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발에 맞는 신발

아이루다 2014. 12. 10. 20:46

 
신발이 발에 잘 맞는다면, 발의 존재를 잊는다.
 
전체 글은 이것 말고도 어느 정도 길이를 가지고 있는데, 그 내용을 파악하기에 가장 핵심적인 문구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부분만 따왔다. 찾아보니, 이 글은 원래 장자의 달생편에 나오는 문구 중 일부라고 한다.
 
단순한 표현이지만, 이 말은 삶이란 여정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핵심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삶에서 과연 우리가 무엇을 간과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어떤 의미에서 보면 진정한 의미의 경구가 될 것이다.
 
이 문구는 크게 두 가지의 상반된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부정적 의미에서의 해석이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인지한다는 것은 바로 그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숨을 쉬다가 숨이 콱 막히고 가슴이 답답한 순간, 우리는 산소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우리 생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산소는 1년, 10년 100년을 살아도 느끼지 못하다가 물 속에 빠진 지 단 10초만에 우린 그것의 존재를 맹렬하게 느끼게 된다.
 
같은 원리로 발에 익숙해 편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우리는 신발과 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새로 산 신발을 신었을 때, 그것이 잘 맞지 않아서 발이 아프다면 우리는 걸어가는 내내 신발과 발의 존재를 생각할 수 밖에 없다.
 
이 원리를 확장하면 이런 가정이 나올 수 있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 역시도 수 많은 행복에 관한 글을 써 왔는데, 그 이유가 바로 내 자신이 그리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자신의 행복에 대해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도 그리 관심을 갖지 않는다. 충분히 행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거나 정의 내리려고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행복이 실제로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우리가 행복에 대한 생각과 말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지금 그 자신이 행복하지 않기에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말이 나오고 글이 써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행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말과 글을 듣고 보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행복하지 않기에 듣고 본다.
 
두 번째 긍정적인 해석은 바로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간다는 것이다.

 

신발이 발에 잘 맞는 것은 순리이다. 만약 신발이 발에 잘 맞지 않으면, 우린 고통을 느낀다. 그리고 그런 경우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 신발을 새로 사거나, 신발을 발에 맞추거나 혹은 발에 신발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효율적이고 적절한 노력을 해도 원래 신발이 발에 맞을 때보다는 나을 순 없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한다. 실제로 이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삶이라고 부르는 과정 그 자체이다. 우리는 작거나 크거나 혹은 단기적이거나 장기적인 아주 다양한 형태의 수 많은 목적을 매일 매일 정하고 그것을 제 시간 내로 제대로 이루기 위해서 말과 행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노력이란 것은 좋은 뜻으로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반대로 노력이란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게 무엇인가를 억지로 하는 것이란 말로 해석될 수도 있다.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은 순리이다. 즉, 자연의 이치이다.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봐도 중력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 위에 배를 띄우고 물이 흘러가는 데로 맡겨두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낮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곳에 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우 열심히 노를 저어야 한다. 이것을 역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순리의 반대가 되는 역행은 매우 큰 힘을 들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 정하는 수 많은 목표들은 모두 이 역행의 일부이다.
 
언어적 표현이긴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보다 높은 목표를 정해야 한다고 배운다. 즉, 우리는 더욱 더 힘들게 역행을 해야만 삶을 제대로 산 것이라고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을 때, 우리는 좀 더 풍족하고 좀 더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다.
 
반대로 아무런 목표를 정하지 않고 흘러가는 데로 사는 사람은 거지가 되기 십상이다. 그리고 거지가 되었을 때, 그는 게으름의 증표가 된다. 물론 대부분의 거지는 그것이 맞다.
 
그래서 장자는 잘못 해석되기도 한다. 장자의 사상은 거지의 자위처럼 느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거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밥을 빌어 먹으면서 나는 욕심도 없고 욕망도 없으며 구름이 흘러가는 데로 살아간다고 믿고 산다면 그것을 과연 누가 인정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실제로 장자는 거지의 가치관이 아니다. 장자의 사상은 놀랄 만큼 본질을 꿰뚫고 있다. 그럼에도 그가 오해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 속이 이미 욕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본다. 우리는 누구도 객관적으로 다른 이를 평가할 수 없다. 소위 평가한다는 말 자체가 바로 어떤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고, 그 기준점은 모두 자신의 머리 속에 들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가장 흔한 거짓말이 바로 '객관적으로 말해서' 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시선이 삐뚤어져 있는데, 장자의 마음이 제대로 보일 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오해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볼 기회가 있는 사람들은 장자를 위대한 성인으로 꼽는다. 실제로 장자는 그 어떤 이들보다 높은 단계에 도달한 인물이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사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운동을 한다.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것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더 불행한 일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일도 하는 존재처럼 착각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모든 순간에 선택을 해야 할 때, 모두 똑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좀 더 나은 것을 선택하려고 한다. 100원짜리 동전 중 하나 집을 때도 좀 더 빛나는 것으로 고르는 것이 사람의 천성이다.
 
그런데 이 행복은 어디에서 올까? 행복은 바로 만족감으로 통해서 온다. 우리는 기대와 만족을 통해 행복을 선물 받는다. 그것은 정신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체적인 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섹스를 할 때 모두 만족감이 밀려온다.
 
그리고 이 만족감은 당연히 기대치를 기반으로 한다. 또한 만족감은 결과를 기대치로 뺀 차이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아주 결과가 흡족하더라도 이미 그것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단지 당연한 것일 뿐이다. 반면에 기대치가 전혀 없었던 일이 우연히 이루어졌을 때, 우리는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동일한 결과에 대해서 기대치가 낮을수록 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기대치를 아예 없는 수준으로 낮출 수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강렬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장자의 말씀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힌트이다.
 
순리는 바로 이것이다. 순리는 기대치를 갖지 않는 것이다. 순리는 목표를 정하지 않기에 기대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목표가 없는데 어떻게 기대치라는 것이 생길 수 있을 것인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은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원래 그럴 뿐이다. 세상에서 누구도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기대' 를 하지 않는다. 목표로 하지도 않는다. 자연스럽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며, 우린 자연스러울 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언제나 건강할 것이란 기대치를 갖는다. 그래서 몸에 문제가 생기면 불행해진다. 우리는 단순히 감기와 같은 병에 걸려 몸이 조금 불편해도 불행하고, 다리를 자르는 등의 심각한 병에 걸리면 더욱 불행해진다. 우리에게는 정상적인 몸에 대한 기대치가 늘 존재하고 있기에 그렇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의 몸이 정상적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면, 우린 몸에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것을 불행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이것은 죽음에 대한 것으로도 확장된다. 우리는 오늘 살았으니, 내일도 살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하기에 본질적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 내일 살 기대치를 없앨 수 있다면, 즉 죽음에 대한 공포 자체를 없을 수 있다면 우린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공포의 근원이다. 그리고 우린 이 공포를 잊을 수 있는 순간마다 행복을 경험한다.
 
실제로 앞에서 말한 만족감의 정체가 바로 이것이다. 만족감은 바로 우리가 죽음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우린 우리 자신에 늘 존재하길 기대하고 그것의 가능성을 느꼈을 때 행복을 느낀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잔 때도, 좋은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때도, 부부의 사랑을 확인했을 때도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나 즐거움 등으로 착각하지만, 실제로 우린 그 순간마다 죽음으로부터 멀어졌기에 행복해진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죽음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래서 언제 죽어도 상관이 없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행복은 죽음을 잠시나마 잊었을 때나 혹은 죽음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졌다고 무의식 중에 이해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아예 잊은 상태라는 것은 일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행복이 된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이며 깨달음의 경지가 된다. 그리고 궁극의 환희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장자의 말씀과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생자필멸이라는 순리를 받아들인 결과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에게 죽음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다. 즉, 우리는 순리로써 자신의 죽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이해되었다고 해서 실제로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생명체에게 있어서 죽음은 타고난 본능이며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일명 임사 체험이라고 알려진, 잠시나마 죽음을 경험했던 이들 중에는 몸에서 분비되는 과도한 호르몬으로 인해 엄청난 행복을 느끼고는 의식이 돌아오는 경험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그것을 사후 세계로 증거로써 증언하기도 한다.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 상관없이 이들은 죽음을 다른 이들보다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삶의 태도는 이들의 이후 삶을 완전히 바꿔 버린다. 이들은 그래서 좀 더 평온해지고 좀 더 덜 욕망에 사로잡혀 살 수 있지만, 문제는 이들과 함께 하는 가족 등과의 갈등이 촉발될 수 있다. 즉, 주변에 어떤 이들은 이런 한 사람의 변화를 잘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떤 이들의 그 사람의 변화를 못 견뎌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변화는 인간의 본질적인 영역이 변화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던 평범한 인간이 죽음을 좀 덜 두려워하거나 아예 죽음 후의 삶을 기대하는 쪽으로 바뀌게 되면, 현생의 삶에 대해서 많은 것을 놓아버리게 되는 결과를 불러온다.
 
이것은 정체성의 변화이다. 따라서 이 임사 체험을 한 사람들은 이전과 이후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그렇다고 해서 해탈이나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선 것은 아니다. 이들은 과도한 행복 경험으로 인해 변형된 것이라 것이 더 맞는 표현이다.
 
하지만 이 증상은 바로 우리가 죽음을 받아들일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예가 되어준다.
 
산다는 것은 죽음의 반대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반대인 죽음을 받아들일 때 삶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아마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은밀한 비밀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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