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정의로움을 추구하는 이유

아이루다 2015. 2. 22. 14:53

 
제목은 일단 좀 뻔하다.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라니, 뭔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우리가 정의를 추구하고, 정의로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해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정의가 바로 옳은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는 악이 아닌 선을 의미하고, 그름이 아닌 바름을 의미한다. 정의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존재를 좋아하고, 추종하고, 존경한다. 그러다 보니, 만화나 영화에서는 늘 정의로운 영웅들이 주인공으로 나와, 현실에서는 절대로 하지 못해낼 일들을 해내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것은 그 작품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비록 현실은 그렇지 않을지라도, 만화나 영화 속에서만큼은 비겁한 악은 응징을 받고 용감한 정의는 수 많은 난관을 헤지고 나와서 승리한다. 그것도 악당처럼 비겁한 수단을 쓰지 않고서도 말이다.
 
인식 능력이 아직 덜 발달한 아이들에게 정의로움은 최고의 가치 그 자체이다. 아이들은 영웅에 환호하고 영웅을 따라 하려고 애쓴다. 물론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보다 이런 경향은 훨씬 더 심하다. 보통은 여자 아이들은 남자 아이들에 비해서 정의에 조금 덜 관심을 갖는다. 대신 여자 아이들은 행복에 좀 더 관심을 갖는다.
 
아무튼 이런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성인이 된 우리들은 어린 시절부터 거의 본능처럼 가진, 정의로움에 대한 의심 없는 가치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래서 많은 갈등이 벌어진 상황마다, 도대체 무엇이 더 정의로운지 여부를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낸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우리가 정의로움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정의로운 것은 옳은 것이니, 추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는 왜 우리는 악보다는 선을, 그름보다는 옳음을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일까? 왜 악은 악이라고 개념 지어졌으며, 왜 선은 선이라고 정의된 것일까?
 
뭐, 너무 당연한 질문이라서 이 질문을 받는 분들은 황당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쉽게 끝낼 결론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생각을 좀 더 하다가 보면,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는 매우 혼란스러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전쟁이 나면, 적군이 아닌 우리가 정의롭다고 여긴다. 하지만 상대 나라의 사람도 마찬가지란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 역시도 자신들만의 정의로운 가치를 추구한다. 외계인이 지구를 침략하면, 외계인이 악당이다. 외계인이 우리를 도와주면 그들은 선한 존재가 된다. 우리를 기준으로 악과 선이 정해진다.
 
정의는 원래 이렇게 모호한 개념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정의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적을 앞에 두고, 적이 옳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총구가 흔들릴 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는 보통 자신이 믿는 정의에 대해 그리 혼란스럽지도 않게 여긴다. 그래서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정의를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달리 정의는 원칙적으로 상대적이다. 정의는 어느 편에 섰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다. 그래서 정의는 결국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정의로움을 추구해야 할까? 정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니라면, 왜 정의로움의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에 대한 질문이 아직은 유효하다.
 
사실 이 답은 매우 쉽다. 우리가 정의로움을 추구해야 할 이유는 바로, 웃기지만, 그리고 전혀 상관없어 보이지만, 돈이 덜 들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게 되면 사회 전체적으로 비용이 덜 소요되는 좋은 효과를 내게 된다.
 
예를 들어서 어떤 마을에 단 한 명의 도둑도 없을 땐, 그 동네의 모든 집은 담을 만들 필요나, 문을 잠글 자물쇠가 불필요하다. 당연히 자물쇠가 불필요하니, 그것을 구입할 비용이 덜 든다. 또한 고장 날 자물쇠도 없다. 그런데 그 동네에 도둑이 한 명이라도 생기면, 이젠 모든 사람이 갑자기 자물쇠가 필요해진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 도둑을 잡아야 사람들이 편하게 살 수 있다. 그래서 도둑을 잡을 전담기관인 경찰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실제로 일할 경찰도 필요하다. 이 경찰들은 따른 일은 안하고 도둑 잡는 일만 해야 하므로 공동의 비용을 들여서 월급을 따로 줘야 한다. 경찰이 일을 열심히 해서 도둑을 잡고 나면, 그들을 가둘 감방도 필요하다. 그런데 그 가둔 범죄자도 먹고 살아야 하니, 또다시 공동 식량으로 먹여 살려야 한다.
 
사실 그래서 도둑 하나 때문에 발생하는 비용은 대단하다. 그래서 이것을 좀 더 현명하게 처리하려면, 사람들이 도둑질을 안 해도 될 만큼은 먹여 줘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도둑질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배가 불러도 사람의 탐욕은 끝없이 일어나기에, 우리는 결국 도덕심과 양심에 대해 끝없는 교육을 시도하게 된다. 사실 이것이 현대 사회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덕심이나 정의로움 그리고 개인의 양심을 끝없이 교육시키는 이유가 바로, 사회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그렇다고 해서 도둑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도둑질은 사실 자연계에서도 흔히 있는 사건 중 하나이다. 머리가 조금만 좋은 동물이면, 누구나 도둑질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은 사람들에게 도덕 교육도 시키지만, 도둑을 잡는 해결책도 병행한다. 사실 이것이 훨씬 명백한 해결 방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문에 자물쇠를 달고, 경찰을 임명하여 도둑을 잡게 하면 된다.
 
도둑은 계속 나올 것이지만, 점점 숙련된 경찰은 점점 더 도둑을 잘 잡게 될 것이다. 감방도 더 짓고, 음식은 최소한으로 주면 된다. 그러면 비용을 최소화한 상태에서 유지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보자, 어떤 사람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이 병원의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는 목적보다는, 돈을 많이 버는 것을 목적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 사람은 필요 없는 많은 치료를 받고, 많은 돈을 지불해야만 했다. 사실상 이 의사는 악당이라고 봐도 된다. 이렇게 악당 의사들이 자꾸 나타나게 되면, 환자들은 결코 한 병원에서만 진료를 받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병에 걸리면,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같은 증상을 검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고, 그것은 바로 비용의 더욱 더 소요됨을 의미한다. 거기에다가 실제로 그 중에서 어떤 의사가 가장 제대로 말을 해주는지 알 길도 없다는 추가적인 문제까지 안고 가야 한다.
 
이것은 사실 어떤 면에서 보면 정의로움보다는 신뢰의 문제에 가깝다. 그런데 정의로움과 신뢰는 원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신뢰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믿고, 못 믿고는 그냥 관계 사이의 상태에 불과하다. 그리고 앞의 의사의 예처럼, 그 모든 관계에서 신뢰는 높을수록 좋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정의로움이 기반이 될 때, 신뢰는 더욱 더 쉽게 쌓인다.
 
어떤 한 사회의 신뢰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히 크게 작용한다. 우리는 믿지 못할 때마다 훨씬 더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회사에서 재무를 다루는 사람을 믿지 못하니까 외부에 감사를 따로 둬야 한다. 그렇다면 이 감사는 또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그래서 감사를 감사하는 또 다른 외부 기관이 필요해진다. 이것은 영원히 꼬리를 문다.
 
서로 믿을 수 없다면, 같이 일을 할 때 끝없이 상대의 진위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 설령 자신에게 친절을 베풀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조심하면서 받아들이거나 아예 거절을 해야 한다. 서로 믿을 수 없는 사회는 어떤 면에서 거대한 공포이다.
 
약한 사람들은 밖에 나다닐 수도 없다. 경찰이 아무리 많아 봐야 그 모든 사람을 지켜줄 수는 없다. 또한 심지어 그 경찰도 믿을 수 없다. 그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경찰의 수를 늘리는 일이다. 그런데 그럴수록 그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이 커진다. 공무원의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결코 좋은 일만은 아니다. 또한 믿지 못하기에 어떤 일을 하려면, 각족 증명을 위해서 갖춰야 할 서류가 많아진다. 우리는 끝없이 부족한 신뢰를 메우기 위해 추가적인 노력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런 비용은 개인적으로는 잘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상태에서 끝없이 이것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집안의 전자 키를 관리하고, 창문에 창살을 달고, 자신이 으슥하고 어두운 곳을 지나갈 때 두려움을 느낀다. 또한 아이를 밖에 내보낼 때마다 걱정스럽고, 누구에게 사기를 당할지 몰라서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 조차도 거절한다. 그리고는 그나마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관계를 맺고 살아가려고 한다.
 
단지 개인적인 영역뿐만이 아니다. 우리가 어딘가 회사를 들어가려고 할 때, 그 회사의 인사 시스템이 정당하게 운영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의심을 하거나, 국가 시험을 볼 때, 그 시험 문제가 특정 사람들에게만 유출되고 있다는 점을 의심하게 되면, 그런 곳에 지원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들의 정당성에 의심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한 결과이다.
 
어떤 사회가 정의롭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좀 더 믿을 수 있다는 좋은 상황을 만들어 준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정의롭게 살아야 하며,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된다. 우리의 이웃이 조금 더 정의롭다면, 우리는 그들을 좀 더 믿을 수 있고 집안에 들일 수 있다. 또한 아이들이 밖에서 놀 때, 조금 덜 걱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도, 정의로움은 특정 편에만 유리하게 작동한다. 우리 인간에 대해 정의로운 것은 인간 전체에 대한 이득이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지구에, 이 지구에 살아가는 모든 동식물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우리의 숫자가 늘면 늘수록 바닷물에 사는 물고기의 숫자는 줄어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어릴 때 배웠던 정의로움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다. 자신이 정의롭다고 믿었던 것이라면,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것이 전쟁과 같은 커다란 비용을 발생시키는 일을 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 기꺼이 충돌을 한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도입한 정의가, 반대로 가치화 되고, 절대화 되어서, 비용을 더욱 크게 발생시키는 원리가 된 것이다.
 
그래서 국제 정세 역시도 힘의 논리이니, 자국 이기주의니 하고 비난할 지 모르지만, 사실 모든 나라가 자국의 이득을 추구하는 것은 모두 각자의 정의에 정확히 일치한다. 우리가 그나마 우리가 믿는 정의로운 행동을 할 땐, 여유가 있거나 혹은 미래의 이득을 보장 받을 수 있을 때 한다.
 
그래서 사실 사람들에게 도덕심이나 양심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사실 우리가 정의롭지 못해서 받는 수 많은 부당함과 불편함은 단지 느끼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그것만 알려줘도 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불편함이 너무도 깊게 몸에 익어 있다. 우리는 어떤 물건을 살 때마다 그것을 조금씩 의심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신뢰가 부족한 삶을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실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냥 그런 환경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굳어진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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