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장님과 코끼리

아이루다 2015. 1. 12. 09:47

 
장님들이 코끼리 만지고 난 후,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 이야기 하는 모습에 대한 우화는 꽤나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해 판단을 할 때,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단면만을 가지고 전체를 파악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단 한 번도 코끼리를 본 적이 없는 여러 명의 장님들이 등장하는데, 코끼리 다리를 만진 장님과, 코끼리 코를 만진 장님과, 코끼리의 옆구리를 만진 장님은 모두 자신이 경험한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이야기를 늘어 놓는다. 그리고 서로 의견이 맞지 않자 자신의 경험을 기준으로 하여 자신이 옳다고 싸우기 시작한다.
 
이것을 제 삼자의 입자에서 보면, 참 어리석어 보이기 한이 없다. 왜냐하면 코끼리 전체를 본 사람은 그들의 이야기가 모두 부분적 사실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전체로 확장해서 서로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면 어찌 웃기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장님들의 모습을 두 눈이 멀쩡해서 코끼리를 다 보았다고 믿는 우리가 마냥 비웃고 말수 있을까? 과연 우린 그런 장님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을까?
 
물론 두 눈이 멀쩡한 보통 사람들은 코끼리의 생김새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님들의 언쟁을 비웃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코끼리의 모습을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못한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다르게 함으로써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볼 수는 있지만 한 순간에는 단지 한 부분만을 볼 수 밖에 없다. 혹시나 과학 기술력을 통해 코끼리 주변에 100대의 카메라를 설치해서 코끼리의 모습을 모든 방향에서 동시에 보여줄 수 있더라도, 그 모니터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은 오직 하나에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단지 우린 이땐 눈동자만 움직여도 다른 부위를 볼 수 있는 것뿐이다.
 
예전에 피카소라는 화가가 있었다. 그의 그림은 어떤 면에서는 기괴했으나, 그는 인간의 얼굴을 옆면과 앞면에서 본 것을 동시에 그렸다. 그래서 그를 입체파 화가라고도 불렀다. 피카소는 어떤 생각으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대상을 제대로 바라보는 오랜 경험 속에서, 우리가 가진 인식의 한계점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장님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더해서 이 세상엔 코끼리처럼 그나마 시간을 두고 보면 전체를 파악하기가 쉬운 것도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결국 부분만을 알게 되어서 그것이 그것의 전부인 냥 믿고 사는 것도 꽤나 많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그 장님들처럼 그렇게 각자가 경험한 것들을 전체라고 믿고 각자가 맞는다고 싸우고 있다. 실제로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갈등은 장님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싸움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통 정보를 획득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화를 통하거나, 책이나 방송을 통한 일방적 방향도 가능하며, 교육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그때 그 정보가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상관없이 누군가로부터 정보를 얻을 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정보 전달자의 의견도 함께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정보들은 그 정보를 말하는 사람이 또한 어느 곳에선가 얻은 후, 내부에서 1차로 해석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나라 여행이 참 좋다는 정보를 들을 때, 그 사람은 그 정보의 근거로 두 가지를 가질 수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직접 경험한 여행이며, 다른 하나는 친구나 아는 이들 중에서 최근 그곳에 다녀온 사람일 것이다. 혹은 책이나 TV에서 본 것일 수 있는데, 그래서 결국 이런 것들은 모두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두 가지로 나뉜다.
 
그렇다면 과연 그 여행지는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일단 이런 생각을 해보자. 두 눈이 멀쩡한 우리는 코끼리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고 믿는다. 이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가 한 번에 코끼리 전체를 볼 수 없음은 알고 있다. 적어도 그런 말을 하려면 코끼리를 최소 앞, 뒤, 좌, 우, 위, 아래 방향에서라도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좀 더 세밀하게 하려면 수 많은 추가적인 시점이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불가능함에 대한 또 하나의 재미난 사실이 있다.
 
세상의 모든 물체는 3차원으로 존재한다. 즉, 그것들은 모두 입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의 눈은 분명히 3차원 자체는 인식한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라. 우리의 눈이 정말로 어떤 것을 3차원으로 보고 있는지를 말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도 결국 우리가 뇌에서 보는 세상은 2차원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코끼리를 모두 한꺼번에 보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설령 이것을 3D 영상화를 시켜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있어서 세상은 가로와 세로만을 가진 2D의 세상이다.
 
우리가 영화나 TV 그리고 컴퓨터 모니터 속의 영상을 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결국 모든 시각 정보를 2D 형태로 받아들이고는 그 안에서 음영, 거리감, 흐릿함 등을 근거로 깊이를 판단해 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인지한 상태에서 앞에서 나온 질문을 생각해보자. 그 여행지는 정말로 괜찮을 것일까? 솔직히 이것은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것은 마치 어느 한 시점에서만 코끼리를 바라보면서, 코끼리는 어떻게 생겼을까를 설명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어떤 여행지가 참 좋다고 설명하는 사람은 단지 자신이 며칠 그곳에 갔었던 경험이나 혹은 다른 이들이 말한 경험을 기반으로 그것에 대해 나름대로 확신이 있는 것인 냥 설명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우연히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들이거나 혹은 우연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경험한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정보의 판단근거가 자신이거나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라면, 과연 그 정보는 코끼리의 다리를 만진 후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장님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물론 이런 반론을 받게 된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그것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세상에 그 어떤 것이 전체를 보고 설명하는 것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 반문할 것이다. 그리고 이 반문은 절대로 이상한 질문이 아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단지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접하게 되는 수 많은 판단 기준은 모두 그 절대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앞에서 말했듯, 우리가 모든 시각 정보를 2D로 처리하기 때문에 어떤 대상의 전체를 동시엔 보지 못하듯이, 우리는 그 어떤 종류의 대상에 대해서 동시에 전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결국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보고 싶어하는 관점으로만 대상을 볼 수 밖에 없다. 설령 그 자리가 마치 장님처럼 우연히 섰는데 앞에 코끼리의 코가 있었던 것처럼, 처음에 그 정보를 접한 곳이 우연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 번 결정된 관점은 그 출발점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고정된다. 실제로 이때 우리는 그 시작점을 망각을 하고 만다.
 
어떤 여행지에 가서 즐거웠던 사람과 즐겁지 못했던 사람은 단지 우연히 겪은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서 서로 다른 의견을 내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한 명은 가방을 잃어버렸다가 친절한 현지인 덕에 찾게 된 사건이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들고 있던 가방을 소매치기 당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매우 우연하고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들이 일어난 순간의 시점으로만 그 여행지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지된 화면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절대화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 대상에 대해서 한 번 내린 판단을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이런 우리의 특징은 뛰어넘을 수 없는 절대적 한계점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모든 정보는 시간에 종속되며 상황에 예속된다. 그 어떤 정보도 일정 시간만 유효하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만 정확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어떤 정보들을 얻은 후 일생에 걸쳐 그것을 믿고 살아간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정보들을 처음 접한 환경 자체가 이미 코끼리의 한 부분의 위치였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강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고 강요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다수는 실제로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물론 인간의 이런 형태의 사고 방식은 무척 현실적이면서 효율적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뇌의 용량에 비해서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알아야 할 정보의 양은 거의 무한대로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생존 방식은 '분류하고 정의하기' 방향으로 진화했다.
 
분류를 기반으로 한 정의에 대한 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자동차' 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차에 대한 많은 특징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이 차의 모양은 정말로 각양 각색이다. 그래도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차로 인식하면서 특별한 목적이 없는 한, 추가 정보가 불필요하다.
 
여기에 더해서 비행기라고 해도 차에다가 날 수 있다는 특징만 추가하면 될 뿐이다. 실제로 차 역시도 자전거에 엔진을 더했을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모두 하나의 교통수단이란 말로 분류가 가능하며 그로 인해서 엄청나게 많은 대상이 하나로 쉽게 정의되고 파악된다.
 
이런 형태의 인식은 늘 우리의 주된 방식이 되고 있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분류하고, 그 분류의 특징을 정의하여 대상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파악하는 방식에 점점 더 능숙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웬만큼만 경험이 쌓이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정도는 쉽게 구별할 수 있으며, 위험한 곳과 안전한 곳 역시도 나름대로 구별을 할 수 있다. 또한 어떤 환경이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지 혹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파악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서 사람들을 분류하고 파악하는 능력이 많이 발전하게 된다.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주는 역할도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어떤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겉핥기 식으로만 이해하고 나서는 그것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좋지 않은 버릇도 만들어 주고 만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인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것을 제대로 다 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것은 마치 차를 운전해 본 사람이 다른 모든 종류의 차나 심지어 비행기나 헬리콥터까지 운전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실제로 우주선이나 차나 자전가나 원리상 다를 것은 없으니까 말이다.
 
우리 인간은 모두 유한성의 경험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시간은 오직 100년 정도에 불과하며 그로 인해서 태어난 환경과 성향 그리고 많은 운들이 작용하면서 누구와도 다른 독자적인 경험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린 자신의 생각과 비슷한 존재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신의 생각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실제로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며느리들만 모이는 장소에서 시댁에 대한 의견을 구하는 것과 같다.
 
또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고 옳다고 믿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처음부터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으면 관계를 맺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이 쌓여서 그 생각이 굳어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심해진다.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이는 밀쳐내고,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하고만 의견을 교환하면서 그 의견이 정당하고 믿게 되는 현상은, 마치 장님들 중에서 같이 다리를 만진 장님들끼리 서로 코끼리의 모습은 굵은 기둥 모습이라고 주장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과 무엇이 다를까?
 
현실적으로 인간이 장님의 실수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 방식이 가진 의도하지 않는 효과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 모든 것을 확실하게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산다면, 아마도 밥 먹는 법 조차도 익히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것을 고칠 수는 없다. 단지 우리가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의 인식 방식 때문에 어떤 문제점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추가적인 인식이다. 그래서 언제든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살아가게 되면, 언젠가 그것을 고쳐야 할 날이 올 때, 그리 어렵지 않게 고칠 수 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것을 신념이나 믿음으로 좋게 치장하긴 하지만, 결국엔 고집불통의 완고한 늙은이가 되기 십상이다. 과연 그 모습이 우리가 가야 할 어쩔 수 없는 미래인 것인가?
 
그리고 더해서, 세상을 지배하는 수 많은 상식이나 관습 등의 노예가 되어서 그것을 벗어나서 살면 마치 바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는 모습이 과연 우리 인간이 가야 할 유일한 길인가?
 
이것에 대한 답은 각자가 내야 할 것이다. 단지 우리가 무엇을 결정하든 그것 역시도 그 시점에서 본 코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 답 역시도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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