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가치와 의미에 대한 집착

아이루다 2015. 1. 23. 09:31

 
인간이란 존재에게 행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대상일 것이다. 사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이 해왔기도 하고, 이것에 대한 이견은 거의 없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리고 과거 글에서 행복에 대해서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 혹은 선택적인 것과 필수적인 것 등등 다양한 분류법으로 그것을 나눠보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분류법은 본능적으로 타고난 행복과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행복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가진 본능적인 행복들은 생존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아주 기초적인 행위들에 대한 만족을 통해 얻는다.. 그래서 우리는 먹는 것, 자는 것, 싸는 것 그리고 약간 예외이긴 하지만 자녀를 갖기 위해서 섹스를 하는 것을 통해 큰 행복을 얻는다.
 
하지만 인간의 발달된 문명은 우리들에게 잉여 시간이란 것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더해서 발달된 두뇌는 단지 본능 수준에서 갇혀 있지 않고, 우리들 자신이 뭔가 더 커다란 세상을 향해 갈 수 있는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해주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본능적인 행복을 제외한 나머지 거의 모든 삶은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찾는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게 된다. 사실 이런 종류의 행복은 지루함이라는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데, 우리는 그 고통을 해소시킬 때, 지루함 자체를 해결하는 것을 통해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성을 찾음으로써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본능적 행복을 느끼는 과정과는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본능적 행복은 그 고통을 주는 원인을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서 배를 부르게 하면 행복해진다. 여기에서 고통은 배고픔이고 행복은 배부름이다. 이렇게 짝이 정확히 잘 맞는다.
 
하지만 지루함으로부터 오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것을 하는 우리들은 단지 지루함을 해결했다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사실 그때마다 뭔가를 의미 있는 것을 했거나 혹은 자신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행복의 원인이 되는 고통과 그것으로부터 얻는 행복의 결과가 서로 맞지 않는다.
 
이 덕분에 우린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상황, 즉 너무 바빠서 먹고 살기만 하는데도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 오래 될 때, 그것으로 인해 바쁜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결국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충분히 만족감을 얻지 못하면 아무리 지루함을 느낄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더라도 결국 지루해지고 만다.
 
사실 이런 지루함은 시간이 많이 남아서 느끼는 지루함보다 훨씬 질적으로 좋지 않다고 봐야 한다. 보통 지루함은 그 지루함을 느끼는 시간에 뭔가 다른 일을 함으로써 이겨낼 수 있지만, 먹고 사는 일 자체가 전체적 삶이 되고 그것이 지루한 상태라면, 그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즉,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거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시간 자체를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의 삶을 비참하게 느끼는 순간이 된다.

 

물론 이 부분을 좀 더 파고 들어서, 왜 지루함이 오는지를 알게되면, 그때는 사실상 지루함으로부터 출발한 고통이 왜 '의미' 나 '가치' 를 느끼는 행위를 함으로써 행복으로 전환되는지에 대해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글은 며칠 전 '지루함' 에 대한 글에 언급했으니, 혹시 관심 있는 분들은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더라도, 평생 동안 개개인의 머리 속에는 언제나 그 자신의 의미와 존재 가치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질 못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정말로 심각한 수준에서 집착이다.
 
이것이 집착으로 표현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것은 우리에게 만족감이란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그것 이상의 상처도 많이 주기 때문이다.
 
친구와 어울리는 시간이 즐거운 것은 바로 그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엔 나의 말에 반응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통해 느끼는 존재감,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동지애도 숨겨져 있다. 하지만 만약 친구 관계가 잘 안될 경우 이런 것들은 느낄 수 없게 되고, 그때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느낀다.
 
개인들이 인간 관계를 잘하고 싶어하거나, 정치가들이 권력을 잡으려고 투쟁하는 것이나, 연예인이 되어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이유는 각각 달라 보이지만 사실상 모두 똑같은 의미와 가치에 대한 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평생 만족감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관계는 변하고, 권력은 언젠가는 내려 놓아야 하고, 인기는 사그라지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유명인을 조금 부러워하는 마음을 다들 가지고 있는데, 그 유명인들이 일반 대중들에게 거의 공짜나 다름없는 호감을 얻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그럴 때 경제적 풍요로움까지 함께 할 수 있으니, 이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막 결혼한 부부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사랑 싸움을 하는 것이나,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의 갈등이나, 형제간의 싸움 역시도 모두 같은 이유로 인해서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뭔가 조금이라도 중요한 사람이 되거나 쥐꼬리만큼이라도 가치를 추구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아무 이득도 없는 지인들의 모임의 회장을 맡거나,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각종 직책을 맡는 것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서로 어떤 직책을 통해 상대를 호칭함으로써 뭔가 서로 의미 있는 존재 혹은 가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자신의 기대만큼 이루어지지 않거나 혹은 잘 이런 것들을 이루지 못할 상황이 반복되게 되면, 이젠 깊은 삶의 회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도대체 왜 사는지, 또한 남들은 자신과 다르게 왜 저렇게 다들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든다.
 
그리고는 이젠 행복에 대해서, 의미에 대해서, 가치에 대해 찾아 나선다. 하지만 사실 이것은 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는 대안을 찾는 셈이다. 그래서 이것은 정해진 답을 원한다. 그리고 그런 것에 대한 답은 매우 달콤하다. 왜냐하면 그런 답들은 바로 질문자들이 원하는 답이기 때문이다.
 
자, 이쯤에서 우리는 왜 의미와 가치에 집착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사실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은 정말로 단순하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는 원래 가치가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를 비하시키거나 비관적으로 보는 시선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그저 우연의 결과이다. 우리는 최초의 시작인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수정되는 순간부터 수십 억 분의 일의 가능성 중에 하나이다. 그리고 임신이 되어 엄마의 뱃속에서 자라 세상에 태어날 때, 부모에게는 엄청난 의미와 가치가 되지만, 사실 부모와 관련된 이들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아무튼 우리는 자라면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존재감이 점점 더 커지는데, 아마도 가장 존재감이 커지는 것은 바로 미국 대통령과 같은 사람이 아닌가 싶다. 말 그대로 영향력이 큰 사람인데, 결국 얼마나 큰 권력과 책임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이것이 결정된다.
 
하지만 아무리 큰 존재감을 가져도 결국 우리의 존재감은 인간 단계의 수준에 머무른다. 이것은 숫자만 많을 뿐, 아파트 부녀회 회장이 가질 수 있는 의미와 가치와 다를 바가 없다. 사실 이런 것들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당신은 나에게 정말로 소중해, 가치 있어' 라고 속삭여주는 것보다도 못한 경우가 많다.
 
수십 억 명의 인간들이 바라보는 것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이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훨씬 더 큰 의미와 가치를 느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숫자는 정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아마도 우리가 좀 더 명확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갖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 우주가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신화에는 반드시 자연과 우주가 한 영웅적인 인간의 탄생을 의미 있게 표현해주는 이야기들이 등장하곤 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서로 부여하는 가치는 단지 시간이 지나 그들이 죽게 되면 결국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를 본질적인 관점으로 보았을 때, 우연히 아무런 의지 없이 태어나서 자라고 죽기 때문에 어떤 절대적 의미나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우린 모두 자신이 어떤 의미가 있거나 가치를 지닌 존재 이길 바란다. 사실 이것만 봐도 우리가 얼마나 그런 것들이 부족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미 가진 것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좋아하는 돈도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는 순간 돈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쓰지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다른 사랑을 꿈꾸지 않는다. 이미 배가 충분히 불렀다면 다른 음식을 먹을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을 의미와 가치에 매달리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그것이 없다는 것을 역으로 증명하는 꼴이 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원래 없었던 것을 갖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의미와 가치가 없는 삶을 인정하기도 힘들고 더해서 그랬다고 해도 그것을 매우 불행한 일이나 슬픈 일로 받아들인다. 누구도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길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고 느끼려고 애를 쓰게 된다.
 
우리가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불행한 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이런 욕구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자신이 반드시 의미 있고 가치가 있어야 한다고 믿게 되었을까? 사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도 한참 써야 하는데, 간단히 소개하자면 바로 세상에 혼자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리와 거의 비슷한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남과 나를 구분할 수 있을까?

 

유명한 다큐멘터리를 보면, 거기에서 출연하는 북극 곰이나 여우, 늑대, 사자, 사슴 등등을 볼 때, 우리는 그 동물의 종이 무엇인지만 기억할 뿐, 거기에 출연한 동물들이 사실상 거의 같은 외모를 가졌다고 느낀다. 사실 인간들 사이에도 그런 경향이 있는데, 서양 사람들은 외모가 비슷한 동양인을 구분하기 힘들다고 하고, 우리도 또한 다른 종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개가 새끼를 낳았을 때, 그 강아지들의 외모는 거의 같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골라서 키우기로 했다가 갑자기 죽게 되면, 똑같이 생긴 다른 형제 강아지를 데려다 키울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체 가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미 원래 키우던 강아지에 충분히 애정을 느꼈다면, 죽은 강아지에 대한 죄책감이나 혹은 슬픔으로 인해서 생긴 건 똑같이 생겼어도 다른 강아지를 키우려고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강아지가 인간에게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 상황이 된다. 우리는 누구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대체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직장의 삶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직장에서 각자의 역할을 언제든 대체 가능하다. 마치 우리는 기계의 부품 같다.
 
하지만 부모들에게 자식은 대체 불가능하다. 개인이 가진 가치 있는 것들도 그렇다. 단지 생명체뿐만이 아니다. 카메라를 오래 쓴 사람은 그 카메라에 가치를 부여하고, 차나 집이나 모든 대상이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가치를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된다.
 
그것들은 대체 불가능하기에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깊은 곳에 숨겨진 생존에 대한 욕구와도 연결이 되어있다. 사실 내가 언제든 다른 존재에 의해서 대체 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두려움이다. 그래서 복제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보통 매우 부정적으로 다뤄진다. 우리는 예상치 못하게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나게 되면, 그것을 반갑게 여기기 보다는, 소름끼치거나 혹은 생존에 대해 본능적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의미와 가치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그것 자체가 그 자신의 유일성을 만들어 주어서, 결국 우리의 삶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일반적인 삶을 살 때,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약간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있지만, 그 의미와 가치를 느끼는 대상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다. 사실 이것만 해도 개인의 행복을 크게 좌지우지 할 수 있다.
 
적어도 많은 인간 관계에 있어서 훨씬 덜 상처 받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 관계 속에서 상처받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안에서 의미를 인정받고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때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우리는 거기에서 큰 상처를 받는 것이다.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는 친구, 자신의 존재를 무슨 발바닥의 때로 여기는 시어머니, 늘 자신을 이용하려는 가족, 아내나 남편인 자신이 아닌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는 배우자, 공들여 키우고 났더니 남자나 여자에게 빠져서 부모는 안중에도 없는 자식, 자신의 가치를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 직장 상사 등등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는 온갖 종류의 상처는 바로 우리의 근거 없는 기대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래서 정말로 중요한 관계가 아닌 경우에는 기대와 가치에 대해 스스로 어느 정도만 포기할 수 있어도,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욕망을 줄일 수만 있어도 우리는 훨씬 더 행복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즐겁게 살 수 있는 것이 참 많다. 그런데 우리는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 많은 것들을 하지 못하고 산다.
 
왜 자신을 불행하게 만드는 의미와 가치에 평생 집착을 하면서 살다가 끝없는 상처를 받고 결국엔 행복하게 하는 것보다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될까? 이것이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문제점이다.
 
그 자신의 존재의 무의미성을 인정하고 나서 자신을 즐겁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을 그냥 즐길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삶이 어디 있을까 싶다. 또한 의미나 가치를 갖고 싶다면, 그것을 절대화 시키지 말고 그냥 혼자서 그것을 부여하면 된다.
 
우리의 또 다른 문제점이 바로 이점인데, 자신이 의미를 가졌거나 가치를 느끼는 것을 늘 다른 이들에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문제이다. 많은 부부가 아이를 낳고 그렇게 많은 사진을 SNS에 올리는 이유가 바로 자신의 가치를 다른 이들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의 가장 흔한 예가 된다.
 
오래된 카메라에 가치를 느꼈다면 그것을 혼자만 간직하고 살면 된다. 좋은 사람과 만나 진정한 사랑을 이뤘다면 그 자체를 서로 간직하고 살면 된다. 왜 자꾸 자신이 만들어낸 가치를 다른 이들에게 공개해서 그것을 최대한 절대적 가치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일까? 물론 이것이 지금까지 말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려는 우리들의 본능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우리가 이런 가치를 남들에게 보여주면서 동의를 얻는 이유는, 물론 당장 결과론적으로만 보면 추가적인 행복을 얻기 위해서지만, 그 안에 숨겨진 심리는 바로 자신의 가치에 대한 스스로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동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는 가치를 다른 이들도 느낀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우린 모두 더 큰 행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스스로 부여하고 자신의 안에서 만들어진 가치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공개한다. 하지만 웃기게도 다른 이들이 추구하고 만든 가치를 자랑할 때, 그것을 좋지 않게 본다. 특히나 자신의 가치와 상충되는 것이라고 하면 싸움이 날 지경이 된다.
 
자신의 가치는 세상 모두가 인정해주길 바라고, 자신의 가치와 반대되는 것은 세상 모두가 반대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끝없이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한다. 자신의 가치가 옳고 다른 이들이 가치가 틀렸다고 말이다.
 
그래서 정의가 만들어지고 옳고 그름이 판단되며 선과 악 그리고 빛과 어둠이 결정된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저 그 당사자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의미와 가치에 대한 추구를 하되, 그것을 그 안에서만 머물게 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자신만의 행복을 찾으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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