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철학의 한계

아이루다 2015. 3. 8. 08:13

 
인간은 크게 두 가지 형태의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일단 첫 번째는 우리가 흔히 하는 생각들로, 보통 단순한 생각이라고 표현되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프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오늘은 누구를 만날까? 등이다. 물론 이것보다 조금 더 복잡할 수 있는 생각들도 있다. 오늘 날씨가 추우니까 옷은 따뜻하게 입어야겠다, 요즘 살이 찐 것 같으니까 점심은 간단히 먹어야겠다 등의 생각은 앞의 예에 비해서 한 단계가 더 들어갔으니, 상대적으로 복잡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사실 이것들 역시도 단순한 생각들의 일부이다.
 
두 번째로 복잡한 생각으로 표현되는 것들인데, 사실 좀 많이 복잡하다. 이 복잡함에 속한 생각들은 주로 철학적 사유를 통해 나타나는 것들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등의 존재론적 질문이 그것의 예가 된다. 그런데 이것이 복잡하다고 표현되는 이유는 질문 자체가 복잡한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에는 너무도 많은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까 에 대한 질문 역시도 사람 수만큼이나 많은 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결국 먹을 수 있는 것을 먹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집에서 먹든, 식당에서 사먹든 종류만 다를 뿐, 답은 단순하다. 먹고 싶은 것을 먹으면 된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이렇게 단순히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단순하게 답을 낼 수는 있다. 신을 믿거나 혹은 그런 생각은 쓸데없다고 여기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질문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은 답이 복잡하다.
 
사실 단순한 생각들은 우리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종류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복잡한 사고라고 해도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생각은 먹고 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미묘한 다른 사람과의 심리적 갈등 역시도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쉽지 않을 뿐, 단순한 질문으로 취급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들 역시도 근본적으로는 먹고 살기 위한 목표, 즉 생명체로써 이득을 취해야 하는 목적에 의해서 발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잡한 생각들은 먹고 사는 것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알기 위해서 평생 노력한다고 해서 어떤 이득이 생길 수 있겠는가? 사실 이런 식으로 삶을 살면, 회의론자가 되어서 괜히 우울한 삶을 살 가능성이 더 높아질 뿐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고 산다. 그리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왜 이들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냥 살아도 될 법한데, 왜 스스로 존재론적 의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회의하고, 고민하게 될까? 그것이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그것에 대한 확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부터 그 과정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이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자신 이외의 다른 존재를 인식할 때이다. 즉, 우리는 나 이외의 나와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스스로에 대한 질문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 질문이 생겨나게 되는 원인은 바로 외모뿐만 아니라, 생각이 다른 존재와의 의견 충돌로 발생한다. 즉, 자신이 믿었던 진리나 정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존재와 갈등이 일어날 때 발생하는 것이다.
 
식사 전에 매번 기도를 하는 집에서 20년간 자란 젊은이가 어느 날 다른 집에 초대가 되어 밥을 먹을 때, 그들이 기도를 하지 않고 먹는 모습을 보고는 매우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모든 음식을 생수로만 해서 먹는 집에서 자란 젊은이가 처음으로 자취를 할 때, 다른 집에서 자란 사람이 수돗물을 그냥 받아서 요리를 하는 것을 보고는 충격을 받을 수 있다.
 
사실 이런 충격은 아주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다. 그냥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각자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산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 문제를 복잡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결혼한 남자나 여자가 서로 애인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용납된 사회에 간 평범한 부부는 이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 시집 온 외국 태생 며느리들이 시부모의 간섭에 질색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어떤 문제들은 단순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고 각자 다양한 형태의 삶을 산다고 여김으로써 해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생각이 시작된다. 상식과 상식이 충돌할 때, 서로 믿는 정의로움이 충돌할 때, 옳음과 옳음이 충돌할 때 우리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다. 테러범들이 비행기를 납치해 대형 폭탄이 실은 채, 대도시로 다가오면서 충돌하겠다고 협박한다면, 이 때 이 비행기를 공중에서 폭발 시키는 것이 옳은 지,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이 비행기를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옳은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말로 난해한 문제이다.
 
공중에서 폭발시키면 대도시에 사는 수만 명은 목숨을 건지겠지만 반대로 비행기 안에 있는 일반 시민들 수백 명이 목숨을 잃고 대신, 반대로 비행기를 다시 탈취하려고 노력해서 성공하면 테러범만 잡고 일반 사람들은 모두 살 수 있지만, 실패하게 되면 비행기에 탄 사람들 뿐만 아니라, 추락한 지점에 있는 일반 시민들까지도 아주 커다란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상황에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에 따라서 혹은 자신이 평소 믿었던 정의로움이나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신념에 따라서 어느 한쪽을 지지하게 될 것이다. 단, 비행기가 추락할 지점에 사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비행기 폭발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가지 옳음이 충돌하게 된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과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도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물론 이것은 매우 극적인 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과의 충돌을 겪는 대부분의 상황이 사실은 이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사실 젓가락질 하나에도 자신이 믿는 상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든지 간에, 자신이 가진 상식이나 신념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즉, 우리는 각자가 옳다. 하지만 이것은 일치할 수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충돌을 하게 된다.
 
이 충돌은 단지 충돌로만 끝날 수 있다. 말다툼이 벌어지거나 한쪽이 일방적으로 강요당하기도 한다. 또한 심한 경우엔 몸싸움이 벌어지고 살인과 같은 참혹한 결과가 벌어지기도 한다. 아무튼 어떤 결말을 맞더라도 단순한 충돌로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본격적으로 이것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생각의 시작점은 바로 과연 정말로 누가 옳은가에 대한 질문이다. 두 개 이상의 옳음이 충돌할 때, 과연 최종적으로는 누가 옳은지를 결정하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생각이다. 그런데 앞의 비행기 사건에서 과연 어떤 결정이 옳은 것인지를 판단하기가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정말로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의 답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잡한 생각, 즉 우리의 가장 밑부분에 있는 원리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이것이 바로 철학이라고 부르는 학문이 발달된 이유가 된다.
 
흔히 철학이라고 하면, 그냥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철학은 바로 생각의 충돌에서 어떤 생각이 더 옳을 수 있는지를 찾고자 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그 문제를 완전히 이해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생각 충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런 생각은 왜 나타났는지, 우리는 어떤 존재이기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우리는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발전되어 간다.
 
이 말을 다시 표현하면, 복잡한 생각, 즉 철학이라고 불리는 학문은 바로 우리 인간이 가진 도덕적 기준점을 제대로 찾아내려고 시도하면서 발생했다고도 표현할 수 있다. 즉, 철학의 시작은 완벽한 도덕적 기준점 마련인 것이다. 그래서 철학과 도덕은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목적에서 시작된 철학은 점점 발전해서 도덕이 문제가 아닌, 스스로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변형되었다. 사실 이것은 당연한데, 원리를 알아야 문제를 푸는 것이기에, 우리가 어떤 도덕적 기준점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가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흔히 이기심이나 욕망 등을 비 도덕적 가치로 정의하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이 이타적인 성향을 가질 수 있거나 혹은 필요 이상의 욕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본질적 욕구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배가 고파서 밥을 먹는 것을 비 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이 먹어야 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배가 충분히 부른데, 빵을 쥐고는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지 않는 사람은 비난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욕망이나 욕심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본질이 아닌 것이다.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할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이 바로 얼마나 본질적인 것이냐를 판별해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본능적 판단은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너무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치는 사람은 이해해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재미로 빵을 훔치거나, 많은 빵을 가지고 있지만 욕심으로 인해 더 많은 빵을 가지려고 빵을 훔치는 사람은 비난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도덕적 판단 기준에는 바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때, 우리는 도덕적 판단 기준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이 도덕이란 존재가 오직 인간의 사회에서만 유효한 개념이라는 점이다. 즉, 철학자들의 사고의 범주는 오직 인간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래서 과거 철학자들의 생각을 읽어보면, 그들은 인간과 동물을 구분했으며, 인간만이 이 자연계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로 규정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일반 사람들에게도 광범위하게 퍼져서, 인간 자부심을 갖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우리가 우주를 이해하고 싶다면, 지구만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 태양계도 아니다. 은하도 아니다. 우리는 우주 전체를 바라봐야 한다. 그것이 설령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그래야 답을 찾아도 제대로 찾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단지 태양계만 보면, 우리는 지구만이 유일한 생명체를 가진 행성이라도 말할 수 있다.
 
과거 우리가 지구 밖에서 우리를 바라보지 못할 때, 우리는 태양과 달과 별이 모두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다. 이것이 바로 좁은 시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이다. 그리고 이것과 똑같은 문제가 바로 철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인간의 도덕, 즉 인간 범주 내에서만 존재의 본질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시작부터가 제대로 된 범위가 아닌 셈이 된다.
 
이 상태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은 모두 인간에 범주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당연한데, 이런 생각을 하는 존재 자체가 인간 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미 사고의 발전으로 인해 철학자들의 관심은 인간의 충돌의 범주를 넘어서 인간의 존재 그 자체로 옮겨졌다. 그래서 이젠 왜 그런 생각이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 답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말은 철학자들 조차도 이젠 왜 그 질문을 시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왜 우리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고, 그 던져진 질문에 대해서 얼마나 논리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런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적인 존재이며, 그럴 능력이 있으며,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특권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모든 시시비비를 가려줄 단 하나의 진리를 원한다. 그래서 모든 충돌과 갈등 상황에서 그것을 명확하게 구분해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물체, 즉 물리학 분야에서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다. 물론 아직도 부족하지만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 역학, 진화론 등이 그 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왜 존재하고 있는지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것을 찾아 온 수천 년이나 된 철학이란 학문은 아직도 그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논증은 되지 못해도 종교는 그 답을 내놓았다. 물론 종교마다 그 답이 달라서 문제이지만, 아무튼 종교는 명확하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생각을 계속 해 온 철학은 오늘도 답을 알려주지는 못하고 문제만 설명해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리고는 할 말이 없으니, 각자 답을 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이 정도면 답이 없다고 포기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답을 찾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사고의 범주는 인간의 그것을 뛰어 넘어서 전체로 확장시켜야 한다. 그것은 단지 지구라는 생태계에서만 머물러서도 안되고, 우리가 지식적으로 아는 최종 한계, 즉 우주를 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질문은 왜 우리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이 아닌, 왜 이 우주가 존재하게 되었는지로 확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 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다시 우리는 사고의 범주를 인간의 범위로 좁혀야 할 것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고 범주를 인간으로 좁혔다고 해서, 그 사고의 한계가 인간이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도덕을 기준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도덕은 원래 선과 악을 구분한다. 하지만 우주적 관점에서 선과 악은 존재할 수 없다. 선과 악은 단지 인간의 범주에서만 유효하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된 철학은 근본적인 한계가 생겨날 수 밖에 없다. 도덕을 통해서 끝없이 선과 악을 구분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외통수이다. 사고의 범주가 인간을 넘어서면, 우리는 생각하는 존재로써 인간에 대한 아무런 특권을 가질 수 없다. 과연 사고의 특권이 없는 인간이 생각한 결과가 과연 어떤 의미로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치 스스로 왕이 된 사람과 같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동안 철학은 학문적 영역에서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다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인간 자부심을 부여하는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오래된 마약의 효과는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다른 존재에 끼치는 해악에 대해서 좀 덜 관심있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