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아이루다 2015. 1. 17. 07:46

 
이 글은 독후감일 수 있다. 이 글은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라는 제목을 가진 책을 읽고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은 독후감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읽고 느낀 점을 말하는 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을 독후감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이 책은 오랜만에 읽은 흥미로운 책이었다. 지난 주에 지인과 약속이 있어서 광화문에 가서 기다리는 중 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개인적으로 '지루함' 이란 주제는 참 난해한 상태였기 때문에 책의 제목을 보고 급격히 관심이 생겼다. 그리고 잠깐 내용을 훑어본 후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사왔다.
 
그런데 책을 읽기 시작하자, 내용은 놀라웠다. 아니, 놀랍기 보다는 무척 흥미진진했다. 나는 지금껏 지루함에 대해서 정말로 막연하게 생각해왔는데, 이 책에서는 과거 철학자들이 말한 지루함에 대한 생각에 저자 본인의 판단 그리고 비판과 동의를 통해 그것을 쉬운 문장으로 풀어 놓았다.
 
개인적으로 철학 책이 어렵게 쓰인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에(이해력 부족으로 인해서) 이렇게 쉬운 언어로 쓰인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 책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초반부에 소개된 파스칼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는데, 그것이 바로 지난 글에서 소개한 토끼 사냥을 가는 사냥꾼에게 출발하기 전에 이미 잡힌 토끼를 주고서 그의 반응을 보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토끼가 목적이 아니라, 심심함 혹은 지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하는 행위라는 내용이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지루함의 본질적 모습과 더해서 우리가 현 시대를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종류의 토끼들을 원한다고 믿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지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게 해준다.
 
새로운 종류의 냄비가 나왔고, 이 냄비가 기존의 것에 비해서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홍보를 읽은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그 냄비를 사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 잡히고 결국 그 냄비를 쇼핑하게 되는 과정이 바로 토끼 사냥과 유사한 패턴을 가지게 된다.
 
이때 실제로는 냄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쇼핑을 할 명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것은 냄비를 사는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남자들 역시도 실제로는 과정을 즐기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면서도 어떤 식으로든 그 제품이 필요한 이유를 만들려고 애쓴다. 마치 토끼가 꼭 필요하다고 믿고 떠나는 토끼 사냥꾼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저 지루함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는 기업이 사야 할 제품을 만들고, 사야 할 이유를 설명해주며, 결국 소비자는 사는 행위가 자발적으로 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기업이 원하는 데로 사고 있는 형태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그래서 광고가 그리도 중요해지고 있다.
 
다시 원론적인 관점으로 돌아가서, 우린 정말로 왜 지루함을 느끼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것에 대한 명쾌한 설명을 기대했지만, 이 책에서는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을 주지는 않았다. 단지, 그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거 유목민에서 정착민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그 힌트를 제시했다.
 
원래 유목민은 끝없이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계속 새로운 환경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언제나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동 후, 다음 이동 때까지 끝없이 주변을 살펴야 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뇌가 끝없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뜻이 되며, 그로 인해서 지루함을 느낄 틈이 없다는 뜻도 된다. 반면에 정착을 한 인간은 매일 매일이 반복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떠돌아다니던 시절에 의도하지 않게 바쁘게 움직였던 뇌가 별다른 생각을 안 해도 될 처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시기적으로 유목민의 시절은 길게는 수백 만년 지속되었고 정착민의 시대는 이제 겨우 만년에 불과하다.
 
이것이 바로 지루함을 유발시켰다는 간접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 설명은 나름대로 만족스럽게 이해는 간다. 즉, 지루함을 왜 느끼는지에 대해서 물으면, 그것은 원래 우리의 본질이라고 답을 해주는 것이다.
 
이 책은 이런 식으로 지루함의 본질적 모습을 다뤘다는 점에서 매우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더해서 당 시대에 나름대로 천재로 불렸던 사색가들의 이론을 소개함으로써 이론의 신빙성도 높였다. 특히 하이데거의 지루함에 대한 고찰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뭔가 부족했다. 하이데거 지루함론의 1단계는 바로 지루함에 놓이는 상황을 설명했다. 한적한 시골역에서 기차를 놓쳤는데, 4시간이나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에 대한 예시를 통해 설명했다. 특별히 할 것도 없이 4시간을 보내야 할 때, 이 사람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
 
그래서 우리가 일을 하는 이유 역시도 지루함을 느끼고 싶지 않아하는 본능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파티를 하는 것 역시도 지루함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그냥 결국 지루함은 우리들의 본질이며 이것을 극복하는 것들은 바로 어떤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책에서 소위 말하는 철학자들이 가진 맹점 두 가지를 발견했다.
 
그 하나는 바로 인간에 대한 자부심이다. 아마도 뛰어난 철학자일수록 인간을 동물과 분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됨을 이해한다. 그 자신이 그렇게나 뛰어난 사색을 할 수 있는 존재인데, 그냥 매일 먹고 싸는 동물과 같은 존재와 자신이 본질적으로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무리이다.
 
그리고 이 배경엔, 그 철학자가 매일 만나게 되는 수 많은 일반 사람들에 대한 비하가 숨겨져 있다. 즉, 매일 만나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로 보이는 존재와, 거대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는 자신이 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같은 인간이지만, 그들은 인간이 아닌 동물로써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이란 것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자부심이다. 뭔가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고 산다는 착각.
 
하지만 슬프게도 이런 생각은 착각임에도 불구하고 사유란 것을 하고 사는 존재들에겐 굴레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하루에 10시간씩 30년을 생각하고 살았는데, 실제로 그 자신은 평생 아무런 생각도 안하고 사는 존재와 같은 그냥 '인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쉽게 인정하겠는가?
 
여기엔 생각을 하고 사는 것에 대한 가치를 부여한, 인간 특유의 어리석음이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이것은 철학자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하는 짓이다. 자신이 평생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했다면, 그것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어리석음이나 연민 그리고 경멸까지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대상이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을수록 더욱 더 그렇게 된다.
 
그리고 철학이야 말로 그 중에서 단연 최고의 평가를 받으며 철학자 당사자들은 그것에 대해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인간에 대해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 철학인데, 어떻게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겠는가? 그리고 인간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그 어리석은 면에 대해서 알게 되는데, 그것을 알고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어떻게 안 생기겠는가?
 
이 책에서 소개된 파스칼은 토끼 사냥을 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토끼가 아닌 사냥 과정을 즐기기 위해서 가는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사냥꾼을 비웃는 사람을 가장 어리석은 존재로 묘사했다. 즉, 철학자들이다.
 
이런 철학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은 결국 어떤 식으로든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단지 지능이 좋은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마치 동물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고 규정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하이데거를 평생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그는 지루함에 대해 대단한 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한 가지를 빼먹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은 두 번째 맹점이며, 비록 인간 프라이드에서는 벗어난 것처럼 보이는 이 책의 저자도 역시나 가지고 이는 면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지루함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설명했고, 저자 역시도 이것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과연 정말로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단지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목적일까?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 본능과 지루함을 벗어나고 싶은 본능 중 어느 것이 더 본질적일까? 이것의 답은 너무도 쉬워서 왜 그 점을 인지하지 못했는지가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어떤 것을 가져다 붙여서 설명하려고 해도 결국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사는 생명체라는 것이 본질이다.
 
그나마 우리 인간은 동물에 비해서 좀 더 수월하게 생존을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을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한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일은 생존의 기본이다. 그래서 지루한 일을 하면서 바쁘게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토끼 사냥을 가는 사람은 토끼 사냥 자체를 즐기는 것도 있지만, 누군가는 정말로 그 토끼가 필요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토끼 사냥을 가는 사람에게 이미 잡힌 토끼를 주면, 어떤 이는 화를 낼지 모르지만, 어떤 이는 토끼를 잡아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벗어날 수 있어서 정말로 깊은 감사를 할 것이다.
 
이것은 현대 사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그 제품을 사는 과정이 즐거워서 쇼핑을 하겠지만, 어떤 사람은 쇼핑 과정이 너무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우리는 자주 택배를 이용한다.
 
이런 식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생존의 본능을 제외하고 철학을 논하게 되면 아주 이상한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아마도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유명하거나 똑똑한 사람들은 원래 먹고 사는 것에 대해서 그리 고민을 하지 않고 살아도 되었기 때문에 생존에 대한 생각을 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이 글을 통해서 지루함에 대한 발생원인에 대해서 개인적인 생각을 써 볼 생각이다.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냥 적어 보겠다.
 
나는 개인적으로 지루함이 발생하는 이유를 바로 생존에 대한 욕구로 인해 온다고 본다.
 
유목민으로 살던 시절에 인간은 계속 끝없이 새로운 환경에 노출되어야 했다. 이것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환경은 불안함을 가져다 주니까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그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서 최대한 주변의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근처에 사나운 육식 동물이 없는지, 늪은 없는지, 독사는 없는지 등등을 살필 것이다.
 
그런데 이랬던 우리가 정착이 되면서 더 이상 주변을 살필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는 수백 만년을 이어온 유목민 시절을 통해 진화되어 왔다. 즉, 우리의 뇌는 아직도 유목민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겨우 정착을 한지가 만년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래서 우리는 유목민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그래서 많은 이들이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곳을 탐색하는데 큰 즐거움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인간의 탐구자적 본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을 깐 상태에서 하나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만약에 유목민에게 있어서 혹시라도 지루함이 있었다면 그 지루한 상황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사냥감을 기다리는 과정에서도 발생할 수 있었을 것이고, 열매 나무를 찾아 다니는 과정에서도 있었을 것이다. 낚시를 했다면 고기가 낚이길 기다리는 중에도 발생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기다리는 과정을 무척 싫어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엔 당연히 '실패' 라는 별로 달갑지 않은 결과가 경험적으로 내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 즉, 사냥감을 기다리고, 채집할 열매를 찾는 유목민에게 기다림은 불안하고 초초한 상태였을 것이다.
 
이들이 그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실제로 동물을 사냥하는 시간인데, 이땐 최대한의 집중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더해서 그 결과물로 인해 큰 행복을 얻었을 것이다. 채집 역시도 마찬가지다. 나무를 발견하고 과일을 따는 순간이 바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착민으로 바뀐 우리는 이젠, 딱히 일이 없고 뭔가 한참 후에 일어나 날 일을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순간처럼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분명히 이것은 명백히 불필요한 것인데도 우리는 마치 유전자에 새겨진 듯, 과거의 유목민 시절에 가졌던 본성을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지루함은 좋지 않는 느낌으로 작용되는 것이다.
 
단지 과거의 지루함은 실패에 대한 불안함으로 인해 공포스러웠지만, 실제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잉여 시간의 지루함은 그 느낌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설령 이런 상태였더라도 아마 다음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우린 이미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여서 사회를 이루게 되면서, 뭔가 할 것이 없어서 지루함을 느낄 때 다른 이들은 뭔가 얻고 있거나 이득을 보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사건이다.
 
자신은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고 있는데, 옆 집 사람은 뭔가를 만들거나 이득을 얻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상대적 박탈감을 만들어 낸다. 상대는 가진 것이 많아져서 미래가 더욱 안정적으로 변하고 있는데, 반면에 자신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멍한 시간을 보내면 안될 것이란 생각도 든다.
 
더해서 근로에 대한 사회적 압력은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지 못하거나 낭비하는 느낌이 드는 것을 마치 제대로 살지 못하는 듯 다그치고 있다. 우린 그래서 바쁘게 사는 것을 선으로 여기는 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니 멍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양심에도 가책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사실 가만히 있는 것은 퇴보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 시대에 있어서 발전하지 못하는 건 모두 퇴보로 한꺼번에 취급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가만히 머무르는 것이 퇴보인 것인가? 우리들에게 새겨진 이 낙인과 같은 본질은 과연 얼마나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까?
 
거기에 더해서 좀 더 문명이 발전하자, 이젠 반드시 생산적이지 않아도 단지 행복해 보이는 사람만 봐도 박탈감을 느낄 처지에 놓여 버린다. 즉, 바쁘게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되어서 이젠 잉여 시간을 그냥 뒹굴거려도 될 법한데, 이젠 그 시간을 행복하게 보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원래 우리가 행복하게 보내는 시간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내가 행복할 때 남은 불행할 수 있고, 남이 행복할 때 내가 불행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지루함을 느끼면 마치 다른 모든 이들은 행복한데 자신만 홀로 지루해 하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결국엔 불행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근본적인 욕망을 부채질 한다. 그래서 결국 이득을 얻지 못하고, 바쁘게 살지도 못하고, 행복하지도 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지 않는 시간으로 규정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어 버린다. 즉, 지루함은 원래 불안함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행복하지 않는 상태를 증명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버렸다.
 
실제로 현대에 들어서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 이외에 생존을 위해서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유휴 시간을 별다른 행복 없이 소비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도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을 들여서 시간을 소비를 한다. 여행을 가고,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난다. 그 결과물로 행복감을 선사 받는다. 물론 시간을 소비했다고 해서 행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거기엔 바로 우리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재미난 것들이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 그리고 이렇게 행복하게 소비된 시간은 그것을 위해 돈을 쓴 사람들을 만족시킨다.
 
이것이 바로 돈이 행복으로 변환되는 과정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이 과정을 잘 알기에 돈을 벌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을 행복하게 보낸 것은 시간을 낭비한 것이 아닌 것인가? 우리는 실제로 행복할 때 시간을 가장 인식하지 못하고 쓴다. 예를 들어서 돈을 어디에 썼는지 모르고 썼다면 가장 낭비한 것이 아닌가? 우습지만, 사람들은 행복과 시간은 다른 관점에서 본다. 왜냐하면 행복은 지루한 시간을 없앤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지루함은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인 원인이 되어 준다. 즉, 행복의 가장 중요한 필수 요소인 고통이 되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루함이 가져오는 고통은 모두 현상적인 것들이다. 실제로 지루함의 근본은 바로 정착을 하고 반복되는 삶이 시작되면서 우리가 아직 그것에 적응하지 못한 까닭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먹을 것이 풍부한데도 끝없이 몸에 지방을 축적하는 우리 몸의 시스템과 같다. 그래서 우리의 진화는 좀 더 살을 찌지 않는 것으로 또한 좀 더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상태로 방향을 잡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혹시나 이 책으로부터 이 지루함을 떨쳐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 책의 결론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못했다. 단지 조금 힌트를 얻었다면, 과거 유한 계급으로 알려진, 소위 말하는 과거의 귀족들의 한가로움에 대한 삶을 생각해 보게 된 것이 나름 괜찮았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라면 선비들의 삶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노동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과연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까?
 
그리고 책은 습관을 지루함을 일으키는 이유로 보기도 하는데, 실제로 나는 습관이 지루함을 벗어나게 해주는 가장 큰 도구라고 생각한다. 매일 하루를 같은 일을 반복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비록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지루함을 느끼지는 않기 때문이다. 규칙적인 삶은 좀 덜 지루하다.
 
물론 매일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정해진 소소한 일상이 계획되어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또 하나 지루함을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지루함의 원인을 반대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을 말해준다. 즉, 타인의 이득이나 행복을 바라보는 것은 결국 지루함에 눌려 불행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그런 것들로부터 자극을 받아서 노력을 하게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으로 인해 우울해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루함이 가져 온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 말고 진정한 의미의 지루함을 벗어나는 방법은 바로 변화에 대해 인식하는 능력일 것이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인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매일 변화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린 그 변화를 잘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만하다.
 
이것은 우리는 비록 정착해서 살아가지만, 마치 유목민의 시대처럼 주변이 매일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만 할 수 있다면 실제로 우리는 정착한 후 유목민의 머리 속처럼 살아갈 수 있는 점에서 나름 설득력이 있다.
 
하늘이 매일 바뀌고, 구름이 매일 바뀌며, 어느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의 감성 능력은 그것을 감지하기 어렵고, 더해서 이런 매일 기적같이 일어나는 이런 변화를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질 것이다.
 
더해서 또 하나의 방법이 더 있긴 한데, 그것은 이 책의 독후감으로써 한계를 넘는 것이라서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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