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순리와 비겁함의 경계

아이루다 2015. 1. 22. 09:36

 
최근에 본 TV 방송 중에서 서프라이즈란 프로그램이 있다. 조금 신기하고 알려지지 않는 뒷 얘기들이 많이 나와서 개인적으로 흥미를 가지고 보는 방송 중 하나인데, 그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는 것이 함정이다.
 
아무튼 지난 회에서 유명한 밴드 그룹인 비틀즈가 부른 'Let it be' 라는 제목의 노래에 얽힌 사연이 소개되었는데, 실제로 뭐 사연은 별 것이 없다. 비틀즈의 멤버 중 하나인, 폴 매카트니(?)가 힘들 때 잠깐 잠들었다가 꿈 속에서 엄마의 위로를 받고 영감을 받아서 작사,작곡 한 노래라고 한다.
 
원래 영어에 잼병인데다가, 노래도 큰 흥미가 없는 편이어서, 그 노래 제목을 뭐 제대로 해석하지 않았는데, 방송에서는 그것을 '순리' 라고 해석을 해주었다. 뭐 명확하게 순리라고 말한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꿈속에서 나온 엄마는 폴에게 흘러가는 데로 살아야 한다고 조언을 해준다.
 
Let it be는 원래 워낙 유명한 노래라서 호 불호에 상관없이 참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방송 전까지는 전혀 몰랐던 사실인데, 실제로 이런 내용이 노래의 가사로 나온다. 아마도 대충 'Mather Mary said to me let it be' 라는 내용의 가사일 것이다. (대충 적은 것입니다. 의미만 이해하면 될 듯 합니다)
 
순리라는 말은 원래 동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래 물질 문명이 주로 발달한 서양은, 뭔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받아내기 보다는 극복하고 이겨내려는 경향이 강했고, 반면에 동양은 서양과는 다르게 주로 정신 문명이 발달했으며, 그래서 문제가 생겨도 그냥 그것 자체와 어울리거나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쉽게 말해서, 길을 뚫다가 산에 의해서 막히면, 서양은 산을 허물거나 굴을 뚫어서 직선으로 길을 내려는 반면, 동양은 그냥 길게 돌아가거나 산을 오르는 길을 내는 것이다. 실제로 그러 것은 아니지만, 의미상으로 우리 한국이 속한 동양권에서는 이런 삶의 태도를 오랜 전통으로 여겨왔다. 물론 현대에서는 찾아볼 길이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바로 순리가 가진 말의 가장 가까운 해석이 된다.
 
그런데 순리는 잘못 해석하면 전혀 엉뚱한 소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비겁함으로 연결이 된다.
 
인간은 원래 겁이 많은 존재이다. 우리가 그나마 용기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용기가 있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낼 수 있으면, 더해서 죽을 각오로 싸우면 이길 수 있는 희망도 생긴다.
 
그럼에도 우리는 쉽게 용기를 갖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은 주로 죽음을 각오해야 할 부분이 아니라, 실제로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이 더 자주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용기가 없음으로써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집에 숨어 있다가 그들의 지배하 가 되었을 때 최대한 충성을 다하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그것을 반대하고 저항하는 용기를 냈다간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용기가 없을 때 더 잘 살수 있다. 용기는 운이 좋을 때 좋게 작용한다. 물론 적이 우리를 모두 죽일 생각으로 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모든 이는 더 이상 숨지 않고 용기를 낼 것이다. 도망갈 구멍이 없다면 말이다. 그래서 배수진이 가장 큰 힘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어떤 것이 순리가 될 수 있을까? 적이 쳐들어오면 맞서서 싸우는 것이 될까? 아니면 적이 쳐들어오면 숨었다가 나중에 협조하는 것이 될까?
 
여기에서 이제 각자의 해석이 달라진다.
 
맞서서 싸우자고 하는 이들은, 자신의 가족들과 터전을 지키는 것이 순리라고 말할 것이고, 항복하자는 이들은 강한 자들에게는 굴복하는 것이 순리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참 구분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매우 복합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때론 맞서 싸우는 것이, 때론 항복하는 것이 순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해답은 생각보다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어떤 경우라도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맞서 싸울 때도, 지금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적이라서 일단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 항복을 하는 것도 모두 용기가 있어야 한다.
 
두려움이 있는 행동을 하고 나면, 그것은 늘 언제나 마음 속에 남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을 평생 동안 갉아먹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비겁한 행동으로 인해 스스로 자책하는 양심이 소리를 이겨내려고 남은 삶을 끝없이 자기 합리화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젊은 시절의 그 순수한 용기를 잃고 뜻이 꺾인 후, 나이를 먹고는 정말로 고집스럽고 자기 혐오와 합리화로 완전 무장된 노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판단이 과연 순리이냐 혹은 비겁함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바로 그 생각이나 행동을 한 후, 스스로에게 떳떳한지에 대해 생각해보면 된다. 만약 그것이 스스로 당당하다면 그것은 순리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 자책을 느끼고,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비겁함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순리라는 것을 비겁함과 동급으로 사용한다. 흔히 말하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다든지,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라는 등, 평범하게 사는 것이 제일 좋다 라든지 하는 말들은 실제로 매우 뜻 깊은 경구임에도 불구하고 비겁함을 합리화시키는데 사용되곤 한다.
 
사실 말은 하기 쉬우나, 이 순리를 얻기 위해서는 정말로 오랜 시간의 고통과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한다. 마치 보통사람들이 좀 살아보니 순리를 알겠다 라고 하는 말은 하루 노숙자 경험을 해보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다. 아주 짧고 작은 고통 속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을 한 후, 그것이 자신의 경험 안에서의 순리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고는 젊은 나이에 순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들다. 또한 설령 노인이 되었다고 해도 거의 평생 동안 자기성찰을 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순리는 그냥 관심 없음이거나 포기함 정도의 단계로 마무리 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을 마치 자신이 순리를 제대로 이해한 듯 착각한다.
 
우리는 어떤 것에 관심이 없을 때, 그것이 어떻게 되든 전혀 개의치 않는다. 또한 자신이 어떤 노력을 해도 안될 것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미련은 남더라도 포기하고 산다. 그것에 대해 욕망을 갖거나 혹은 노력을 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 것들은 자신을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즉, 순리가 아닌 것이다. 순리는 받아 들어야 한다. 포기하는 것도 아니고 관심을 끊는 것도 아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포기하거나 관심을 끊었다면 언젠가 그것을 할 가능성이 쥐꼬리만큼만 생겨도 금새 되살아나는 불씨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사실 순리의 진리를 제대로 얻은 사람은 거의 없다. 앞에서 소개한 Let it be 역시도 순리라기 보다는 그냥 작은 위로의 말이다. 힘들거나 고통스러울 때 그것에 대해 너무 과도한 집중을 하지 말라는 일종의 현명한 자의 조언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삶은 원래 순리로 살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속한 우주는 늘 엔트로피가 높아지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우주의 순리를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원래 우리의 몸은 늘 더 무질서해지려고 한다. 각 세포는 분리되려고 하고, 각 장기는 고장이 나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받은 에너지를 지속적으로 주입하여 몸이 분리되는 것을 방지하고 더해서 미래의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우리가 생각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도 한다. 이것이 실제로 생명체가 살아 있는 동안 하는 모든 것이다. 우리는 살아 있지만, 실제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는 존재이다. 살기 위해서 노력한 후 살아 있는 존재, 이것이 생명체인 것이다.
 
이것은 참 아이러니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생명체 자체가 사는 것이 순리를 거스르는 것인데 어떻게 인간의 삶이 순리적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실제로 진정한 순리는 바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이루어진다. 하지만 죽음을 받아들임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순리에 접근해 가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우리는 매우 비겁하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외적이 쳐들어오면 그것에 맞서서 싸우지 못함은 스스로 비겁하게 여기고 자신과는 달리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응원이라도 보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이 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을 반대만 하지 말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용기 있어야 할 자리에서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을 '세상은 늘 그러니까 어쩔 수 없지' 라고 말하면서 스스로를 합리화 하고, 자신과는 다르게 용기를 내는 자들에게 뒤에서 '세상을 좀 더 살아봐야 내 말 뜻을 알 거야' 라고 말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비겁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스스로 합리화해서는 안 된다. 그냥 부끄러움은 부끄러운 채로 놔둬야 한다. 그래야 언젠간 한 번이라도 용기를 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부끄러움을 합리화시켜 버리면,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숱하게 비겁함을 경험한다. 아니, 실제로 못 느끼지만 우린 늘 비겁하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눈을 감고 살기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겁함을 순리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의젓하게 뭔가 세상을 아는 듯, 깨달은 듯,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고 조언을 하곤 한다. 그렇지만, 순리를 받아들인 사람은 실제로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런 삶 자체도 순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비겁한 것이 순리이다.
 
그리고 이때 비겁함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순리에 어긋나는 짓이다. 우리의 본질을 우리가 스스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자신이 비겁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지만, 인정하고 나면 참 편하다. 이것과 비슷한 것 중 하나가, 자신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믿고 사는 것보다, 그냥 아무 의미 없음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것 역시도 우리를 많이 편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것은 존재적 질문에 대한 가장 듣기 싫은 답이기도 하다. 우리는 비겁하지만 용기 있고 싶어하고, 우리는 의미 없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이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삶을 향해 가는 것이 가장 자신을 위하는 길이며 순리의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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