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은 대부분 찌질하다.

아이루다 2014. 11. 16. 08:55

 
아이나 애완 동물들과 같이 있다 보면, 뭔가 하고 싶은데 제약된 상황에 놓였을 때, 그들은 보통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그것은 자신의 행동을 제지하는 사람의 눈치를 슬슬 보는 것이다. 생각보다 이것은 꽤나 지능적인 행동인데, 뭔가 먹고 싶은 것이 앞에 있는데, 부모가 못 먹게 한 아이는 딴청을 피우다가 슬며시 손을 그쪽으로 뻗는 행동을 하곤 한다.
 
이 때, 당연히 부모의 입장에서는 이런 아이의 행동이 너무도 뻔히 보이기에 웃으면서 안 된다고 그것을 제지하겠지만, 계속 반복되면 어쩔 수 없이 엄한 표정과 말투로 경고를 줘야 한다.
 
이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한 아이는 이젠 미련을 버리고 다른 것에 집중을 하려고 할 것이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그것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게 된다. 즉, 이것은 제어된 것일 뿐,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면 아이는 다른 욕망을 느끼는 것을 발견하고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을 쉽게 잊어 먹게 된다. 그래서 마치 쉽게 포기하는 듯 보이거나 혹은 변덕스럽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과연 이런 행동 패턴이 단지 아이와 애완 동물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다. 이 과정은 우리 인간이 커서 어른이 된 후에도 완전히 똑같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단지, 어른은 누군가의 명시적인 제제를 통해서 자신이 가진 욕망을 이뤄내는 것을 멈추지는 않는다. 우리가 가진 욕망은 대부분 능력이 된다면 늘 풀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어른이 되면 욕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요령을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런 요령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욕망을 직접적으로 들어낼 때,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바라 보게 될지에 대해서 배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자신이 다른 이들이 직접적으로 욕망을 드러낼 때, 그것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성인이 된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직접적으로 욕망을 마구 드러내면 결국 다툼과 갈등의 원인 되며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고 있다. 또한 많이 드러낸 욕망은 그 사람을 욕심이 많은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어, 다른 이들의 경계를 불어 온다는 점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때, 다른 이들의 적극적인 도움이나 호응을 얻거나 점수를 딸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욕망을 전체로 확장하려고 노력하고,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인식되게끔 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대의' 단어로 정의되는 행동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린 어린아이처럼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은 인간적인 면이나 혹은 능력적인 면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거나 혹은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즉, 이런 사람과 사귀어 봤자 손해만 보거나 혹은 별 이득이 안될 것이란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많은 이유들로 인해서 성인이 된 인간은, 자신이 품은 욕망을 최대한 은밀하게 실현해 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우리의 본질은 아이나 애완 동물의 그것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
 
또한 인지 능력을 가진 인간들은 이런 계산법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욕망의 교환 혹은 교체의 기법이다. 우리는 정말로 얻고 싶은 것을 위해서 그보다는 작은 손해를 감수한다. 사탕을 먹기 위해서 휴지를 쓰레기 통에 버리는 아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러 가지 욕망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다른 욕망을 제거시키기도 한다. 즉, 우리는 맛있는 식사를 먹기 위해서 집에서 쉬고 싶은 욕망을 버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다. 혹은 길거리에서 어떤 아이가 오뎅을 아주 맛있게 먹고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고는 먹고 싶지만, 참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아이의 엄마한테 한 대 맞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그 장면을 보게 되면 자신의 대한 평가가 많이 떨어지게 됨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의 작고 쉽게 포기할 수 있는 욕망 조차도 외부로 표현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쉼 없이 귀찮게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소위 말하는 '찌질하다' 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
 
하지만 누구도 다른 이들에게 찌질하다는 평가는 받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찌질함은 상대적이기에 우리는 찌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실현하기가 힘들다. 아이들의 찌질함은 눈깔 사탕 하나를 더 먹으려고 다투고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이 때 훨씬 더 능력 있는 어른의 눈에는 이런 아이들이 찌질해보이게 된다.

 

그리고 비슷하게 어른의 찌질함은 연봉이 1억이냐 2억이냐 가지고 서로 잘난 척하는 모습에서 나타날 수 있다. 이 때 하루에 1억을 버는 사람은 이들의 다툼을 보면서 그들이 그런 다툼이 찌질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나라 영화 감독 중에서 홍상수라는 분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란 제목을 가진 영화로 데뷔해서 지금은 꽤나 많은 분들이 이 감독의 이름을 알고 있을 것이다.
 
이 홍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찌질하다 이다. 그의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이나 혹은 주변 인물들을 보면, 정말로 찌질하다. 그들은 남의 먹을 것을 먹고 싶어하고, 쉽게 삐치고, 자신의 욕망을 주체 못해서 마구 표현한다.
 
그래서 이 감독의 영화를 보다 보면, 한 편으로는 재미 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씁쓸하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는 그가 만들어 낸 캐릭터를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영화에 나오는 배우들의 모습은 모두 우리들 자신의 숨겨진 모습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들과 다른 점 하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정말로 풍요하게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먹는 초코바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조난을 당해서 며칠을 굶었다면 금새 그 사람은 다른 이가 먹는 초코바를 한없이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만약 어떤 사소한 욕망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것을 언제라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성공하고 높은 자리에 오르면, 상대적으로 덜 찌질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런 위치에 가게 되면, 돈이 많기 때문에 대부분의 욕망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아주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해외 여행을 언제라도 갈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이라면 평생 한 번 할 수 있는 것들을 매일 하고 살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것은 자신이 가진 욕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보통 자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이 주인의 욕망을 알아서 대신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자신의 욕망을 잘 알아채서 미리미리 알아서 잘 처리해주는 밑의 사람을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실제 아부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보통 사람들은 아부를 잘하는 사람을 욕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대단한 계산 능력이다. 다른 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아내고 그것을 실현까지 해내는 능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쉽게 이룰 수 있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알아서 잘 해결해준다고 해서 그 사람의 욕망이나 찌질함이 없어진 것은 아니다. 단지, 이 사람의 경우엔 찌질함을 밖으로 표현할 필요가 더욱 줄어든 것뿐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뭔가 좀 더 근엄하고 여유로워 보이며 그 덕분에 뭔가 더 완성된 인간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중에 소수는 그것을 스스로 착각하고 책을 펴내기도 한다. 마치 자신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다른 세상에 살아간다는 듯 써 놓는다. 그리고 삶의 의지나 방향성에 대해서 그럴 듯 하게 써 놓는다. 그리고 그것을 읽은 독자들은 마치 그런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가진 찌질함은 아예 없는 뭔가 그럴 듯 한 삶을 산다고 믿게 된다.
 
그렇지만 이것은 완전한 착각에 불과하다. 차라리 그런 식으로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은 어떤 면에서 자신이 가진 욕망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해서 평생을 걸쳐 그것에 대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으며 산다. 그래서 자신이 어떤 문제를 가졌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결국 욕망을 제어하거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 아이 때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다가 죽게 된다.
 
그래서 가끔 보면 대기업의 회장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들이 소개되곤 한다. 단지 차이점이라면 돈의 크기가 일반 사람들에 비해서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차를 수집한다든가, 하루 밤 스키를 즐기기 위해서 스키장을 통째로 전세 냈다는 가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전해 오는데, 실제로 보면 아이의 욕망과 돈의 액수만 차이가 날 뿐이다.

 

그것은 장난감 자동차 시리즈 별로 모으거나 혹은 아이가 반 전체 애들을 데리고 가서 피자 집에서 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이것과 비슷하게 과거 유럽의 귀족들의 우아함이나 우리나라의 경우라도 양반의 여유로움이 가능했던 이유 역시도 바로 그들을 돌봐주고 그들의 욕망을 대신 실현해 준 하인이나 종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로 힘든 노동을 기반으로 하여 주인은 찌질하지 않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듯 인간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나이가 적고 많음에도 상관없이, 남녀 구분도 없이, 욕망을 가지고 있는 한, 모두 찌질할 수 밖에 없다. 그 욕망이 대통령이나 대기업 회장이나 심지어는 세계 정복이라고 해도 근본적인 찌질함은 모두 동일하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늘 찌질한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욕망의 노예로써는 늘 찌질할 수 밖에 없지만, 우리는 어려가지 경로를 통해 갖게 된 가치관에 따라서 좀 다른 삶을 살 수도 있다. 즉, 가진 욕망을 최대한 절제하고 줄인 후, 의지에 따라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의 방향을 일반 사람들과 좀 다르게 틀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이것이 안되더라도 단지 욕망을 어느 정도만 줄일 수 있다고 해도 나름대로 찌질함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정말로 없앨 수도 있게 된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그리 하고 싶었던 문방구 앞에 있던 오락 기계는 지금은 그리 안하고 싶어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것이 다른 종류로만 바뀌었지만 말이다.
 
우리가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는 이유는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인데, 만약 욕망을 실현하는 행복 말고 다른 경로를 통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우리가 좀 덜 욕망에 노예가 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다른 이들을 돕는 즐거움, 자연 속에서 느껴지는 감성, 지식과 진리를 탐구하는 마음 등이 그런 것들의 후보가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매우 개인적인 취향이라서 전체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욕망의 대체 수단을 찾지 못하는 한, 우리는 늘 찌질할 수 밖에 없다. 혹은 매우 크게 성공하여 비서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여 마치 그 찌질함이 없어진 것처럼 연극은 하면서 살 수는 있다.
 
사람은 돈과 권력과 섹스, 세 가지의 욕망에서만 멀어질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완성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긴 하다. 그럼에도 이것은 삶을 살아가는 방향을 설정하는 것에 있어서 힌트는 된다. 목표 지점이 어딘지를 알려주지는 못해도 어느 방향으로 출발해야 하는지는 알려주는 것이다.
 
좀 덜 찌질하게 살고 싶다면 말이다.
 

* 글을 쓰고 나서 보니, 찌질하다는 표현은 표준어가 아니라고 한다. 원래는 지질하다 라고 써야 한다고 하는데, 지질하다고 하면 의미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긴 하다. 이 단어를 쓴 것이 꽤나 오래된 듯 한데, 왜 아직도 표준어에 들어가지 못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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