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의 작동 원리

아이루다 2015. 1. 29. 16:37

 
인간은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판별한 후 거기에 적절한 행동을 함으로써 동작한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동작되기 위해서는 크게 세가지로 구분 가능한 능력이 작동되어야 한다.
 
첫 번째는 바로 내부와 외부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는 다섯 개의 감각 기관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새롭게 받아들인 정보와 이미 기록되어 있는 기존의 다량의 정보를 통합해서 최종 판단을 해 낼 수 있는 뇌이다. 마지막은 바로 그것이 어떤 정보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신호를 주기 위해서 이용하는 감정이다.
 
만약에 첫 번째 능력인 다섯 개의 감각기관이 모두 동작되지 않는 사람은 외부나 내부에서 발생되는 그 어떤 정보도 감지하지 못하기에 심하면 숨이 막히는 줄도 모르고 죽거나, 배가 고픈 줄 몰라서 죽게 된다. 더해서 외부에서 강한 충격이 와서 피를 흘려도 그것을 느낄 방법이 없어서 죽는다.
 
또한 감각기관이 정상적으로 동작하더라도 그것을 판단할 뇌가 없거나,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기존의 정보가 거의 없는 상태라면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다. 기존 정보가 충분히 쌓이지 않아서 정보를 해석하기가 힘든 아이들의 판단력이 부족해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리고 뇌에 큰 문제가 생겨서 아예 이런 작동을 하지 못하는 경우를 뇌사 상태라고 부르며, 실제로는 죽은 상태로 간주한다.
 
뇌사 상태는 인공적으로 모든 기관은 살려 놓지만, 사실 뇌가 전혀 동작되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래서 이것은 식물인간과는 다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감각기관이 동작하고 뇌가 그것을 인지하더라도 감정이 생겨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말 그대로 어떠한 지시가 내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력된 정보를 판단한 뇌는 이제 감정을 조절해서 인간의 다음 행동을 지시한다. 우리는 배고픔이란 고통이 느껴지면 먹을 것을 찾는다. 하지만 이것을 하려면 육체가 힘들다고 꽤나 비명을 질러대기에, 그것을 충분히 압도할 만큼 큰 고통을 준다. 또한 뇌는 이런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도 사용한다. 즉,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고통을 주다가 그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 포만감이라는 행복을 선물로 준다.

 

이 당근은 사실상 현대에 들어서는 의도치 않게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먹을 것이 풍부해진 우리는 고통을 느낄 시간이 그다지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젠 살기 위해서 먹지 않고 먹기 위해 살게 된 것이다. 원래 우리는 배고픈 고통을 느낌으로써 먹을 것을 찾아 먹게 되어 있지만, 요즘처럼 먹을 것이 풍족한 사회에서는 고통이 없어도 당근인 행복함을 느끼기 위해서 먹는다.
 
그래서 사실 우리는 두 가지 감정에 의해 동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채찍으로 작용하는 고통과 같은 공포심이고 다른 하나는 당근으로 작용하는 만족과 같은 행복함이다. 뇌는 정말로 교묘하게 이것을 이용해서 우리를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뇌의 최종 목표는 바로 자신이 소속된 신체의 연속성이다. 즉, 쉬운말로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그래서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우리가 죽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가 만약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 된다면, 우리는 두려움이란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낄 필요가 없다. 또한 그렇기에 행복이라는 만족감 역시 얻지 못하게 된다.
 
사실 뇌가 이렇게 복잡한 형태로 동작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육체의 효율적 활용을 위해서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우린 하루 종일 일을 해야 생존이 유지될 가능성이 높지만, 이렇게 혹사된 육체는 결국 효율성이 떨어져서 결론적으로 좋지 않다. 그래서 우린 적절한 휴식 시간을 가져야 한다. 즉, 적당한 노동과 적당한 휴식이 주어질 때, 우린 가장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결국 이렇게 조정되는 우리의 감정은 죽음을 앞에 둔 극단의 공포로부터 시작해서 섹스나 약물을 통한 극도의 행복까지 부드럽게 이어진다. 이것은 길게 늘어진 스펙트럼 같은 것인데,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중에서 극도의 행복 상태로 가기 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만 경계심이 많은 뇌는 그것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극도의 행복감을 맛보는 육체는 가장 무방비 상태가 되며, 그로 인해서 생존 욕구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뇌는 우리가 행복하길 바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려움에 빠지거나 생존에 큰 문제가 생기길 바라지 않는다.
 
사실 우리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바로 생존을 원하는 뇌와 우리가 인식이라고 부르는 것의 싸움이다. 우리가 인식을 하는 과정을 칭하는 의식은 끝없이 행복하게 해주길 요구하고, 겁이 많은 뇌는 그것을 아주 조금씩만 충족시킨다.
 
그래서 실제로 이미 충분히 먹거리가 있고, 안전한 잠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뇌는 결코 방심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자극시키려고 한다. 즉, 우리가 게을러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그래서 욕망이란 것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욕망은 좀 더 맛난 먹을 것을 먹게끔 하고, 좀 더 좋은 잠자리를 갖게 하길 원한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거의 끝이 없다.
 
하지만 뇌 역시도 한계점이 있다. 우리가 세계 제일 갑부가 되거나, 누구도 부럽지 않는 안전한 집을 갖게 되면 더 이상 우리를 자극할 수단이 없다. 즉, 우리에게 고통을 느끼게 해 줄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이 정도쯤 되면 우리는 본격적으로 당근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또한 모든 사람이 반드시 그 정도까지 되어야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꼭 1등이 아니라도 대충 위쪽에 있으면 충분히 만족한다.
 
그런데 이때 뇌는 아주 교묘한 술책을 낸다. 그것은 바로 권태로움, 즉 지겨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사실 권태로움과 지겨움의 원천은 외부의 자극이 약해서 거의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를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그것을 마치 우리가 남들에 비해서 시간이 낭비되고 삶이 도태되고 있다는 식으로 판단하도록 한다. 그것은 바로 옆에서 변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함으로써 일어난다.
 
또한 원칙상 인간은 절대로 최종 만족상태에 이를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좋은 것을 가져도 결국 육체가 늙어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번 사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바로 건강이다. 즉, 건강은 누구도 어쩔 수 없다. 우린 결국엔 죽기 때문이다.
 
이것이 뇌가 평생 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다. 뇌는 죽기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극한다.


일단 생존 자체가 힘든 상황이 되면, 지속적으로 고통을 주어서 우리가 노동을 하고, 먹을 것을 찾고, 쓰레기를 버리는 등의 귀찮은 일을 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어느 정도 열심히 일해서 이런 것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상황이 되면 이젠 권태와 지루함을 이용해 다시 또 우리가 불안함을 느껴 열심히 운동하도록 만든다.
 
물론 뇌는 자신이 요구한 것을 열심히 해 낸 육체에 충분히 보상을 한다. 배고플 때 먹으면 포만감을, 이미 먹을 것을 충분히 있을 때는 먹는 즐거움을, 운동을 열심히 하면 육체적 만족감을 선물해준다. 적어도 우리의 뇌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매우 공정하다.
 
하지만 이런 뇌의 역할이 고장 날 때가 있다. 오랫동안 오랜 스트레스에 노출되거나 우울함에 빠지면 뇌는 자신이 속한 육체에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고 포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리고 육체를 아예 포기할 때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가 감당하지 못할 고통이 왔을 때이다. 이때 육체는 다량의 환각 물질을 분비함으로써 육체가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배려해준다. 이것을 러너스 하이, 즉 일종의 환각 상태라고 한다.
 

이것은 주로 육체가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느끼거나 혹은 죽음을 앞에 두고 느끼는데, 특히 마라톤과 같은 운동을 하다가 이것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다. 이때 인간이 느끼는 쾌락은 너무도 절대적이어서 이것에 다시 느끼기 위해 아주 무리한 운동을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운이 좋다면(?) 죽기 직전에도 이것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때 너무도 편하고 좋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재수가 좋아 죽음 직전에 다시 살아난 사람은 그것을 마치 천국에 간 경험처럼 인식하곤 한다. 그래서 그 후로 삶 자체가 바뀌는 경우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경험하고 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라도 이런 경험을 한 뇌는 아주 부드러워진다. 왜냐하면 뇌 역시도 죽음을 좀 덜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심리적으로 분석하면 참으로 복잡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느끼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감정은 사실 개별적으로 다루기 시작하면 거의 끝이 없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공포 혹은 고통이다. 우리는 이것이 최대한 느껴지지 않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한다. 마치 이것은 빛과 어둠과 같다. 빛과 어둠은 마치 서로 대비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이다. 어둠은 실재가 아니고, 빛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일 뿐이다.
 
우리의 실재는 고통이다. 그리고 이 고통이 약해지거나 거의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인류가 발달되어 오면서 이것을 좀 더 명시적으로 정의할 수 있게 되면서, 결국 행복이라는 두 번째 감정을 두려움으로부터 분리해 내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래서 우리는 두 개의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슬픔이나 화와 같은 고통을 기반으로 한 감정이고, 다른 하나는 기쁨과 즐거움과 같은 행복을 기반으로 한 감정이다. 이것을 모아서 희로애락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바로 우리 인간은 모두 다 감정을 통해 신호를 받는다는 점이다. 뇌는 우리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뇌는 입이 없다. 물론 우리의 육체엔 입이 있지만, 이것은 외부로 의사 표현을 하기 위해 쓰는 것이며, 정확하게 전달 되지도 않는다. 설령 내부적으로 할 수 있더라도 우리가 각자 자신에게 뭔가를 지시하기 위해 말을 하는 모습은 그리 정상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아무튼 뇌는 감정을 통해 우리 의식에게 다음에 무엇을 할지에 대한 신호를 보낸다. 머리가 떡 져서 답답한 느낌이 들면 머리를 감고, 코가 매캐해서 따가운 고통이 느껴지면 어딘가 불이 난 곳이 없는지를 찾게 한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실, 우리는 이런 우리의 동작을 실시간으로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하고 난 후, 그것을 왜 했냐고 물으면 그것에 대한 그냥 합당한 근거를 대는 상황도 벌어진다. 사실 이런 종류의 사실은 최면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지시를 내리고 그것을 최면이 깬 후 하게 만든 알려진 실험 과정을 통해서도 증명된 적이 있다.
 
또한 뇌의 요구는 시도 때도 없다. 뇌는 현재 자신이 느낀 가장 급한 것을 먼저 하도록 강한 압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회의를 진행할 때조차도 배가 터질 듯 아프면 결국 화장실에 가야 한다. 이럴 땐 아무런 관용이 없다. 전혀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도 끝없이 배고픈 고통을 느끼게 한다. 뇌는 전혀 자비롭지 않다.

 

그나마 뇌가 기다려주는 것은 바로 먹을 것 등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 인간은 먹고 싶다고 해서 먹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래서 먹는 것에 대해서는 그 요구를 바로 달성해주지 않아도 오래 기다려 준다. 심지어 50일 이상 기다리기도 한다. 뭐, 물론 그것에 대한 대비로 체지방을 쌓아둔 것도 사실이지만.

 

하지만 숨쉬는 것과 같은 것은 매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가차없다. 우리는 지구라는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물에만 빠지지 않으면 언제든 숨을 쉴 수 있다. 그래서 숨은 단지 5분 참을 수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가 당할 고통은 정말로 어마어마 하다.

 

또한 피부에 느껴지는 통증도 매우 심각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상처를 의미하고, 상처 입은 육체는 쉽게 포식자의 먹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미 인간을 대적할 적이 모두 사라진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육체는 상처에 대해 무척 심각한 고통을 느끼게 한다.

 

육체가 쉬어야 하는 잠도 역시 이런 종류와 같다. 잠은 먹는 것보다는 쉽게 할 수 있다. 그래서 한 10일까지는 버틸 수 있다.
 

아무튼 우리는 조금 견딜 수는 있지만 결국 뇌가 시키는 데로 해야만 하는 처지이다. 하지만 반전이 일어난다. 극도로 지능을 발달시킨 인간은 드디어 뇌의 요구에 반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스스로를 인식하고 다양한 정보를 이용하게 된 인간은 이젠 이성이란 도구를 손에 넣어서 본격적으로 뇌가 보내는 신호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이성에 의한 감정 조절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슬퍼도 참고, 기뻐도 참고, 웃겨도 참고, 화가 나도 참는다. 하지만 뇌는 놀랍게도 이것을 방관한다. 왜냐하면 뇌 역시도 알고 있다. 인간처럼 무리를 지어서 사는 존재들에게 너무 과도한 감정적 표현은 결국 이득에 손해를 입히게 된다는 점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뇌는 감정 조절을 어느 정도 허용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을 쓰고 감정을 숨기는 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이성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한 아이들은 그냥 감정을 표출한다.
 
사실 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신호를 이성으로 무시하는 인간의 능력이 그리 달가운 것만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무시하면 새로운 상태로 접어드는데, 그것을 스트레스라고 부른다.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해야 할 일을 제때 못하는 것은 큰 스트레스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에 배변 훈련을 받아서 똥을 아무데나 안 싸지만, 원래 똥은 마렵다 싶으면 싸야 한다.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먹고 싶으면 먹고 싸고 싶으면 싸야 스트레스가 안 쌓인다. 하고 싶다는 욕구는 뇌가 우리에게 보내는 강력한 신호이다. 그런데 이것을 무시하게 되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는 것이다.
 
뇌는 사실 자신이 속한 육체가 이성적 존재인지, 지성적 존재인지, 뭔가 이루야 하는 존재인지 관심이 없다. 뇌는 오직 우리의 육체적 연속성만을 원할 뿐이다. 이것을 우리는 잘못 착각하기 때문에 수 많은 인간의 문제가 나타나게 된다.
 
가장 큰 문제는 마치 우리가 본성을 제어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착각을 기반으로 우리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인간 존재에게만 유효한 수 많은 가치들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이성은 이런 가치를 추구하면서 뇌와 협상을 한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가치가 있고 존중 받게 되면 좀 더 생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말이다. 이것은 머리 속에서 일어난 이성이 해낸 계산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무리를 이루고 있을 땐 훨씬 더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은 나름대로 자신감이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이성의 능력을 통해 뇌가 지시하는 것을 자주 거스른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감정이 느껴지는 상태로만 종속되지 않고 이것을 적극적으로 억누르거나 숨기는 것이다. 더해서 감정으로 인해 이성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르칠 가능성이 높아서 결국엔 최대한 감정에 무뎌지려고 하게 된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이성의 힘으로 고통 쪽으로 느껴지는 감정을 어느 정도는 덜 느끼게 되었지만, 이것의 예상치 못한 효과로 인해서 행복 역시도 덜 느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지만 결국 우리는 뇌가 주는 보상을 얻어내야만 최종적으로 행복하기 때문에 아무리 발버둥쳐도 결국엔 뇌의 의지대로 갈 수 밖에 없다. 즉, 이성은 결국엔 감정에 굴복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 많은 이성적 존재들은 평생을 불행함 속에서 살다가 죽게 된다. 감정을 거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고통은 덜 느끼지만, 행복할 수는 없게 된다. 뇌는 행복이란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쥐고 있음으로써 우리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서열화 시킬 수 있다.
 
보통 여자들을 감정적 존재라고 칭하는데, 그러기에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훨씬 행복하게 산다. 그 이유가 바로 뇌가 지시하는 데로 최대한 협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자는 여자들보다 이성적이며 그래서 뇌에 더 반항을 한다. 그래서 명성이나 권력을 위해 힘든 일을 하여 스스로를 힘들게 만드는 일을 한다. 사실 뇌는 이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럴 때 큰 스트레스가 쌓인다.
 
그럼에도 남자들이 이성을 기반으로 해서 감정에 도전하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했을 때 확실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게 집을 짓는 것은 스트레스지만, 다 짓고 그 안에 안전하게 누울 땐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있다. 바로 수고에 비해서 보상이 매우 짜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남자는 힘들게 했지만, 그 만큼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뭔가 보조적인 수단이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역할을 여자가 해준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남자는 힘들게 뭔가를 하고 여자에게 박수를 받음으로써 행복감을 높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참 의도된 것으로 느껴질 만큼 좋은 조합이 된다.
 
하지만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은 아직 철모르는 아이와 같다. 그래서 마치 자신이 자신을 제어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평생을 뭔가를 위해 이성적으로 살다가 결국엔 늙고 병들면 가족을 찾아가게 된다. 이것은 감정이 시키는 데로 따라가는 길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감정에 순응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데나 똥을 쌀 수는 없다. 그래서 이성도 필요하다. 물론 혼자 산다면 그냥 감정대로 살면 된다. 하지만 그럴 경우엔 우리는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 놓이게 되어서 결국 두려움 쪽의 감정을 좀 더 자주 느끼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난다.
 
아무튼 우리 인간은 이런 원리로 동작이 된다. 그런데 이것을 이해하면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이 글을 통해 정보를 얻은 것은 바로 이성인데, 그렇다면 이것을 이해한 이성이 감정에 대해 좀 더 면밀이 알게 되어서 감정을 조금 더 쉽게 다룰 수 있게 될까?
 
아니면 자신의 한계를 좀 더 명확하게 느껴서 결국 감정에 굴복하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아마도 그것은 각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이성이 결정할 문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