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가치 혹은 존재감의 변형

아이루다 2014. 12. 22. 09:35

 
식당을 방문한 사람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주인의 반가운 웃음에 기분이 좋아진다. 목욕탕에 방문한 사람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매표소 직원의 인사에 기분이 좋아진다. 미장원에 방문한 사람은 머리를 다듬다 말고 돌아서서 자신을 알아보고 인사하는 주인의 인사에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다른 이의 미소 띤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우리를 기분 좋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을 알아봐주는 다른 존재의 태도이다. 그래서 모르고 낯선 이의 미소보다는 알아보고 친근한 이의 미소가 훨씬 더 좋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알아봐주길 바란다. 그래서 그 자신이 어떤 남다른 가치가 있고 의미 있는 존재란 것이 조금이라도 증명되는 순간 행복함을 느낀다. 이것을 존재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존재감은 자존감의 원천이 되어 준다.
 
우리가 남이 그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길 바라는 순간은 하나 밖에 없다. 그것은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바람을 핀 남자는 우연히 어디에선가 지인을 만날까 봐 늘 조심한다.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사람들이나 경찰이 자신을 알아볼까 봐 불안해 한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다른 사람의 관심을 원한다. 설령 아이들이라도 자신에게 시선이 집중되지 않으면 어른들이 보고 있던 TV 앞을 막아 선다.
 
그런데 이런 원칙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자신을 알아보거나 친한 척을 할 때 부담감을 느낀다. 놀랍게도 이런 형태의 존재감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그런 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알아보든 말든 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이다.
 
어떤 모임에 가도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나뉜다. 끝없이 얘기를 하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는 사람들도 있고 구석에서 있는지 마는지조차 잘 인식되지 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들도 있다. 또한 그냥 그 자신만의 즐거움에 빠져서 남들과 재미있게는 놀지만 존재감 같은 것을 통해서 행복을 얻지는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존재감에 의한 행복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 행복 코드는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겉보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단지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만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존재감을 확인 받아야 하는 것만은 아니다. 백아와 종자기의 고사처럼 우린 단 한 명으로부터라도 제대로 된 존재감을 확인 받게 되면 다른 이들의 존재감에 대해서는 무신경해질 수 있다.
 
혹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사이의 존재감보다, 그 자신이 해낼 수 있는 일들에 대한 중요도나 능력으로 그 존재감을 확인 받는 사람들이다. 인류에게 큰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전체의 이득을 위해 노력한다고 믿는 사람들 같은 경우엔 그냥 그 일을 하는 것 자체로 인해서 존재감을 충분히 충족 받기 때문에 딱히 다른 이들의 별도의 존재감 확인이 불필요하다.
 
이것을 다른 말로 어떤 일에 대한 가치나 그 일을 하는 자신의 명예라고도 하는데, 군인들에게서 흔히 현상이기도 하다. 이미 그 자신이 자신이 속한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있기에 이미 존재감이 충만한 것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렇듯 우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통해서만 존재감을 확인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에서, 자신만이 느끼는 가치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으로부터도 충분히 존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평소 사람들이 모였을 때,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무리 속의 존재감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여 결국 존재감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종류가 다를 뿐이다. 우리가 존재감을 원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이 불필요한 존재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기 때문이다. 우린 누구나 필요한 존재 이길 바란다. 단지 그 필요성이 다른 이들과는 다른 곳에서 얻는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일종의 변형된 형태의 존재감이다.
 
물론 이것을 변형이란 용어를 쓰는 것이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변형이라는 말은 원래 있었던 고유의 것이 있어야 하는, 즉 비교 대상이 되어 주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가 인간들 속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 원래 고유의 것인지, 아니면 그 자신만의 고유 가치를 느끼는 것이 좀 더 고유한 것인지는 나 역시도 판단이 서질 않기 때문이다.
 
단지 수적인 분포를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 무리에서 인정받을 때 존재감을 더 잘 느낀다. 우리는 그래서 식당에서, 목욕탕에서, 미용실에서도 존재감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존재감 자체가 자신이 살아야 할 이유를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긴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린 작은 이득을 취할 가능성도 높아지기에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추가적인 행복을 느끼는 것이다. 즉, 식당 주인이 아는 척을 하면 반찬을 하나라도 더 줄 것이며, 목욕탕 주인이라면 공짜 표를 하나 더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는 사람간의 이런 작은 이득 주고 받음이 우리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나라를 지키는 명예를 통해 얻는 존재감이나 집에서 화초를 키우며 얻는 존재감은 그런 이득과는 조금 거리가 멀다. 그래서 이것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럼에도 결국 이 두 가지 형태 모두 존재감 만족의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에 대해 무감각한 사람은 다른 사람처럼 그것으로부터 충분한 만족감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존재감을 얻는 것에 대해 매우 남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존재감으로 인한 추가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발심이 될 수도 있다. 즉, 이득을 추구하지 않기에 현실적으로 더 순수한 목적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가치 있게 느껴진다.
 
직업적으로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은 보수는 낮을지 모르지만, 가치를 부여 할 수 있고,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일을 한다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존재감을 충분히 만족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작은 보수는 그의 삶을 계속 힘들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때는 자신이 하는 일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해야만 버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결국 자신의 일만이 최고라는 아집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다른 일반 사람들이 사는 삶을 모두 별다른 가치 없는 삶이라고 평가절하 할 수 있다.
 
나라를 지키는 일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 군인이나, 화초를 키우는 일이야 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 매우 배타적인 사고 방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임에 나왔을 때는 존재감도 없고 또한 그것에 그리 관심도 없어 보이는 이들이 자신의 관심 있는 영역으로 가면 거의 광적인 수준의 집착을 보이는 경우도 경험할 수 있다.
 
만약 산을 오르는 것을 좋아하는 존재감을 가진 이들이라면 산행의 즐거움에 대해 하루 온종일 떠들 수 있다. 자전거를 타는 것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 이들은 국내 자전거 도로란 도로는 다 가본 후 그것에 대해 평가할 것이다. 이것은 RC카나 피규어 코스프레 등등 많은 종류의 매니아와 그것을 넘어선 일명 오타쿠의 양상을 띠게 된다.
 
그나마 이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얻는 것보다 나은 것은, 보통 그 대상이 인간처럼 변화무쌍하고 조절하기 힘든 존재가 아니며 그다지 욕심이 없거나 아예 무생물이기 때문에 기복이 심하지 않다는 점과 그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가능성이 낮아 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남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대부분은 그것을 통해 치유를 받는다. 결국 이런 모습으로 인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감을 느끼는 것보다는 이런 자신만의 가치를 통해 존재감을 느끼는 사람의 삶이 더 현명하고 더 나아 보이는 것이라고 말해진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다를 것이 없다. 단지 어떤 이는 사람에게서 어떤 이는 자전거를 타는 것이나 산을 오르거나 혹은 조개껍데기를 모으는 것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도 그 당사자들은 착각을 한다. 그것은 마치 자신을 알아 준 이가 종자기 밖에 없다고 슬퍼하던 백아의 한탄과 같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고 느낀다. 자신은 적어도 남들처럼 다른 이들에게서 존재감을 얻으려고 하지 않기에 자신만의 삶을 산다고 자부심을 갖는다.
 
물론 이 자부심은 보통 땐 들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라도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을 접할 땐 자신도 모르게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다. 화석을 발견하는 것에 존재감을 가진 이는 평소엔 거의 말이 없이 지내다가 어느 날 여행 중 발견한 화석 한 점을 보는 순간 그것의 역사로부터 의미 그리고 그 일대의 지층에 대해 들어주는 사람만 있다면 아주 오래 동안 떠들게 된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바로 종자기이며 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바로 백아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한 응대는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그래서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제 말을 줄이려고 한다. 하지만 언제라도 자신의 말을 잘 들어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을 만나는 순간 이 절제는 쉽게 무너진다.
 
그리고 설령 이것을 입 밖으로 꺼내어 떠들지는 않더라도 은연 중 깔려 있는 자신만의 존재감에 대한 자부심은 언제라도 말끝에 실려 표현이 되곤 한다. 즉, 어리석은 이는 자신만의 존재감을 떠벌려 다른 이들의 위화감을 만드는 반면,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런 행동이 다른 이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이것을 최대한 숨기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다른 것은 아니다.
 
전혀 존재감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산 속에서 혼자 사는 이들도 언제라도 마이크와 카메라를 들이대면 자신의 삶이 왜, 얼마나 좋은지 그리고 그것을 다른 이들이 느끼게 하려고 자신도 모르게 노력을 한다. 이것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특징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가치 있어하는 것을 남들이 공감해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내용이 방송이 될 때는 그들의 의도와도 상관없이 삶은 편집이란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포장된다.
 
오래된 공원에 쓸쓸히 홀로 앉아 있는 노인에게 말을 걸어보면 언제라도 그 노인이 살아 온 왕년의 이야기를 마음껏 들을 수 있다. 일단 들어주는 듯 태도를 보이면 지쳐서 도망갈 때까지 그 노인은 자신의 왕년의 이야기를 통해 한 때 존재감이 충만했던 시절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모두 같다. 우리는 조금 달라 보일 뿐, 다른 것은 없다. 단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존재감과 조금 달라 보이는 것들은 우리를 좀 더 행복하게 해줄 가능성이 높기에 좀 더 나은 것이다.
 
그러니까 행복하고 싶다면 사람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존재감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신이 하는 일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히 느끼는 가치 속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신이 다른 이들과는 다른 존재라고 착각하는 것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다른 이들의 삶을 무시하고 자신의 삶만을 옳은 것이란 태도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드러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 자신의 삶에 짙게 물들어서 평생 동안 자신의 주변을 망령처럼 떠돌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자신의 삶이 얼마나 옳고 제대로 된 것인지를 증명하려고 사용한다. 우리가 하는 많은 행동들은 그것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면 증명되기 때문에 한다. 그래서 우리는 좀 더 증거가 명확할 수 있는 것을 선호한다.
 
그리고 이런 삶을 살면서 자신의 삶이 다른 이들과는 다르고 뭔가 좀 더 특별하다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태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 조차도 누구나 절대로 건들면 안 되는 영역이 있다. 아무런 욕심이 없고 특별한 자존심도 없어 보이고 그냥 행복하게 사는 사람조차도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역린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건들 땐 거대한 분노를 경험할 수 있다.
 
누구도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설명 듣는 순간을 견뎌내지 못한다. 그것은 사람간의 관계의 무의미함이나 등산의 무의미함이나, 자전거를 타는 무의미함이나, 식물이나 동물을 키우는 무의미함이나 종교나 신념의 무의미함이나, 인간의 존재 자체의 무의미함이나 마지막으로 사는 것의 무의미함을 들을 때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는 없다. 단지 우리는 표면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그것만 되어도 행복하게 사는 데는 충분하다.
 
현명하게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존재감에 대해서 겸손해야 한다. 하지만 진실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진 한계를 제대로 인정해야 한다. 겸손함은 남들에게 자신을 속이는 행위일 뿐이다. 그리고 이 태도는 다른 이들에게 더 많은 환심을 얻을 수 있는 처세술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실되게 살 수는 없다.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것은 현명하게 사는 길이다. 진실이란 것은 우리가 믿는 만큼 아름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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