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내 안에 있는 나

아이루다 2014. 12. 15. 12:09

 
한 사람에 대해서 정의를 하려고 한다. 사람을 정의하는 방법은 아주 다양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해 볼 생각이다.
 
이 사람은 남자다 혹은 여자다. 이 사람의 나이는 몇이다. 이 사람은 현재 어떤 일을 하고 있다. 공부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직장에 다니고 있을 수 있다. 아니면 백수이거나 몸이 좋지 않아서 쉬고 있을 수 있다. 이 사람은 살림을 전담하고 육아를 하고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돈을 벌어서 경제적 역할을 담당하거나 육아의 대상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현재 얼마 간의 재산을 가졌으며, 살아가는 동안 정해진 돈을 벌고 쓰고 살 것이다. 이 사람은 다양한 통계 치에 각종 위치에 속해서 돈이 많은 사람일 수 있고, 자식이 많을 사람일 수 있고, 아주 특별하거나 아주 평범한 사람일 수 있다. 이 사람은 결혼을 했을 수도 있고 혼자 늙어갈 수 있다. 혹은 결혼을 했으나 사별이나 이혼을 경험했을 수 있고, 자식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자식에게 빌붙어 살거나 자식과 의절했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어느 대학 출신일 수 있으며, 초등학교도 못나온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열 개 국어에 능통할 수도 있고 한글도 제대로 쓰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고액의 연봉을 받거나 사업을 하여 큰 돈을 벌었을 수도 있고 최소 시급을 받고 살거나 그조차도 안될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도대체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너무도 그 속이 다 들여다 보이는 사람일 수 있다. 이 사람은 착하고 상냥하며 남과 잘 지낼 수 있으나 또한 나쁘고 불친절하며 남과 잘 못 지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탐욕스럽거나 욕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열정적이거나 의지박약일 수 있다. 이 사람은 부지런하거나 게으를 수 도 있다.
 
이 사람은 정직하게 사는 것을 옳다고 믿을 수 있거나 도박이나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것을 아무런 거리낌 없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사회 공공의 이득을 중요하게 여길 수 있으나 자신만의 이득을 위해 남의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사람은 수 많은 사람과 인연을 맺고 살 수 있으나 산속에 들어가 홀로 살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으나 이 사람은 인생은 결국 모두 돈으로 결론 난다고 믿을 수 있다.
 
이 사람은 용기가 있을 수 있거나 비겁할 수 있다. 이 사람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을 수 있으나 눈을 질끈 감거나 혹은 적극적으로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 사람은 남의 아픔을 보면 눈물을 흘릴 수 있으나 그 약점을 공격해 자신의 이득을 더욱 챙길 수 있다.
 
이 사람은 남을 위해 하는 일들이 행복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나를 위해 하는 일만이 오직 의미가 있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믿을 수 있으나, 아이는 자신의 삶에서 짐만 될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쓰다 보니 끝이 없어져서 이만 마무리 할까 한다. 그리고 잠시만 다시 생각해봐도 한 사람을 정의하는 것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좀 더 생각을 해보니 다른 질문이 하나 이어진다.

 

우리 인간은 정말로 이렇게나 다양한 존재들인 것일까?
 
이것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내가 그나마 자신 있게 안다고 자부하는 내 안에 있는 나를 바라보기로 한다. 일단 내 안에 있는 나를 보기 전에 내 밖에 있는 나를 정의하고자 한다.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일까?
 
나는 일단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까지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는 존재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나 아이는 없고 보통 사람과는 약간은 다르게 사는 스타일이다. 그것의 배경엔 시골에 있는 작은 집 한 채와 흔하지 않는 나의 취미 생활이 있고, 블로그에 잘 읽히지도 않는 글을 잔뜩 쓰는 특징도 있다.
 
나는 남자이며 그리 다정한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속 정이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 그것을 믿고도 있다. 나는 나름대로 정직하고 착하게 산다고 자부하면서 다른 이들의 그렇지 못한 것을 분노하고 비난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나는 전체적으로 보아서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냥 혼자서 먹고 살 정도는 되며, 남들에게도 그 정도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믿는다. 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괜찮은 머리를 가지고 세상을 나름대로 살만큼의 똑똑함은 가졌다고 생각한다 물론 특정 분야에서는 나름대로 경쟁력도 있다고 믿는다.
 
나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산다는 것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의 행복에 대한 많은 생각을 통해 일반적인 수준의 행복에 대한 기준점을 버리고 자신만의 행복 기준점을 마련했다고 가끔 생각하곤 한다. 물론 아주 가끔이지만.
 
나는 이제 나이도 꽤 먹었으며, 앞으로의 삶을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고 느끼고 있다. 또한 과거의 삶보다 미래의 삶이 더욱 나아질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있으며, 나이를 더 많이 먹고 경제적인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블로그의 글을 더욱 더 오래, 많이 쓸 것이라고 믿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책을 내보고 싶다는 욕심도 가지고 있다. 나는 내가 가진 장비들을 더욱 더 좋은 것으로 사서 좀 더 멋진 천체 사진을 찍길 바라고 있다. 나는 개와 고양이와 토끼를 키울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어떤 동물을 키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나는 미래에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너그럽고 욕심이 적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면 나를 외부적으로는 어느 정도 정의한 것 같다. 물론 훨씬 더 많은 것이 있겠지만, 지금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왜나하면 이것은 실제로 내가 아니가 때문이다. 이것은 그저 나의 내부에 있는 잘 보이지 않는 내가 밖으로 투영된 뿐이다. 그것도 매우 왜곡된 채로 말이다.
 

실제적으로 이 모든 것은 오직 내가 믿고 싶은 나일 뿐이다. 좀 더 냉정한 시선과 좀 더 깊은 생각을 통해 나를 좀 더 자세히 바라보면, 나는 슬프지만  작고, 겁 많고,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누가 나를 해치지 않을까 늘 주변을 살피고, 그런 자신의 비겁하고 용기 없는 모습에 실망하거나 좌절할 때마다 스스로를 절망적으로 느끼는 소심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 나는 가끔 의도치 않는 용기를 경험하거나 상황 파악을 못해서 남들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스스로 뭔가 뿌듯한 일을 해냈을 때 그렇게나 쪼그라들었던 것만큼이나 강한 반동으로 자부심이 솟구쳐 올라서 결국 그것을 가지고 틈만 나면 남들에게, 그것이 원래 나의 본래의 모습인 것 마냥 이야기 하기 바쁘다.

 

겸손해 보이려고 한 말이 아니라, 진짜 그렇다. 내가 하는 많은 말은 모두 내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떠들고 있을 뿐이다. 단지 나는 그것을 다른 이들이 잘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서 표현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을 만나서 떠들 때, 나는 즐겁고 행복함을 느낀다. 그런데 이것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거의 모든 친목 목적의 모임에는 누구나 나처럼 자신의 본질인 비겁하고 겁 많은 존재가 아닌, 뭔가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인정 받는 자리이다.

 

모임에 참가한 우리들은 돌아가면서 그것을 극복한 듯 보이는 사례들을 이야기 하고, 그것을 듣는 다른 사람들은 약속 한듯이 그것을 진짜로 그 사람의 본 모습인 냥 고개를 끄덕여주거나 편을 들어주는 자리이다. 만약 그렇지 않는 사람은 다음 모임에 초대받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인간이 수다 혹은 대화 그리고 다른 인간과 만나서 행복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이렇게 꾸준히 맺어진 인연은 훗날 어떤 이득까지도 준다. 그것은 고급 정보일 수도 있고, 원하던 취직 자리일 수도 있다. 물론 이건 옵션이다. 중요한 것은 당장 행복하다. 그래서 여자들은 평상시에 만나서 수다를 떨고 남자들은 점잖은 척하다 술만 먹으면 엄청나게 말이 많아진다. 누구나 대화를 통해 행복해 한다.

 

여자들은 주로 남을 깍아내려서 자기보다 낮게 만들어서 행복해 하고, 남자들은 주로 자신을 자랑하여 남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자부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를 만나면 행복하다. 남자의 자랑을 들어주는 것은 다른 남자들이 아니다. 여자만이 남자의 자랑을 들어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사람 속에서 살아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미리 정하진 않았고, 학교에서 배운 적도 없지만, 누구나 알고 있는 암묵적으로 맺어진 약속이다. 우리가 이것의 요령을 아는 이유는 바로 살아오면서 이렇게 하지 않으면 왕따가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의 중요성을 정말로 깊게 인식하고 배운다. 우리는 그래서 솔직함이 가져오는 문제점을 모두 다 잘 알고 있다. 우린 솔직과 정직을 좋은 덕목으로 알고 있지만, 누구도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진정한 의미의 솔직함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그럴 듯 하게 대꾸해준다. 그리고 이렇게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용감함과 가치 있음을 인정 받은 우리는 모두 즐거운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정말로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런 경험을 하는 순간은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할 수 있기에 우리는 이젠 기술 발전로 인해 더 자주, 더 쉽게 이런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젠 24시간 동안 자신이 원하는 시간이라면 언제든지 이것을 자랑하고 확인하고 증명 받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젠 꼭 만나지 않아도 전화로, 채팅으로, 페북, 카스를 통해 정말로 손쉽게 그것을 할 수 있다. 실제로 더 자주하지만 효과는 더 좋다고도 볼 수 있다. 돈도 안들고 시간도 별로 안들며 '좋아요' 버튼은 직접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말을 해주는 것 보다 훨씬 간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라도 혼자 남게 되면 우리는 또 다시 금새 겁 많고 비겁하고 눈치를 보고 사는 본질적 자신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우린 혼자 있는 시간을 외로워하고 심심해하고 두려워해서 결국 싫어하고 불행하다고 여긴다. 덕분에 우리의 삶은 '혼자 있지 않는 것'이 목표가 된다. 그리고 세상에 나오는 많은 제품들은 모두 혼자 있지 않게끔 느껴주는 것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자아, 즉 에고가 존재한다. 에고는 나약하고 겁이 많으며 항상 두려움에 떤다. 그런데 그렇기에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의지가 있고, 용감하고, 두려움을 극복한 것 같은 상태를 착각으로 경험할 때마다 어디엔가 떨면서 숨어 있던 에고는 금새 튀어 나와서 이것을 아주 과장해서 자신의 본질이 변한 것 마냥 으스댄다.
 
그래서 비겁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용기 있는 척 한다. 채워진 것이 없을 수록 우린 겉을 화려하게 채운다. 한 일이 없을수록 말이 많아진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수록 그것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행복하지 않을수록 행복한 척을 해야 한다. 돈이 없을수록 비싼 것을 사야 한다. 나쁜 마음이 많을수록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착한 척을 해야 한다. 그래서 사기를 칠 땐 후줄근한 옷보다는 말끔한 신사복이 좋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다. 그런데 우린 겉에 걸친 비싼 양복처럼 뭔가를 가졌다고 믿는다. 실제로 에고는 너무도 나약하고 비겁하고 두려움을 쉽게 느껴서 도대체 무엇인가를 가질 방법이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인 신나는 파티장이라도 총을 든 사람 하나만 있으면 금새 지옥처럼 변한다. 우리 삶은 이렇듯 신나는 파티장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총을 든 단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상태일 뿐이다.
 
우리 안에 있는 에고는 이렇게 늘 죽음을 두려워하며 산다. 그렇지만 이 에고는 반드시 우리에게 필수적인 존재는 아니다. 이것은 그냥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 키운 것뿐이다. 그리고 어떤 노력에 따라서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가지고 싶어 했던 것들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런 가치들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진심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허수아비와 사자와 양철 나무꾼이 가지고 싶어 했던 것들과 같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갖고 싶은 것이 자신에게 없다고 믿었기에 자신들이 원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조금은 용기 있고, 조금은 에고의 본질적 모습보다는 낫다고 믿고 산다.
 
그래서 우리는 변할 수 없다.
 
변할 수 없는 에고 덕분에 우리는 자신의 삶을 끝없이 에고를 만족시키기 위해 헌신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좋은 것과 더욱 더 많은 것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이들의 칭찬에 기분 좋아하고 다른 이들의 비판에 기분 나빠한다. 그것의 비중에 따라서 에고는 안정화 되기도 하고 불안정 상태로 지내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에고가 나름대로 만족되어 안정된 상태를 '행복' 이라고 부르고, 반대로 불만족스러운 해서 불안정한 상태를 '불행'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행복과 불행은 온통 남의 입에서 온 것뿐이다. 아무리 길에서 주은 특이한 돌이 마음에 무척 들어도, 모든 사람이 그 돌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면 결국 그 돌을 버릴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개똥이 쓸모 없다고 느껴도 모든 사람이 개똥은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면 개똥은 소중한 가치가 될 수 밖에 없다.
 
내 안에 있는 나는 이렇듯 어리석기가 끝이 없고, 나약하기가 한계가 없다. 거기에 무엇보다도 겁이 너무도 많다. 내 안에 있는 나는 죽을 가능성이 조금만 줄어들면 한없는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나는 돈을 벌고,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좀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고, 좋은 차를 사고,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있는 배우자를 만나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를 키우고, 옷을 잘 입고,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음악을 잘 평가할 줄 알며, 글을 잘 쓰는 자신에 매우 만족해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나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고 있을 뿐이다. 우린 행복하면 더 오래 산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다. 그냥 원래 그렇다. 우리가 행복하고 싶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결국 더 오래 살기 위해서 에고에게 끝없이 먹이를 던져주지만, 나는 결국 죽는다. 내 안에 있는 나는 나를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다가 결국엔 도망쳐버리고 만다. 그리고 결국 혼자 남은 나는 정해진 운명대로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에고가 마지막까지 남아서 사후 세계를 약속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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