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식의 단계

아이루다 2014. 12. 12. 07:06

 
'인식' 이란 단어가 가진 의미는 어떤 것을 알아채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것은 사전적 해석은 아니다. 실제로 사전에서 어떻게 해석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설명만 해도 인식이란 단어에 대한 대략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대상을 접하거나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많은 방법을 통해서 정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 오감이 담당하는 영역으로 알려져 있다. 인간의 감각기관, 아니 모든 생명체의 감각기관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정보는 뇌에서 해석이 된다. 이때 사용되는 것은 유전자에 새겨진 원초적 정보와 살아오는 동안 쌓인 경험 및 기억이다.
 
이런 인식의 과정을 보면, 결국 인식은 우리가 외부 세계를 내부 세계로 받아들이는 절차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인식은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절차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결국 우린 인식을 통해서만 외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잘못되면 정말로 엉뚱한 착각을 하게 되어 잘못하면 죽음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칼을 바나나로 잘못 인식하여 먹게 되면 죽는 것이다.
 
아무튼 이 인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서 지나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듯 중요한, 인식이란 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작동할 것처럼 느껴지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인식은 크게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식의 종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인식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며, 상위 단계는 하위 단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편의상 이 글에서는 이 세 단계를 각각 '무의식', '각성', '초월' 이란 명칭으로 칭하겠다.
* 어떤 학문적인 검증을 받거나 혹은 정확한 의미를 가진 표현은 아닙니다. 대략 각 단계의 특징을 기술한 단어 선택입니다
 
인식의 첫 번째 단계인 '무의식' 은 거의 모든 생명체의 공통적 특징이다. 우린 이것을 본능이라고 하고, 우리가 스스로 의식이라고 믿는 것을 포함한 실제적 존재의 주체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길을 걷다가 아름다운 여자를 본 남자나, 예쁜 꽃을 본 아이나, 발 밑의 구멍을 발견한 행인 모두 그것을 보려고 의도해서 본 것은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우리가 의도하든 않든 끝없이 외부 정보를 받아들인 후, 그것을 우리의 신경망을 통해 뇌로 전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보가 입력되었을 때, 우리 의식이 그것을 처리하느냐? 아니다.
 
실제로 그것을 처리하는 것은 무의식이다. 그리고 그 중 아주 극히 일부만을 우리 의식이 감지한다. 하지만 우린 의식을 통해서만 스스로를 느끼기에 마치 우리의 존재는 의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물론 우리는 가끔 의식적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생각에 빠지거나, 무엇인가에 집중하거나, 재미난 일을 하거나, 아주 행복한 상황에 놓였을 때 우리는 무의식적이다. 우리는 그럴 경우, 그 자체를 인식하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린 그것이 끝난 후, 그것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 때 실제로 그것을 인식하게 된다.
 
정말로 재미난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우리가 영화를 보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한다. 우리는 그때 영화 속에 빠져 주인공과 동조되어 마치 그들 중 일부인 냥, 영화 속 내용을 보고는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하고 행복해 하게 된다. 만약 이것이 제대로 안되면, 그 영화는 재미가 없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해 인식을 하는 상황은 바로 영화가 끝난 후이다. 영화관의 불이 켜지면 그때야 영화 속에서 빠져 나와서 관객으로써 영화를 봤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영화의 줄거리와 장면을 머리 속에서 거꾸로 되감아 집에 가는 길 내내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과정 역시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즉, 기억을 해야지 하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어떤 모임에 참석 했다면, 그것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 했던 행동이나 나눴던 말들이 생각나게 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엔,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그땐 몰랐는데, 어떤 특정인의 행동과 말로 인해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결국 우리가 믿고 있는 의식적인 것이라고 해도 스스로 의도할 경우는 매우 드물다. 우리의 머리 속은 마치 끝없이 펼쳐지는 수 많은 의식의 흐름 중에서 아주 일부를 잠시간 선택하는 경우처럼 작동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보통 분명히 호흡을 하고 살아가며, 언젠가 죽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호흡을 하기 때문에 살 수 있으며 또한 언젠간 반드시 죽는 존재라는 점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
 
어떤 면에서 삶 자체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머리 속에 문득 무엇인가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을 어떻게 먹을지를 고민하지, 왜 그것이 먹고 싶은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을 생각할 경우도 있긴 하다. 그때는 그것을 먹고 싶으나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 때 차선책으로 선택한다.
 
그리고 그때 역시도 본질적인 질문이 아닌, 자신의 먹고 싶은 욕구를 스스로 잠재우려는 목적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이것은 삶 전체로 확장된다. 산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질 않는다. 그냥 어떻게 살 것인가에 집중하면서 살아간다.
 
세상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단계에 머무른다. 그런데 이들 중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왜' 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어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 말로 '나는 철수를 사랑한다' 라는 표현이 있다고 치자. 그런데 평생 우리나라 말만 접한 사람은 이 표현에 대해서 그 어떤 의문을 표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어떤 다른 표현을 접하지 못하기에 그 자신이 철수를 사랑할 때, 이것과 유사한 다른 한글 표현만을 떠올릴 뿐이다.
 
하지만 영어나 일본어 중국어를 접하게 되면 이것은 완전히 달라진다. 영어로 'I love 철수' 라는 표현을 접한 사람은 이젠 본격적으로 '왜' 라는 질문을 갖게 될 기회를 맞는다. 우리나라 말은 목적격이 중간에 나온다. 반면에 영어는 목적격이 제일 끝에 나온다. 여기에서 '철수를' 이란 말이 목적격이라고 불리는데, 한글 표현과 영어 표현을 보면 실제로 그렇다.
 
실제로 목적격이라고 부르는 말조차도 두 가지 이상 언어가 비교될 때 의미 있다. 우리가 한글만을 사용하며, 그 외의 어떤 언어를 접하지 않을 때는 이런 분류도 무의미하다. 그냥 배운 데로 쓰면 그만이다.
 
인식의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이렇게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을 바라보다가 또한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타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을 재평가 하게 된다. 이것은 아무 생각 없이 평생 한글만을 쓰다가 우연히 영어를 접하게 되어 언어가 단 하나만이 있지 않음을 알게 되어 결국 자신이 쓰는 한글에 대해 재인식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말로 많은 자신 이외의 존재와 접하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모두 우리들 자신에 대한 재인식을 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 인식이 자신의 경험과 기억을 기반으로 이루어진다면, 당연히 모든 사람은 각자 다른 인식 작용을 하고 있는 셈이 된다. 동일한 사건이나 환경에 대해서 나 자신의 인식과 타인의 인식이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의미는 이젠 본격적으로 자신의 인식을 의심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래서 이 때 '왜' 라는 질문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온다.
 
오늘 눈을 떠서 하루를 사는 사람들은 오늘 왜 자신이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두 사람이 어떤 사고를 당해 같은 공간에 갇혀 있을 때, 둘 중 하나만 살아날 수 있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생각할 기회를 맞게 된다.

 

왜 상대보다 내가 살아야 하지? 이것은 매우 본질적인 질문이지만, 보통 이런 상황을 경험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그렇지만 어떤 기회로 인해 그런 생각을 하시 시작한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를 의심하시 시작한다. 결국 스스로 '나는 왜 존재해야 하느냐' 를 질문하고 그 답을 찾지 못해서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즐거운 시간이 아니다. 행복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어울리면서 아주 가끔 이런 '왜' 라는 질문을 떠올리다가도 금새 지워버린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코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질 않길 때문이다. 차라리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땐, 그냥 종교를 갖고 그것을 통해 해결해버린다.
 
종교는 적어도 존재의 이유에 대한 답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마다 매우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종교는 답을 준다. 거기에 더해서 죽음 이후의 세상까지도 보장해준다. 무의식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만큼 좋은 해답은 없다.
 
하지만 이 두 번째인 '각성' 의 단계로 자신도 모르게 올라 온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해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에게는 종교조차도 '왜' 종교가 존재하는가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처럼 쉽게 종교를 믿기가 힘들다.
 
실제적으로 보면 '무의식' 단계나 '각성' 단계는 그리 차이가 없다. 왜냐하면 각성 단계로 올라 섰다고 해서 질문만 생겼을 뿐, 답을 찾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간 철학자들 모두는 이런 각성의 단계로 올라 선 사람들이었으나, 대부분은 그냥 그 단계로 끝난다. 그리고 그때까지 자신이 한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그럴듯한 책을 한 권 써낸다.
 
그런데 그것만 해도 무의식에 머무른 사람들이 보기엔 매우 대단해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위대한 인물로 뽑히기도 하고 이런 이들의 말이 대다수의 무의식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럴 경우라고 해도 무의식 중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그것조차도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고 만다.
 
무의식과 각성은 결론은 비슷하지만, 상태적인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큰 차이가 하나 존재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앞과 뒤만 존재하는 1차원 공간에 사는 존재는 앞, 뒤, 좌, 우가 있는 2차원을 상상조차 못한다. 또한 2차원에 사는 존재 역시도 3차원의 존재에 대해 상상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1차원의 존재와는 달리 2차원의 존재는 자신이 1차원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자신보다 한 차원 더 많은 3차원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다.
 
이것이 바로 무의식에 비해서 각성 단계가 가진 절대적 차이점이다. 무의식은 각성이란 단계가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신을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무의식 상태를 벗어난 다른 단계가 있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다. 단 한 차례도 다른 차원을 경험하지 못한 1차원의 존재가 2차원은 고사하고 어떻게 차원이란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영어를 접한 적이 없이 평생 한글만 쓴 사람이 혹시 다른 형태의 언어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주를 접한 적이 없던 과거 사람들은 지구가 하나의 행성이며, 이 우주엔 상상할 수 없이 많은 지구와 같은 행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인식도 마찬가지다. 인식의 가장 밑단계인 '무의식' 상태에 있는 존재는 그 위의 인식 단계가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그리고 인식의 중간 단계인 '각성' 단계에 있는 이들은 자신의 밑 단계를 바라보면서 자신보다 상위 단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할 수만 있다. 그리고 인식의 최상위 단계인 '초월'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인식의 마지막 단계인 '초월'은 그 단계가 실제로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 이것은 온전히 이 글을 쓰는 개인적인 관점인데, 왜냐하면 나 역시도 이 단계에 대해 그 어떤 경험적 판단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것이 있다는 글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혹시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만을 할 뿐이다.
 
아마도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들 중 니체만이 이 존재를 유일하게 언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짜라투스트라' 를 통해 초인을 정의했고 이 초인이 바로 지금 말하는 초월의 존재를 상징하고 있다.
 
무의식이 인식 전의 상태라면, 각성은 인식의 진행 상태이며, 초월은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 된다.
 
무의식은 자신의 인식이 오직 자신만의 경험이란 것을 알지도 이해하지 못하며, 현재 자신이 느끼는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절대적으로 이해하는 수준이다.

 

무의식 상태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는 보통은 어떤 좋지 않은 일을 통해서 자기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좋지 않은 일인 이유는, 보통 사람이란 존재는 나쁜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의 이유를 찾기 때문이다. 우린 행복할 땐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각성은 자신의 인식이 상대적이며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이 어쩌면 거짓된 것이란 의심을 하고 있는 수준이다.

 

각성 상태에 있던 이들 중 정말로 극히 일부는 그 다음 단계로 가는 아주 작은 힌트를 얻어서 그것을 향해 평생을 노력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스님들이 그것의 가장 흔한 예이다. 그분들은 삶의 문제를 느끼고 각성을 한 후, 초월의 단계라는 부처의 세계로 가고자 한다.

 

초월은 이런 개인적 인식을 벗어나 인식 자체가 전체로 확장되고 통합되는 단계로 '알려져' 있다.
 
인류 역사에는 그 자신이 초월의 단계로 올라 섰다고 알려진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성인으로 꼽히는 인물들이며,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사람들도 몇 명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모호성이다.
 
실제로 이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간다. 3차원의 존재가 1,2 차원의 존재에게 부피의 개념을 설명할 때, 과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다른 존재의 설명을 듣고 그것을 상상하다간 정말로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초월적 단계로 올라 선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 단계에 대해서 그 밑의 무의식과 각성 단계에 놓인 이들에게 제대로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이들이 찾은 수단은 모호한 비유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이 모호성 덕분에 그들이 말하고자 한 뜻이 듣는 이들로 하여금 심하게 왜곡되고 마는 경우가 대다수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추가적인 문제는 그 초인들 역시도 정말로 인식에 갇힌 단계를 제대로 벗어 났는지를 알 길이 없다는 문제도 있다. 그것은 그 초인들 스스로가 착각에 빠졌을 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그래도 각성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 번째인 초월 단계에 올라간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을 믿거나 혹은 의심하는 태도로 바라볼 수는 있지만, 문제는 인식의 첫 단계, 즉 무의식의 단계에 있는 이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단계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마치 1차원에 있는 존재가 2차원, 3차원을 상상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수준에 머물기에 우리들 대부분은 실제로 인식에 대해서 단어적인 이해만 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는 자신은 인식이란 것을 하고 사는 존재라고 의심 없이 믿고 평생을 산다.
 
그래도 아주 가끔 각성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나 초월 단계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뭔가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하고 살아갈 뿐이다. 그나마 그럴 경험이 전무한 개와 고양이에 비해서는 나은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것도 아니다.
 
고양이와 개와 돼지는 자신이 행복 할 때 '나는 왜 행복할까' 를 인식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 역시도 자신이 행복할 때 스스로가 왜 행복한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을 생각하는 순간 각성이 일어나고 그때 두 번째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보통은 왜 행복한지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해서 더 행복해지지 않는다. 괜히 더 머리만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아주 가끔 각성이 일어나긴 하지만 보통은 대부분 바로 다시 원 위치로 되돌아가 간다. 그리고는 머리 속 한 구석에 그 아주 가끔 느꼈던 각성의 순간을 기억하고는 무엇인가 자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유 모를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간다.
 
각성을 통해 두 번째 단계로 올라 선 사람들 역시도 크게 다를 바 없다. 이들은 단지 인식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차이는 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아예 상상도 못하는 것과 그것이 틀렸다고 해도 상상은 할 수 있는 것은 큰 차이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보면, 결국엔 이 모든 문제를 끝내는 것은 바로 인식의 마지막 단계인 초월의 단계로 올라서는 경우가 된다. 하지만 이 단계는 글을 쓰는 개인적인 관점에서도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것으로 결국 상상만 하게 될 뿐이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설명할 수가 없다.
 
어떤 경우엔 무의식 단계의 존재가 각성 단계를 거치지 않고 초월의 단계로 바로 넘어가기도 한다. 차라리 이것은 각성의 단계에 있던 이가 초월의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보다 더 높다. 왜냐하면 자꾸 왜냐고 묻게 되는 것은 초월로 가는 길에 대한 무한대의 의문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래서 합리주의에 기반한 서양 철학은 대부분 각성에 머무른다. 반면에 합리주의와 반대 의미로 사용되는 신비주의에 쌓인 동양의 철학은 서양의 그것보다 훨씬 더 초월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인다.
 
원래 각성 단계는 참 애매한 단계이다. 일단 의심을 하기 시작했는데, 답은 찾지 못하는 상태인 것이다. 어떨 땐 차라리 아예 시작을 안 하는 것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이미 자신이 가진 모든 가치에 대해 의문을 가졌기에 행복하기도 힘들고, 답을 찾지 못했기에 또 불행한 상태이다.
 
이 세상의 많은 철학자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의 유일한 탈출구는 오직 이런 분리되고 찢어진 인식을 통합하고 결국 뛰어 넘어서, 초월의 단계로 올라서는 방법 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이 초월의 단계조차도 의심하고 있기에 결코 이 경험은 쉽지가 않다.
 
경험한 것 조차도 의심하는 상황에서 경험도 하지 못한 것을 절대적으로 믿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차라리 경험한 것도 절대적으로 믿고 경험하지 않는 것도 누군가 그럴 듯 하게 말하면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무의식의 상태에 있는 이들에게 훨씬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주변의 모두가 가난해서 가난하다는 말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와, 부자를 알기에 가난하다는 것을 아는 자와, 부자는 모두 다르다.
 
무의식은 가난한 자이며, 각성은 가난하지만 부자 친구를 아는 것이며, 초월은 그냥 부자일 뿐이다. 이 중에서 가장 불행한 자는 부자 친구가 있는 가난한 자이다.
 
각성 단계의 유일한 희망은 초월에 대해 알고는 있기에 평생 노력하면 어쩌면 도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그것은 평생 열심히 돈을 벌면 부자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믿음과 같다. 이것은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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