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의 작동 원리 : 두 번째, 감정과 이성의 전쟁사

아이루다 2015. 1. 30. 07:06

인간은 크게 뇌와 주요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 머리 그리고 뇌의 지시를 이행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몸으로 구성이 된다. 물론 몸은 외부적인 활동 이외에도 소화라는 작동을 통해 머리와 몸이 작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아주 큰 역할을 한다. 그래서 우린 호흡, 소화, 배출을 통해 몸이 움직일 에너지와 머리가 쓸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때 머리와 몸은 동등한 관계가 아니다. 머리는 몸을 하인처럼 다룬다. 즉, 말 그대로 수족부리듯 하는 것이다. 사실 이 둘 중 우리가 자신이라고 느끼는 존재는 바로 머리이지 몸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머리가 없는 사람과 몸이 없는 사람 중 우리는 모두 머리가 있는 쪽을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뇌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바로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의식이라고 부르는 존재이다. 그런데 사실 무의식과 의식은 비교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서 너무 거대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의식은 인간을 쥐고 흔드는 아주 중요한 감정 자체를 만들어 내는 주체이다. 그리고 의식은 단지 그 중 아주 일부만을 인식할 뿐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일어나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우리가 이 작은 존재인 의식을 '나 자신' 으로 인식하다는 점이다.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데, 의식이 바로 인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단 하나의 존재이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존재가 함께 하고 있는 상황처럼 되어 버린다. 그리고 각 주체가 바로 무의식과 의식이다.

 

여기에서 감정을 통해 우리를 조정하는 역할을 맡은 존재는 무의식이고, 이성이란 새로 생긴 기능을 통해서 무의식의 요구를 제어하고 숨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 의식이다. 그래서 의식은 작지만 대단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무의식 입장에서 의식은 마치 여섯 번째 감각기관과 같다.

 

무의식은 기본적으로 다섯 개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온 정보를 해석하여 다름 행동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의식으로부터 온 정보도 함께 고려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성이란 도구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의식의 능력은 다른 감각기관에 비해서 많이 복잡한 활동이다. 그래서 그것을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원리가 작용하기에 움직이지도 않고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거나 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이 마치 육체 활동을 한 것처럼 배가 쉽게 고파지는 이유가 된다.

 

하지만 의식이 아무리 뛰어나도 무의식에 비하면 너무도 미약하다. 우리는 무의식의 도움이 없다면 그 단순한 걷기 조차도 못한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걸을 수는 없다. 운전도 하지 못한다. 사실 무의식이 없다면 우리 인간은 아무 것도 못한다. 우리는 절대로 의식적으로 혀를 움직여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냥 이루어진다.

 

이런 상황인데도 인식을 통해 '나'를 인식한 의식은 마치 뇌의 주인이 자신인냥 착각하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새롭게 등장한 이성이란 능력은 그것을 완전히 착각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착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된다. 모든 이들은 자신이 인식하는 의식을 자신으로 인식한다. 거의 대부분의 이들이 자신이 가진 거대한 무의식이란 존재에 대해 존재 여부조차 잘 알지 못한다.

 

이 정도의 사전 지식을 이해한 상태에서 이젠 무의식의 도구인 감정과 그것에 반대하는 의식의 도구인 이성간의 오래된 전쟁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의 무의식은 감정을 유발시켜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지시를 내린다. 사실 그래서 감정은 호르몬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호르몬이야말로 무의식과 몸이 의사를 주고 받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이다.

 

하지만 인간은 지구상에 살아가는 생명체 중에서 유일하게 이성이라는 능력을 개발해 내었다. 사실 이 이성은 원래 의도한 바가 아니긴 했다. 인간이 무의식이 지시하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려고 자신의 지능을 최대한 활용을 하다보니 생각치도 않게 갖게 된 능력이다.

 

이성이 발달된 배경을 생각해보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바로 충분한 잉여의 먹거리였을 것이다. 아마도 만약 우리가 하루에 12시간을 써서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지경에 계속 머물렀다면, 우리가 이성이란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진 모든 지적 능력을 활용했고, 그 결과로 인해서 결국엔 잉여 농산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사실 이 잉여 농산물의 가치는 대단했다. 왜냐하면 어떤 이들은 이제 평생을 놀면서 생각만 하고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던 사람들 중, 아주 특별한 존재가 하나 나타난다. 그 사람은 바로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이며, 그는 인간사에서 최초로 이성을 정의했다. 그리고 그 후로 인간에겐 늘 이성이란 특징이 부여되었다.

 

하지만 사실, 우리가 인간의 고유 특징이라고 믿는 이성은, 물론 인간 고유의 특징은 맞지만 우리가 믿는 것과는 달리 그리 능력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된 이 이성에 대한 믿음은 그 후 종교와 철학 분야에서 존재론적 질문과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그 능력을 과대하게 평가받게 된다.

 

즉, 우리는 이성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마치 우리가 감정의 존재를 벗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이다. 사실 그래서 인류사에서 그리스 이후 근대까지 인간의 이성은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다. 우리는 이 이성의 힘으로 수 많은 문명적 이기를 만들어 냈고, 시스템을 발전시켰으며, 결국 스스로 자연을 정복했다고 믿을만큼 거대한 일들을 해냈다.

 

사실 감정은 단순한 지시사항에 불과했다. 배가 고프니 먹어야 한다, 몸이 피곤하니 자야 한다, 똥을 쌀 때가 되었으니 싸야 한다, 위험해 보이니 피해야 한다 등등이 바로 감정에 의해 지시되는 내용들이다. 그리고 이 지시를 수행하는 능력은 이성이 끼어듦으로써 훨씬 더 효율적으로 변했다. 우리는 이성을 통해 좀 더 먼 미래를 위해 계획을 하고, 그럼으로써 당장 할 일의 순서를 정하거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해도 시간이 남는다면 미리 해 놓기도 한다.

 

사실 이성의 이 능력은 정말로 인간의 문명을 발전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우리는 당장의 눈 앞에 있는 이득만을 위해서 행동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 전체를 관통하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심지어 인류사 전체적인 시야로 자신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이성은 정말로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이성의 해낸 일 중에서 지식을 정리하고 전달할 수 있는 문자와 책을 만들어 낸 능력은 특히나 거대한 발전의 시작점이 되었다. 우리는 지식을 공유하고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 있음으로써 정말로 많은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리고 후대는 늘 선대의 시행착오를 활용했다.

 

더해서 이성은 음악을 작곡하고, 미술 작품을 그리며, 우주의 원리를 이해하고, 수학을 발전시켰으며, 미래를 예측하여 위기에 대비했고, 강한 무기를 만들어 인간을 좀 더 안전하게 지켜주기도 했다. 이러니 우리 인간이 어떻게 이성의 힘을 스스로 자부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서 이 때를 '이성의 전성 시대' 라고 부를만도 한다.

 

하지만 이런 서양의 흐름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이성을 통해 감정과 대립하려고 하질 않았다. 동양은 사실 이성과 감정이 잘 조화되길 바랬고, 더해서 이성이 감정을 관장하는 우리의 무의식을 잘 설득해주길 바랬다. 사실 무의식이 무조건 생존하려고 하는 판단은 어떤 면에서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냥 그것은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 할 뿐었던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그 어떤 의미도 없는 생존 욕구였다.

 

그래서 만약 이것에 완전히 설득시킬 수 있게 된 사람들이 나타났는데, 그들은 깨달은 자들이라고 불렀다. 어떤 면에서 동양은 서양보다는 이성의 역할을 그리 크게 보지 않았다.

 

그런데 문명의 태동기부터 근대까지 오랜 시간 이어진 이성의 전성 시대는 현대에 이르러서 급격한 몰락을 겪게 된다. 그 이유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성이 그렇게나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만들어 낸 결과물 때문이다. 우리는 더 이상 고통과 공포심으로 인해 행동이 좌지우지 되길 바라질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정말로 많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성이 그토록 바라는 시대가 되자, 이성이 전혀 예상치 못한 비 이성적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몇 천년간 주도권을 뺐긴 것으로 알려진 무의식이 조용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사실 이성은 뇌라는 거대한 공간을 가진 국가에서 아주 조그만 변방에 불과한 도시급 영역이었다. 그리고 이 왕국에서 무의식이라고 알려진 영역은 해당 국가의 지도층이었는데, 이들은 참으로 쉽게 변하지 않는 존재라서 그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석시 시대의 동굴에 살던 삶을 기준으로 삼고 있었다.

 

이성은 최첨단 도시인데, 정부는 석기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불일치가 일어나겠는가?

 

그래서 이성은 정부를 무시하고 싶었지만, 노력을 하고 나면 쌀을 나주어주는 것은 바로 정부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비유는 바로 이성이 공포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결국엔 뇌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성은 무의식에게 자신의 계산법에 의해서 나온 미래 예측을 보여주면서,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는 행복하게 만들어 주길 바랬다. 하지만 이것은 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더해서 그렇게 예측을 했다고 해서 꼭 예측대로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실 이성이 약속한 행복은 상대적으로 불안한 행복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의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단지 쌀을 나눠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신이 감정을 통해 지시하는 것을 이행했었는데, 이성의 발달과 함께 이것이 제대로 동작되지 않음에 대해서 곤란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의식은 그 와중에 어떤 묘한 특징을 하나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무의식이 그냥 아무런 생각없이 주고 있었던 후식, 즉 아이스크림을 받기 위해서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의식은 원래 우리를 고통과 공포를 통해 지배해왔다. 그리고 말을 잘 들으면 아이스크림이라는 행복감을 느끼도록 했는데, 공포와 고통을 거의 느낄 필요가 없는 현대인들은 이제 쌀이 아닌 아이스크림만을 위해서 무의식이 감정을 통해 지시하는 것을 이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우리는 과거엔 공포과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지시를 이행했다면, 이제 행복하기 위해서 무의식이 시키는 대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나 너무도 안전해져서 할 일이 거의 없어진 인간에게 찾아오는 지루함은 이 상황을 훨씬 더 심화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원리로 이제 정의된지 겨우 200년 남짓한 행복이란 용어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도 필수적인 것이 되어 버렸고, 이젠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이 아이스크림, 즉 행복감을 선물하는 주체로써 무의식의 역할은 이성이 가졌던 주도권을 아주 쉽게 되찾고 말았다. 이성은 원래 좀 더 문명이 발달하면 자신이 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상황은 뜻밖에 엉뚱한 데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이제 우리는 공포와 고통로만 통제되지는 않지만, 행복이라는 것을 추구하기에 오히려 예전보다 더 뇌와 종속된 관계를 맺고 말았다. 즉, 우리는 고통에서는 어느 정도 해방되었지만 행복의 노예가 된 것이다.

 

사실 노예라는 관점에서만 보면 고통의 노예 상태보다 행복의 노예 상태가 훨씬 더 심각하긴 하다. 고통은 당장 힘들기에 해방이라는 힘든 과정을 위해 투쟁할 수 있지만, 행복의 노예는 도대체 그것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삶에 충분히 만족하는 노예에게 해방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 전쟁은 무의식의 완벽한 승리로 끝난 셈이 되었다.

 

물론 이것은 억울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의 주인은 무의식이지 의식이 아니다. 그것을 의식이라고 믿은 것은 단지 우리가 인지하는 의식의 착각이였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산속에 혼자 살면서 이 세상의 주인이 나라고 믿고 사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문제는 없지만, 이 사람이 산 속에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내것이니 너는 내가 죽이겠다고 하면서 사람을 죽이게 되면 큰 일이 나게 된다.

 

실제로 이성도 이런 일을 했다. 우리 몸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의식은 이성을 앞 세워서 스스로 주인 행세를 심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가진 수 많은 부조리가 생겨났다. 인지 부조화, 불일치, 모순 등의 상황이 엄청나게 발생한 것이다. 그 결과로 인해서 인간은 모순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되었고, 우리는 결국 모두 자신을 위해 살면서도 남을 위해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우리는 우리가 만든 좋은 가치들인 사랑, 우정, 믿음, 정의, 희생 등과 같은 개념을 절대화 시켜서 그것을 평생 추구하면서 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게 된 이 지구를 마치 원래 인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인 것 마냥 금을 그어서 재산을 나누고 구멍을 파서 석유와 석탄을 채굴하고 있다. 그 누구도 그 권한을 준 적이 없는데, 각자가 서로 약속을 하고는 그것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능력이 없어서 못할 뿐, 인간은 이 우주 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래서 언제라고 능력이 된다면 모든 별을 나눠서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냥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과거에 우주는 지구를 중심으로 돌았고, 이 우주의 주인은 인간이었다. 그것이 바뀐지가 겨우 몇 백 년이다.

 

이런 수 많은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 덩어리인 인식은 스스로를 논리적이라고 믿으면서 이성을 앞세워 상상하기도 힘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니 결국 무의식이 다시 주도권을 찾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사실 무의식은 단 한차례도 주도권을 뺏긴 일이 없다. 그것은 그냥 의식 혼자 심각한 착각을 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의식은 쉽게 포기 하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의식에게는 두 번째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낼 수 있는 가장 큰 가능성은 바로 기술 발전이 일어나서 우리 인간이 영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에 더해서 무의식이 분비해주는 행복을 위한 호르몬들 말고 외부에서 약물로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가능성이 바로 그것을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먼 미래 같지만, 이미 요즘 시대에 뇌의 정보를 컴퓨터로 이식하는 등의 기술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상황이니, 어쩌면 정말로 몇 십 년내로 그런 시대가 올지도 모르겠다. 이것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마치 30년 전 스마트 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비웃던 시절하고 같을지도 모른다.

 

만약 미래에 인간이 기계몸을 가지고 영생을 할 수 있게 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독되지 않는 마약 물질을 투여받으면서 하루 종일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던 일은 모두 로봇들이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의 미래상이다. 사실 우리의 미래는 이 모습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으리라 믿는다.

 

우리 인간은 현재까지는 행복한 감정의 노예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이성으로 감정을 조절해 본 적이 없다. 우리는 그냥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 뿐이다. 거기에 더해서 소위 말하는 철학자들은 주로 이성을 통해 생각을 했기 때문에 좀처럼 이성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똑똑한 이들의 사고 결과는 결국 거의 무의미한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실 현생 인류가 어떻게 이성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정말로 제대로 된 이성을 가지고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스스로 이성을 가지고 있다는 믿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특별한 사람들이 이성이 있음을 증명했고, 그리고 그것을 설명해줬기 때문이다.

 

꼭 이런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역사는 바로 소수의 천재들에 의해서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이성 역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의해서 발견된 개념인 것이다.

 

지난 글에 이어서 이 두 번째 글까지 읽은 후, 글을 읽은 사람들의 마음엔 아마도 몇 가지 생각이 혼재되었을 것이다. 그때 정말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정보를 취득할 땐, 가장 선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의식과 이성이란 점이다. 즉, 우리는 모든 정보를 의식의 입장에서 본다.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로 이 전쟁사를 동등한 입장에서 바라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 편인 의식을 지지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과 일본의 축구 경기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한국을 지지하게 된다.

 

이런 이유로 인해서 글을 읽은 후, 의식의 입장에서 무의식의 완승 상황에 대해서 반발심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부정할 수도 있고, 무시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다. 또한 이 글이 완전히 거짓일 수도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유동적이다.

 

단지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마음을 열어 두라는 것이다. 그 어떤 헛소리라도 의미는 있다. 설령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그것이 거짓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진실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 태도만 유지할 수 있다면, 우린 우리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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