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존감, 두 번째 이야기

아이루다 2014. 12. 13. 08:32

 
예전에 자존감과 존재감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쓴 지 좀 된 글이라서 그런지, 다시 읽어보니 글이 많이 서툴다. 뭐 이렇게 말하면, 지금은 꽤나 글을 잘 쓴다는 자부심이 있는 듯 느껴질지 모르는데, 그건 아니고 단지 예전에 쓴 글을 읽으면 글 전체에 걸쳐서 성급함과 일반화 오류가 느껴진다.
 
아무래도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이라도 시야가 넓어지고, 마음이 좀 더 느긋해졌기 때문에 과거에 쓴 글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고 스스로 믿는다. 그리고 현재는 그때보다는 좀 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스스로 희망을 가지고 있다. 아마 이것도 일종의 자기 착각에 의한 자존감일 것이다.
 
예전 글에서는 자존감과 존재감에 대한 정의와 그것들이 어떻게 사람에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존감이나 존재감의 단점과 장점 등에 대해서 썼었다. 그때 쓴 글을 간단히 정리하면, 자존감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존재감은 타인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정의했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이 정의는 틀렸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보면, 이 정의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정의가 틀렸다고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정의를 내리기 전에 하나의 대전제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엄밀한 의미에서 단 한 가지도 스스로 정의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이 글 전체에 걸쳐 설명을 할 것이고,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존감은 내 자신이 한 정의처럼,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자존감 역시도 존재감처럼 타인들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단지, 우리는 타인의 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을 자신이 평가한 후 자신에게 적용시키기에 그것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고 착각하게 된다.
 
어떤 게시판에 현재 행복하지 않다고 사람들이 쓴 글을 본 많은 이들이 하는 조언 중에서 가장 흔한 것은 바로 '일단 자존감을 좀 더 높이시구요' 라는 표현이다. 물론 이 표현 자체는 틀림이 없다. 같은 조건이라면 자존감이 높은 것이 좀 더 행복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단지 자존감을 높이라는 말은 절대로 그리 쉽게 해 줄 조언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국영수 중심으로 예습과 복습을 열심히 하라는 소리와 같다. 그 말은 틀림이 없지만, 과연 이것이 실천 가능한 것인지는 좀 더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자존감은 자신이 만들고 싶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실제로 이 자존감은 비 실체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왜 자존감은 스스로 만들지 못할까?  우선 이 질문부터 설명해보겠다.
 
이것의 원리는 매우 단순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어느 정도 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들 몸 속에 난 상처의 위치를 알고, 지금 어딘가 마음 속이 불편하다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는 짐작한다. 그래서 마치 스스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착각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꿈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최면술에 걸렸을 때나 술에 심하게 취했을 때 나타나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본질인 '무의식'을 거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인류는 그것이 궁금했기에,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정신 분석학이란 학문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 부었으나, 결론은 아직도 수 많은 물음표 뿐이다. 심지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정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것부터 확신이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린 자신이 내린 판단도 아닌, 타인들이 우리 자신에게 하는 말을 꽤나 귀담아 듣는다. 자신도 잘 모르는 것을 타인들이 잠시 살펴보고는 평가하는 것에 대해서 꽤나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수십 년간 바라봐도 몰랐던 자신을 단지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보고 평가하는 면접 관들의 모습이란 얼마나 어이없는 상황인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면접을 본 후 기분이 나빠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판단하고 난 후 그것이 전달되어 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꽤나 재미있는 표현 중 사람들이 화가 났을 때, '내가 누군 줄 알아?' 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이 질문이 재미있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도 모르는 것이 사람인데, 자신도 아닌 타인을 아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말을 앞에서 한다면, 같이 화를 낼 필요가 없이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주면 된다. '저는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걸요' 라고 말이다.
 
자존감은 그냥 타인들이 거의 의미 없이 스쳐가면서 한 말과, 살아오면서 경험한 많은 것들을 통해 얻어진 잘못된 경험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자존감은 절대 혼자서 만들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다. 이 모두가 타인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아주 쉬운 예로 부자 집이나 높은 권력을 가진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부터 주변인들에게 일반적인 아이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된다.
 
이 아이는 이 때 매우 쉽게 높은 자존감이 형성된다. 비록 그 자존감이 돈과 권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해도 아이는 그것을 알 리가 없다. 또한 이 아이가 커서 나이를 어느 정도 먹게 되면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미 그때는 자신이 가진 힘을 스스로 인식하면서 그것을 실체로 인정한다.
 
즉, 자신이 가진 자존감이 아무런 근거 없이 부모의 힘으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면서도, 현재 그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것이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자신이 가진 자존감은 매우 합당한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아니, 실제로는 이런 생각도 안 한다. 그냥 자존감이 높다. 그런데 이 자존감에 어떤 근거가 있을까?
 
어떤 착각을 하고 살든 상관은 없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모른다. 자신을 파악하지 못하고 살기 때문에, 자신을 어떤 상태를 가진 존재로 여기는 모든 생각은 착각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 중 하나인, 자존감은 일종의 환상이다. 그것은 형성시키는데 일조하는 타인들의 평가나 혹은 그 평가 중 일부를 채택하여 스스로를 정의하는 내부적 절차든 상관없이 모두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부자 집 아이가 아니고 권력자의 아이가 아니라고 해도 모든 이들의 자존감 역시도 이런 식의 원리를 기반으로 비실체적인 상태로 생성이 된다.

 

그럼 이젠 자존감이 왜 비실체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보자.
 
우리 인간은 서로 덕담을 나누길 좋아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서로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는 매우 일반적인 행동양식이다. 이것은 서로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의 칭찬을 받으면, 한 번의 칭찬을 해주는 것이 숨겨진 의무이다. 만약 여기에서 듣기만 하고 해주지 않는 사람은 서서히 인간관계가 말라간다.
 
이것은 마치 만날 때마다 서로 밥을 사는 것과 같다. 상대가 한 번 밥을 샀을 때, 내가 그 다음 사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인간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불균형이 지속되면 서서히 인간관계의 범위가 줄어든다. 우리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이것을 신경 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소위 입에 발린 소리를 살면서 자주 듣게 된다. 물론 그런 말을 잘하는 사람도 있고, 매우 어색해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잘 하지 않고, 자신이 진짜로 느낄 때만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실제로는 그만큼의 관심은 없다. 즉, 우리는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심지어 우리는 타인이 우리 자신에게 과도한 관심을 갖거나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느낄 때는 소름마저 끼친다. 우린 그런 행동을 스토킹이라고 한다.
 
우리가 보통 타인에게 관심 있어 하는 척을 하는 이유 역시도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비결이다. 실제로 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는 남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 관심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자신이 느끼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과연 실체적인가에 대한 의식적 판단을 거의 하지 않는다.
 
자존감은 마치 셀카와 같다. 많은 사람들은 수 많은 셀카를 찍는다. 특히 여성들일수록 그것이 더욱 더 심한데, 왜냐하면 여자들에게 있어서 외모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매우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셀카라는 것이 수만 장을 찍어도 정말로 마음에 드는 것은 겨우 한 두 장에 불과하다.
 
물론 실제로 이것을 건지기 위해서 그 많은 셀카를 찍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자존감은 다른 수만 장의 사진을 버려두고 마음에 잘 들게 나온 단 한 장을 통해 자신을 본질을 정의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한다. 그리고 그들은 입에 발린 소리를 하기도 하고, 그냥 스쳐가듯 한마디 하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의 느낌을 말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꽤나 진지하게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모든 행동과 말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행동이나 말을 의식적으로 할 땐, 상대의 마음을 얻고자 할 때나 혹은 상대와 인연을 끊고 싶을때 정도 일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가 되면 우린 무척 많이 긴장을 하게 된다. 혹시나 상대가 자신의 말을 오해하지 않을까,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어서 그 장면을 미리 많이 예상하고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 잘못되면 몸이 굳어지고 정신이 긴장이 되어서 실수를 남발하기도 한다. 물론 실수로 일어났다고 해서 모두 망쳐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우린 의식적이 될 때 의도하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흔한 예로써, 사람들끼리는 정말로 재미있고 말을 잘하는 사람을 수 많은 사람이 있는 장소에 데리고 가서 연설을 해달라고 하면 몸이고 정신이 온통 긴장되어 굳어버리는 것이다.
 
이때 이 사람이 굳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말 할 때는 몰랐는데,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될 때, 자신의 복장, 말투, 말할 때 버릇, 말의 내용 등등이 모두 신경 쓰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이지 않을 때가 편하고 행복하다. 그래서 많이 이들이 의식적이지 않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것은 마치 조건 반사처럼 사는 것과 같다. 의식적이지 않다는 것의 의미가 실제로 그것이다. 어딘가에 초대되어서 차려진 음식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와우 맛있겠다' 라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우린 그래서 보통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것에 매우 익숙하다. 혹시나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다음부터는 초대를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종합하면, 우리들 자신에게 들려오는 많은 이들의 평가는 모두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 반응이다. '예쁘다', '귀엽다', '잘한다', '훌륭하다', '대단하다', '멋지다' 등등 우리의 자존감을 올려주는 사람들이 말은 그저 겉으로만 이루어지는 조건 반사의 일부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셀카에서 잘 나온 사진처럼 소중히 저장해 둔다. 수만 번의 만남 중 들었던 마음에 드는 몇 마디를 기억 속에 넣어 두고는 그것을 자신의 본질로 여기는 것이다. 이 때 잘 나오지 못한 나머지 사진이나, 자신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 없음이나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는 다른 이들의 험담은 도대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듣지 못했으니 상관없는 것일까?
 
그리고 실제로 좋은 의견을 표시해준 사람들 역시도 대부분은 그저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그것에 대한 것은 책으로도 나와있다. 바로 처세술을 위한, 칭찬에 대해서 쓴 책들이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자존감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실제로 자존감은 우리 내부에 들어 있는 '자아' 즉, 에고의 간절한 희망이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에고는 자존감을 먹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자존감이 높아질수록 에고의 만족도가 높아서 행복하게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에고는 우리의 실체가 아니다. 단순히 생각해도 자존감 자체가 실체가 아닌데, 실체가 아닌 것을 가지고 행복을 느끼는 에고가 실체가 될 수가 없다. 에고는 단지 생명체로써 그 자신이 죽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는 것을 찾고 있을 뿐이다.
 
이런 면에서 존재감은 안전성을 담당한다. 자존감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해준다면, 존재감을 죽지 않아도 될 이유를 설명해준다. 즉, 자존감은 남들에게 죽지 않아도 될 이유를 강변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존재감은 남들에게 그 자신이 죽으면 안 되는 이유를 납득시킬 수 있다.
 
우리는 죽지만, 죽지 않기 위해서 자존감과 존재감을 갖는다. 이것이 에고의 본질이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우린 죽기 때문에 에고는 거짓이 되고 만다.
 
결국엔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평생을 걸쳐 죽음을 거부하다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죽는다는 것은 정말로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을 거부하는 것의 중심엔 자기 존재, 즉 자아인 에고가 있고, 그 에고는 바로 자존감을 통해서 삶의 가치를 그리고 존재감을 통해서 삶의 필요성을 증명 받고 있다.
 
그렇기에 생명체인 우리는 평생을 자신 그 자체라고 믿는 에고에 의해 행복을 느끼고, 불행을 느끼면서 결국 모든 조종을 당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에고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 표현은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에고가 그 자신일 때는 자기가 자신의 노예가 된다는 의미 없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거의 모든 사람들 예외 없이 에고와 존재가 완전히 일치한다.
 
그리고 이 말은 우리의 삶은 평생을 비실체적이고 근거 없는 에고를 위해 살면서 그것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단 한 번의 의심도 없이 수십 년을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인 행복의 기준점에서 봤을 때 에고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이 에고는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존재이다. 우리는 에고를 조절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에고는 끝없이 욕망을 드러내기 때문에 도대체 만족할 줄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해서 에고를 키우다간 정말로 에고의 노예가 되고 만다. 그래서 평생을 실체 없는 가치를 위해 삶을 낭비하고 만다. 그리고도 행복하지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특별한 행복의 기준으로 봤을 때, 에고는 행복의 방해요소이다. 우리는 에고를 버릴수록 더욱 더 행복해진다. 언뜻 보기에, 에고에게 가장 충성스러운 존재인 자존감은 행복을 위해서 필수적으로 필요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감은 버릴수록 더욱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이것은 자존감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버리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냥 단지 하나만 제대로 알면 된다. 화를 심하게 내는 사람일수록 내부적으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이다. 자랑이 심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이 비참하기 때문이다. 초라할수록 화려하게 꾸미는 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공통적인 습성이다.
 
자존감이 높다는 것은 바로 우리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의 증거가 된다. 그리고 이 집착은 양날의 검처럼 자신을 행복하게도 하지만, 언젠가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자존감은 낮은 것보다는 높은 것이 낫고, 높은 것보다는 없는 것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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