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우리가 서있게 된 자리

아이루다 2015. 1. 27. 06:56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산다. 각자의 삶은 이 세상에 살았었던, 살고 있는, 살아갈, 수 많은 다른 사람들과도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우리의 지문이 그러하듯 우리 각자의 삶은 그렇게나 모두 다르다.
 
우리는 그 각자의 삶에서 최대한 자신이 행복한 것을 찾으려고 애쓴다. 그렇지만 그 많은 삶의 다양성이 존재하듯이 우리가 각자 추구하는 행복의 결과 역시도 모두 다르다. 누구도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있지 못하며, 누구도 같은 행복을 누리지 못한다.
 
오늘 의사였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행복했던 이는 내일 암에 걸려서 최악의 삶이 되기도 하고, 오늘 거지였던 이는 내일 로또를 맞아 큰 부자가 될 수 있다. 물론 또 다른 내일엔 그들은 다시 변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이렇듯 극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몇 십 년간 같은 삶의 패턴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우리가 굳건히 믿는 것 하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가장 최고라고 믿는 마음이다. 사실 이것은 행복의 중요한 열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이의 남편이나 아내 그리고 부모나 자식보다 자신의 현재 가족을 구성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그리고 감사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감사하는 법을 배워야 행복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갖지 못한 것을 부러워하기 보다는 가진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우리의 가장 못난 모습은 바로 자신이 가진 것보다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만약 그것을 정말로 갖고자 한다면 노력을 해야 하고, 그럴 자신이 없다면 시선을 거둬야 한다. 하늘을 나는 꿈은 꿈으로써만 존재해야지, 그것을 실천에 옮기면 추락해서 죽는다. 혹은 정말로 노력해서 하늘을 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한 자신이 가진 것과 남이 가진 것을 비교하는 짓이다. 이것은 이미 정해진 것일 경우, 바꿀 수도 없기 때문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남편이, 아내가, 아이가 그렇다. 미모, 키, 각종 능력이 그렇다. 이미 타고 났을 때부터 결정되었거나 살아오면서 고정된 것들을 가지고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행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꼴이다.
 
그래서 현재 주어진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보거나, 다른 이와 남을 비교하는 어리석은 짓을 막아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과 나를 비교해서 행복하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만의 행복을 찾지 못한 이들은 그것조차도 해내기가 너무 힘들다.
 
실제로 그 자신을 다른 존재와 비교하지 않고만 살아도 대단한 능력이다. 그래도 그것이 비교하는 삶보다는 훨씬 낫기에 우리는 최대한 흉내를 낸다. 그래서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척을 한다. 그리고는 고상한 태도로 남들의 이해할 수 없는 삶을 가볍게 비난하고 자신과 비슷한 형태의 삶을 사는 이들을 즐겁게 칭찬한다.
 
하지만 이 흉내는 결국 가짜에 불과하다. 가질 수 없기에 갖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실제로 가질 수 없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럼에도 우린 자신을 속인다. 왜냐하면 가질 수 없는 것을 계속 갖고 싶다고 느끼면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현재의 시점에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최고의 위치라고 믿으려고 애쓴다. 더해서 그 자리에 오는 과정이 모두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 자리는 더욱 가치가 있어진다.
 
남들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고도 남편 때문에 결국 전업 주부가 된 주부는 아내로써 엄마로써의 삶이 최고라고 믿고, 남편을 잘 뒷바라지 하고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을 선택한 삶에 충분히 만족해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면서 결혼도 하지 않고 당연히 아이도 키우지 않는 삶을 선택한 후 그것에 만족한다.
 
같은 결혼을 했더라도 아이를 낳은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는 삶이 없었다면 자신의 삶이 얼마나 무의미했을 지를 생각하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고, 아이를 낳지 않는 부모는 해외 여행을 하면서 아이나 키우면서 뒷바라지 하는 삶을 선택하지 않았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하지만 사실은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해외여행도 할 수 있는 부모가 가장 낫다. 단지 이 둘을 다 하기엔 많은 이들이 능력이 부족한 것뿐이다. 돈만 충분히 있다면 유모를 두고 아이의 육아를 전담 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예전에 부잣집 마나님들이 그랬다.
 
우리는 사실 지금 가진 것들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에 있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대기업에 취직한 후 언제 잘릴지 몰라 고민하는 사람은 차라리 공무원이 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돈은 많이 벌지만 밤마다 외로운 여자는 차라리 직장을 포기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 다른 운명을 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자가 되었을지도, 가난할지도, 가정을 이뤘을지도, 혼자 살지도, 젊어서 죽었을지도, 장수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은 현재의 자신이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현실로써 존재하는 자신만을 인식하다.
 
정말로 만약 다중 우주가 있어서 그 각 우주마다 모두 각자의 '나' 존재가 있는데 그 나의 존재가 모두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보는 순간엔 어떤 기분이 들까? 행복한 나, 불행한 나, 결혼한 나, 혼자 사는 나, 일찍 죽는 나, 오래 사는 나 등등 그것은 정말로 다양할 것이고 그래서 현재의 '나'는 결국 단지 그 수많은 모습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면 말이다.
 
현재의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 비해서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갖춘 이들이 자신에게 만족하는 비율이 높다. 또는 그 욕망이 그리 크지 않아서 작은 것에도 충분히 만족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단지 욕망이 작은 것뿐이다.
 
사실 우리는 정말로 별것을 다 부러워한다. 외모, 성격, 경제적 능력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화술, 유머감각, 지식, 똑똑함을 지나 책을 빨리 읽는 능력, 정리를 잘하는 능력 심지어는 몸의 유연성까지도 부러워한다. 만약 어떤 누군가가 다른 이들을 하나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주 독특한 존재가 될 것이다. 사실 그 수준이 되면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도 자신에게 온전히 만족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남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새끼 발가락의 생김새를 보면서 예쁜 발가락을 가진 다른 이들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부러움을 가지는 이유엔 바로 자신에 대한 불만족이 깔려 있다. 돈이 충분한 사람은 다른 이들의 돈을 훨씬 덜 부러워한다. 뛰어난 외모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일이 많을수록 덜 남을 부러워하게 된다. 그래서 행복해진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아서 남을 덜 부러워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건 늘 일정 비율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두 서열화 되어서 순서로 끊기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중간 지점에 있는 이들조차도 밑의 50%를 바라보기 보다는 위의 50%를 바라보게 된다. 그래서 이런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서 만족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 법이다. 그리고 잘되면 훨씬 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더 많은 것을 원하는 이들보다 훨씬 더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부러움을 완전히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그저 숨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끝없이 자신을 세뇌시킨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우연히 서 있게 된 자리가 명당이라고 믿는 마음이다. 이것이 잘될수록 더욱 더 행복해진다. 그렇지만 그 자리가 정말로 자신이 서 있고자 해서 서 있는 자리인지를 알 수가 없다. 사실 자신이 원한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 이는 정말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리고 일정 기간을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우린 언제 바뀔지 모른다.
 
시가 좋아서, 그림이 좋아서, 음악이 좋아서 그 자리에 선 이들은 생계에 문제가 생기서 그 직업을 하지 못할 수 있다. 이것은 운이 좋다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이 온전히 빠진 열정의 대상이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없다면 더 이상 그 길을 가기란 힘들다.
 
이 상황에서 행복하기 위한 방법론을 찾으면 모두들 한결같이 자신에게 만족해라,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그것밖에 방법이 없긴 하다.
 
그래서 우린 흉내 내고 그 자신을 세뇌시킨다. 마치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못한 이들에게 웃으면서 말해준다. 받아들이면 편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본인은 받아들인 것이 아니고 포기한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포기는 늘 불씨처럼 살아있다가 기회만 되면 불타오른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 낸다.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행복을 정의하고, 그 정의된 항목들 하나하나를 채워나가는 것을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이 서 있는 명장 자리를 더욱 신뢰한다.
 
그런데 도대체 왜 우리는 원래 그 자리에 서게 되었을까?  사실 그것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각 가정에서 그리 소중한 아이들 역시도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모든 가정은 모두 다른 외모와 성격을 지닌 다른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었다. 결국 태어난 아이들은 태어날 수 있었던 수 천, 수 만의 아이들 중 하나나 둘만 선택된 것뿐이다. 그렇지만 이미 태어난 아이는 마치 절대적인 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아닌, 그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을 상황만을 생각하면 끔찍해진다.
 
지금 현재 키우는 아이가 무엇보다도 소중한 이유는 바로 그만큼 그 아이를 위해 많은 것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를 키우기 위해, 돈, 시간, 정성, 관심 등등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다. 그래서 결국 가치화 된 아이는 도대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 모든 부모의 자식이 각자 소중해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그렇지만 모든 부모는 우연히 태어나게 된 아이가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아이에게는 자신이 부여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거의 절대적 믿음 수준에 이른다. 그래서 그것이 현실을 받아들였다고까지 믿어질 수 있다. 하지만 부모들은 포기한 것뿐이다. 그들의 자식들이 좀 더 좋은 외모와 좀 더 좋은 머리와 좀 더 좋은 성격을 타고 났다면 그들은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런데 그럴 수 없음이 바로 그 자신으로부터 태어났기에 그것을 바라는 것이 바로 아이의 부모인 그 자신을 부정하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 대한 예 중에서 가장 슬픈 상황이 바로 전쟁터에 던져진 젊은이들이다. 그 젊은이들은 애국와 나라를 위한다는 신념으로 그 자리에서 서로에게 총을 쐈는지 모르지만, 사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속한 땅에 태어났으며 가족과 소중한 이들이 그곳에 살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6.25에 참전했던 병사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한국의 북쪽에 태어났거나 남쪽에 태어났기에 공산주의자가 되고 자본주의자가 되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전쟁이 났을 때 우연히 어느 땅을 밟고 섰느냐에 따라 동료가 되고 적이 되어서 서로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원래 충신은 지배자가 좋아하는 말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전쟁을 해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그때는 자신과 가족 그리고 지켜야 할 이들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나라를 위하거나 지배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배 계급으로부터 끝없이 강요를 받는다.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라는 현명한 이들의 조언은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 만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식을 하지 못하면서 내적으로 일어난 포기라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현재의 상황을 받아들인 듯 생각한다. 하지만 이 포기로부터 발생한 숨겨진 두려움과 분노는 언제나 틈만 나면 그 틈을 뚫고 스멀스멀 흘러 나온다.
 
쉽게 얻은 것들은 그렇게 부작용을 가진다. 원래 진정한 의미의 받아들임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설령 자신이 많이 욕심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서 살기에 다른 이들이 가진 욕망을 많이 버렸다고 자부하는 이들조차도 사실은 그들만의 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게 경작한 밭에 멧돼지가 와서 농작물을 다 먹어 치우면, 그 멧돼지를 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산속에 들어와서 농사를 짓는 이들과 그 농작물을 먹는 멧돼지 중에서 누가 누구의 삶을 침범한 것일까?
 
이것은 생각해봐야 할 주제이지만, 우리의 머리 속에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 순간 늘 멧돼지의 잘못을 탓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만족하는 사람들의 본 모습이 되기도 한다. 뭐 물론 멧돼지인지 인간이지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사실상 대다수이지만 말이다.
 
원래 우리가 사는 모습은 인생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더 행복하기 위해 그때 그때 선택한 것들의 총합이다. 그것은 장기적 안목으로 선택을 했든, 당장 눈 앞의 이득만을 보고 선택했든 상관없이 동일하다. 더 미래를 보는 것은 그저 능력일 뿐이다. 원리상 차이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신이 선택한 것을 가장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자리라고 믿기 시작하면서부터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는 그럼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부작용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선택되지 않는 것들을 가치 없는 것으로 인식하는 일이다. 이것에는 선택한 것이 더욱 가치 있을수록 선택되지 않는 것들이 더욱 더 가치 없는 것이 되어 버리는 원리가 작동하기에 어쩔 수 없다.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어둠은 짙게 되어 있다. 무엇인가가 강해지면 무엇인가 반대의 것도 강해진다. 이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자신의 빛이 강하길 바라면서 어둠이 짙지 않길 바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을 원하는 마음이다. 단순한 원리로 어둠이 짙지 않게 하려면, 빛을 줄여야 한다.
 
그래서 여기가 우리의 한계점이다. 우리는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느낄 때 행복해진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적 한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조금 더 나가본다면, 자신이 그러했듯 다른 이들의 가치 역시도 인정할 수 있는 사고의 한계점을 깰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자기가 서 있는 자리와는 완전히 반대 지점에 서 있다고 해도 말이다.
 
행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치를 부여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의 결과로 인해 파생되는 다른 가치에 대한 부정적 사고는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불가능하지만, 머리 속에 그것에 대한 생각은 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서 있는 자리만이 최고라고 믿게 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어둠이 짙을 때, 그 어둠이 왜 짙은 지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뿜어내는 빛이 강해서 어두워졌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 어둠에 대해서 미안함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밝음에 서 있는 우리 모두는 그 어둠을 만들어 내는데 모두가 한 몫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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