋지 않게 흘러가면, 그것을 인해 큰 싸움이 나고 심한 경우 살인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은 그냥 잠시 갈등을 겪은 후 마무리 된다. 그런데 이때 잠시라도 우리가 어떤 상대와 다툼을 벌일 때,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을까? 다시 말하면, 원래 다른 사람과 어깨를 잘 부딪히는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과연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어깨가 유달리 넓거나, 사람과 피하는데 있어서 느린 반사 신경을 가지고 있어서, 원래 잘 부딪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우리는 설령 그런 상황이라고 해도, 그것을 유전적 특징으로 인한 결과로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좀 더 비난이 가능한 이유를 찾으려 할 것이다. 적어도 어깨가 넓거나 운동신경이 둔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여기에는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일단은 상대가 시선을 앞에 두지 않고 걷고 있었다면, 그것을 근거로 할 것이다. 걸을 때는 앞을 주시해야 한다고 말이다. 특히 상대가 스마트 폰이라도 보고 있었다면 더욱 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또는 우측 통행 여부를 가지고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행자는 예전엔 좌측 통행이었으나, 몇 년 전 우측 통행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상대가 우측 통행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사실 길을 걷다고 보면, 우측 통행을 지키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시비가 붙으면 중요해진다.
 
이것들 말고도 상황에 따라서 다른 이유들이 있을 것이다. 옆 사람과 정신 없이 대화를 하다가 앞을 주시하지 못했거나, 짐을 들고 있어서 앞을 못 봤거나, 장난을 심하게 치면서 앞을 보지 않고 달리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어떤 이유든 상관없이, 우리가 시비가 붙었을 때 그 모든 이유는 서로를 비난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공통적이다. 그런데 이 비난의 근거들은 과연 무엇으로부터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밑을 보면서 걷거나, 우측 통행을 하지 않거나 하는 등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평상시의 삶 속에서, 크든 작든 이런 형태의 갈등들을 경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법적인 처벌까지 가는 경우는 거의 드물고, 거의 대부분은 말싸움 정도에서 머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감정이 상해서 싸운 것까지는 대부분 경험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같이 경찰서에 가서 서로 처벌을 해달라고 하는 경우까지는 경험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경우까지 진행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보통 그런 경우까지 가기 위해서는 단순한 갈등을 넘어서 서로 물리적 폭력을 행사 했을 때이다.
 
그런데 설령 경찰서에 갔다고 해도, 최초의 갈등의 원인이 된 사건, 예를 들어서 술을 먹다가 떠들었거나, 처음 본 사람에게 반말을 한 것 등은 직접적인 법적 처벌의 근거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때는 그 후로 일어난 물리적 행동, 즉 얼마나 서로에게 폭력을 썼는지 여부만을 가지고 따진다. 그것이 만약 살인으로 번졌다면, 어떤 중간 문제가 있었다고 해도 단지 정상 참작만 될 뿐, 거의 모든 죄는 살인이란 범주 안에서 다뤄지게 된다.
 
그렇다면 그런 물리적 충돌까지 진행되지 않는 일반 갈등들은 과연 어떻게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까? 앞에 제시한 예처럼 길을 걷다가 서로 부딪힌 상황처럼 다른 모든 갈등들 역시도 어떤 근거들이 있을 것이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그런 근거들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일까? 초면인 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든가, 공공장소에서는 조용해야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 과연 무엇을 근거해서 나오는 말들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답은 정확하게 인간의 도덕 기준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길에서 부딪힌 사고가 일어난 후, 서로 다툼이 일어날 때 바로 공중 도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근거를 통해 상대방을 비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술집에서 너무 떠든다고 시비가 일어날 때 역시도 공중 도덕을 지키지 않았다는 근거로 비난을 한다. 초면에 반말을 해서 시비가 붙었다면, 초면엔 서로 존댓말을 써야 하는 것이 예의라는 근거를 통해 비난을 한다.
 
여기에서 지금 이런 비난의 근거가 잘못되었다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우리가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어떤 식으로든 갈등이 일어나서 다툼이 벌어지면, 이때 가장 중요한 결정 기준점이 바로 도덕적 기준이란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 사회 속에서 죽는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에 소속되어 살 때, 수 많은 도덕적 가치들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된다. 그것은 거리 질서일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간의 예의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취득한 도덕적 기준점을 근거로 해서 수 많은 갈등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처음 언급한 것처럼 그 모든 행위가 모두 유전자적 특징으로 인해서 나타났고, 그것으로 인해 갈등이 벌어졌다면 과연 어떻게 이것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성향으로 인해서 목소리가 커서 술집에 가면 늘 목소리가 크게 얘기를 하는데, 그러다가 시비가 붙었다면, 과연 이때 단지 목소리가 크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비난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을 확장하면 신경질적이라고 해서, 돈만 밝힌다고 해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만 해석한다고 해서, 싸가지 없다고 해서, 짠돌이라고 해서, 자신의 애인을 뺐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비난 할 때, 그 행동들이 모두 유전자적 특징에서 왔다면 과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상대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을까? 이런 행동들은 법적 처벌을 받게 하기도 힘든데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세상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결정론적 세계관이란 말로 표현되곤 한다. 우리가 사는 물리적 공간이 모두 동일한 물리 법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듯, 우리가 정신 세계라고 알려진 것조차도 모두 동일한 어떤 규칙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다면, 즉 유전자적 특징과 같은 것들에 의해서 물리적으로 지배를 받는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의 비 도덕적 행위에 대한 비난을 할 수 있을까?
 
과거에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들 역시도 이런 공통된 문제 앞에 섰어야 했다. 근대 과학이 발달하고 자연의 법칙이 하나 둘 씩 그 본 모습을 드러내는 시기에,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부터 벗어나 이미 모든 것이 결정되었을지도 모르는 결정론적 세계관 앞에 서야만 했다. 우리가 속한 세상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수학적 기호로 표현되는 특정한 법칙에 의해 완전히 종속적이란 것이 밝혀진 시대에 겪어야 했던 심각한 인간에 대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 후로도 인간의 정신 세계의 법칙은 명확히 설명되지 않아서, 그나마 우리의 자유의지는 존재한다고 믿어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단지 가정일 뿐이지만, 우리의 정신세계 자체가 모두 유전자적 특징에 의해서 결정되었고 있다면, 과연 그때에도 우리 인간에게 온전히 자유의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을 과연 어떤 것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까?
 
물론 앞에서 말했듯, 남에게 해를 끼치는 범죄 행위는 단순하게 처벌될 것이다. 자유의지든 아니든 상관없이 도둑질을 하거나 강도, 살인을 하면 그것에 해당되는 법적인 처벌을 하면 된다. 문제는 처벌되지 않는 수 많은 갈등 상황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처벌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을 기준으로 해서 비난하기를 계속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도덕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이미 잘못된 것이다. 이미 결정된 것에 도덕을 적용시킬 수 없다. 오직 스스로 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을 때만 도덕을 적용시킬 수 있다. 사람을 키가 작거나 크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이미 싸가지 없이 태어난 사람을 싸가지 없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사실 지금도 은밀하게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대머리인 사람에 대해 비 호감이고, 몸에서 냄새가 나도 비 호감이다. 우리는 선택 불가능한, 이미 결정된 육체에 대해서도 호감과 비 호감으로 판단을 한다. 이것은 물론 비난은 아니지만, 사실 비난에 가깝다. 단지 그것을 대 놓고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결정론적 세계에서는 이런 문제는 좀 더 신중히 다뤄야 한다. 왜냐하면 이젠 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바로 그 도덕이란 기준점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결정론적 세계이거나 혹은 분명히 자유의지가 있는 세상이냐에 상관없이 도덕은 늘 우리들의 삶의 기준점이 되어 줄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이 결국 모두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로 판명 나는 순간, 우리가 믿고 있는 도덕은 모든 가치를 잃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과연 도덕이란 것이 얼마나 실체가 있는지 의심이 되기 시작한다. 이젠 그래서 도덕을 의심해야 봐야 한다. 과연 도덕은 우리가 믿는 것처럼 절대적 기준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도덕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0년 전 노예를 가지고 있는 것은 비 도덕적 행위가 아니었다. 능력만 되면 얼마든지 노예를 가질 수 있었다. 더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자식을 낳기 위해서 다른 부족에 쳐들어가 여자들을 납치하기도 했다. 과거로 갈수록 우리는 우리가 바라보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동물들과 비슷해진다.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백 년 전 만에 해도 남자가 여러 명의 첩을 얻을 수 있었다. 이렇듯 변화되는 것은 절대적 기준점이 될 수 없다.
 
더해서 이 원리는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히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을 살아간다고 믿고, 그것을 비난하거나 칭찬하는 근거로써 도덕을 이용하지만, 도덕 그 자체가 그것들을 위한 근거가 되기엔 부족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원칙적으로 도덕은 인간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도덕을 만들었다. 도덕은 우리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살 때, 서로 어떻게 하면 좀 더 덜 다투고,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한 수천 년간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지식이다. 그래서 도덕은 가치는 있지만, 절대적 기준점은 될 수 없다. 그리고 단지 인간 사회 내에서만 유효하다.
 
하지만 이렇게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도덕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자신들이 만든 도덕적 기준점을 의심 없이 바라본다. 아주 오래된 철학자들의 생각이나 현재 각 나라에 제정된 법적 근거 역시도 모두 이런 도덕적 기준점에 대한 의심 없는 시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원래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믿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생각을 하는 것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그 생각 자체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가 아니란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철학자는 근본적으로 자유의지를 믿을 수 밖에 없다. 그래야 철학자 자신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그 자유의지의 정당성 여부를 판별할 도덕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그 도덕적 기준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사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철학은 대부분 이런 것들을 다룬 학문이다.
 
각 나라에 제정된 법 역시도 마찬가지다. 법을 제정하고 지키고 수행하는 모든 존재들은 자신이 근거로 하는 법에 대한 절대적 믿음을 가지고 있다. 사형 선고를 내리는 판사가 자신의 판단 근거가 된 법에 대한 회의감을 갖게 된다면, 과연 그 행위가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만약 스스로도 결정하지 못하면서 사회적 요구에 따라 어쩔 수 없이 판결을 내려야 한다면, 사실 그 판사는 외적으로는 정당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내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 되는데 말이다.
 
도덕은 인간의 발명품이기 때문에, 자연세계엔 적용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개와 고양이에게 도덕적 판단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이 똥과 오줌을 가리는 것은 훈련에 의한 것이지 도덕적 판단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도덕적 기준으로 개와 고양이를 혼낸다. 사실 개와 고양이가 혼낸다는 개념이나 이해를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다. 그냥 그들은 육체적 고통이 있느냐 없느냐 만을 구분할 것이다.
 
먼 미래의 어느 날 우리 인간의 유전자 분석이 모두 끝난 후, 우리 인간은 진정한 자유의지를 가졌다고 발표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자유의지를 가졌기에, 우리는 타고난 도덕적인 의무를 가졌다고 정의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믿는 도덕이 절대화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 어떤 면에서, 우리가 믿는 도덕이 절대화 되지 못하기에, 자유의지 역시 없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과연 진정한 자유의지가 있다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해서 그것의 정당성을 판단을 할 수 있을까? 도덕은 계속 변해가는데 말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인간을 도덕적 존재로써 규정하는 것이나, 우리가 우리를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우리를 스스로 제어 가능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라고 믿고 싶어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즉, 마치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이것의 선과 악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 상대적 기준인 도덕에 의도적인 절대성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도덕적 절대성은 우리들 내부에 너무도 깊게 뿌리 박혀서 모든 사고 방식 자체가 인간을 기준으로만 이루어지면서도, 그것의 문제점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믿는 믿음이 광범위하게 인간들에게 퍼져 있다는 뜻이다. 더해서 우리는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자신이 믿는 기준점만을 옳다고 믿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갈등의 상황에 놓이기 되면, 상대도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을 좀처럼 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갈등들의 원인이 된다. 아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냥 쉽게 지나갈 일들이 복잡하고 커지는 이유가 된다. 서로 어깨가 부딪혀도 누가 잘못했고 말고를 따질 필요가 없이 서로 미안하다고 하면 끝날 일이 시비가 붙고 주먹이 오고 가며 결국 살인까지 가는 상황으로 번지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어리석다고 혀를 차겠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살고 있다. 단지 우리 자신이 그것을 인지하지 못할 뿐이다. 길거리에서 어깨가 부딪힌 후 싸우고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근본적으로 도덕 그 자체가 인간을 기준으로 만들어졌기에, 도덕을 통해서 보면 절대로 우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사실 인간에게 이로운 것은 도덕적이며, 해로운 것은 비 도덕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경우라고 해도 우리 스스로 믿는 절대적 선과 악은 될 수 없다. 이미 선과 악 자체가 우리가 가진 도덕적 판단 기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기 때문이다. 악마는 인간을 해롭게 하기에 악마이며, 천사는 인간을 이롭게 하기에 천사일 뿐이다. 이렇게나 인간 기준으로 판단되는 선과 악이 도대체 어떤 절대성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는 미래의 어느 날 엄청난 기술력을 가진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해서 인류를 말살할 경우에 그 행동의 도덕성에 의문을 표시하겠지만, 사실 그 외계인들은 또 다른 그들만의 도덕적 판단을 하고 있음을 이해하기란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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