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자부심

아이루다 2014. 11. 2. 07:14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여기는 마음'
 
이 설명은 자부심의 사전적 정의이다. 우리 인간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많은 종류의 것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가치관에 따라 이 자부심이란 것을 가질 수 있다.
 
자부심은 그래서 천차만별이지만, 어떤 자부심은 다른 이들의 공감을 쉽게 얻기도 하고 어떤 자부심은 남들에게 잘 인정을 받지 못해서 본인 스스로도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거나 혹은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의 편견에 대해 당사자가 심각한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생긴다.
 
아무튼 자부심은 사전적 의미로만 보면 참 좋은 것이다.
 
일단 인간의 가장 공통적인 자부심을 하나 꼽자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인간 자부심' 일 것이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우리 인간은, 인간이라는 생명체 그 자체에 대한 자부심을 자신도 인식하지 못한 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인간의 인간에 대한 자부심을 사전적 정의로 대입해서 해석하면 '우리 인간은 인간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여긴다' 라고 표현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그리 어색하지 않다.
 
우리는 인간이 문명을 통해 이룩해 낸 많은 것들을 보고 열광을 한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육체적 능력을 보면서 경탄을 한다. 또한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이룩해 낸 천재성을 보고는 존재 전체에 대한 우월성의 증표로 삼는다.
 
우리는 오래된 과거에 이루어 낸 거대한 건축물의 흔적을 보면서 그 위대함에 말문이 막힌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보편적 정서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하거나 모범적으로 희생적 행동을 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고귀한 감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인식하고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이런 당연한 행동들은 모두 우리 인간이 가치 있다는 정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인간을 가치 있어 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을 가치 있어 한다는 것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잘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인간 자부심' 이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 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자부심이 가지고 있는 숨겨진 문제점 역시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자부심으로 느낄 때, 실제로 거의 대부분이 자부심이라기 보다는 단지 다른 이들보다 낫다는 우월감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해 해야 한다. 그리고 우월감은 그저 열등감의 반발심일 뿐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동물들보다 우리가 뛰어나다는 우월감으로 통해 인간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70년 평생을 도자기만을 만들어 온 어느 노인의 도예에 대한 자부심은 보통 자연스럽게 인정이 된다. 우리는 이들의 기술을 꽤나 대단한 것으로 간주해주고 그것에 대한 대접도 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100년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평생을 그것 하나만을 쥐고 고집스럽게 살아 온 삶에 대한 박수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도예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 것이 정상적인 것일까? 좀 더 이 질문을 확장해서 우리는 무엇이든 70년 동안 하면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물론 그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이런 종류의 자부심은 기술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둑질을 70년 했다고 해서 도둑질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보통 잘 인정되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 만약 70년 도둑질을 한 사람이 열쇠 따는 것에 자부심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세상의 거의 모든 금고를 10분 안에 따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말이다.
 
가끔 어떤 영화를 보면, 사기를 예술의 수준으로 펼치는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영화 '캐치 미 이프 유 캔' 이란 영화에서 보면 디카프리오가 맡은 역할이 바로 그랬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지고 쉼 없는 거짓말을 통해 끝없이 사기를 치고 다니는 주인공은 결국 나중에 위조 지폐 감별사가 되었고, 지폐 위조 방지에 대한 특허도 냈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우리 보편적 가치관에 따르면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지만, 우리는 우리 인간의 일반적인 능력을 한참 벗어났다는 생각에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대단하다' 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주인공이 자신의 사기 능력에 자부심을 갖거나 혹은 위조 지폐 감별이나 혹은 그 위조 지폐가 어떤 식으로 위조가 되었는지를 알아내는 추리력에 자부심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 것인가?
 
우리는 또한 이런 대다수가 인정할만한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만 자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평범한 자부심을 경험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술자리이다. 우리는 늘 술자리에서 술에 대한 자부심, 즉 '술부심' 에 잔뜩 취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종류의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쉽다. 일단 이들은 자신보다 술을 못 마시는 이들에게 술을 강제로 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술을 잘 못 먹고 곤혹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매우 즐거워한다. 이런 모습이 바로 평소 가졌던 열등감을 기반으로 한 우월감이며 또한 잘못된 자부심의 흔한 예이다.
 
이런 종류의 자부심은 정말로 많은 분야에서 나타난다. 우리는 직업으로 삼아서 자신이 남들보다 잘하는 일에도 자부심을 갖는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하는 이들은 컴퓨터를 잘 다룬다는 자부심을 갖고, 컴퓨터 조립을 하면서 사는 이들은 컴퓨터 부품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직업뿐만이 아니다. 취미를 즐기는 곳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그래서 각종 자칭 전문가가 나타난다. 무기에 빠진 이들은 전쟁 전문가가 되고,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생존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또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광학이나 렌즈 전문가가 된다.
 
이렇듯 어떤 한 분야를 전문가 수준까지 공부한 사람은 모두 그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일반인들이 보기엔 이들의 정보 수준은 대단하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도 모르게 우월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우월함은 바로 자부심으로 연결이 된다.
 
이런 종류의 자부심은 술에 대한 자부심처럼 생각지도 못하는 곳에서 나타난다. 맛 집을 많이 아는 사람은 그 정보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지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어떤 장소를 빠르고 잘 가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진다. 우리는 누군가 어떤 능력에 대해서 '오우~' 라는 반응을 해주는 경험을 하면 할수록 그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다.
 
이 자부심은 정말로 별 것 없는 영역에서도 나타나는데, 그것의 이유가 바로 우리 인간이 정말로 많은 종류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것에 가치를 가지면 그것에 열중하거나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결국 남들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능력이나 결과물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그것을 통해 자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그 대상이 어떤 것이 되었건 간에 자신이 가치를 가지고 꾸준히 해 온 일이라면 자부심을 갖게 되어 있다. 그것은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법, 설거지를 빨리 하는 능력, 인터넷에서 영화를 빨리 찾는 능력, 엑셀을 잘 다루는 능력, 자신의 SNS에 연결된 지인들의 숫자, 뜨겁고 매운 음식을 잘 먹는 능력 등이 그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잘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도 한데, 실제로 우리가 그렇다.
 
우리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이들의 칭찬을 받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더욱 더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결국엔 남들과는 다른 수준의 능력을 갖게 된다.
 
예를 들어서, 어린 아이들 중에서 공룡의 이름을 모두 외우거나 새의 이름을 모두 외우는 아이들이 있다. 언뜻 보면 마치 천재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그것이 아니고 그것을 처음에 외웠을 때, 주변 사람들이 반응이 좋아서 결국 계속 그것에 집중하다 보니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서 탁월한 수준의 정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현상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난다.
 
춤이나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TV에 출연할 기회를 잡은 아이들 대부분이 그렇다. 실제로 그런 아이들은 단지 어린 시절에만 잘하고 끝이 난다. 왜냐하면 성인이 될 무렵엔 이젠 정말로 타고난 것들로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다. 그 땐 단지 귀엽다는 것으로 해결이 안 된다.
 
그리고 성인들 역시도 이런 어린 아이의 수준에서 단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잘한다고 생각이 들면 그것을 자부심으로 갖는다.
 
하지만 대부분의 자부심은 실제로 자부심이 아닌, 그냥 우월감에 불과하다는 점이 문제이다. 그리고 이 잘못 인식된 자부심은 그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비웃는 행동으로 인해 아주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그 자부심을 가지는 한계치가 너무 쉽게 드러나서 결국엔 누구나 그 수준까지 금새 따라오는 경우도 생겨서 초조해 하는 경우도 생겨난다.
 
앞에서 말했던 술을 잘 먹는 사람들이 술을 못 먹는 사람에게 강제로 술을 먹이거나, 라면을 잘 끓이는 법 같은 경우엔 누구나 알면 금새 비슷한 수준의 맛을 내기 때문에, 그 자부심을 유지하기 위해서 당황하여 이젠 라면에 소시지를 넣어서 소시지 라면, 삼겹살을 넣어서 삼겹살 라면, 선지를 넣어서 속 풀이 선지 라면 등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결국 이것이 라면인지, 아니면 전골에 면을 넣은 것인지 구분을 못하게 된다.
 
이런 우리 인간의 자부심이 생겨나는 이유는 모두 '존재에 대한 가치성' 을 갖고 싶다는 욕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 하나 하나가 모두 이 사회에 필수적인 존재이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과는 다른 어떤 능력을 가짐으로써 그것을 충족하고 또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계속 존재해야 할 이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너무도 많은 비슷한 존재들과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차별성을 쉽게 이루어내지 못한다. 그래서 우린 억지로 이것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그 모든 자부심의 실체이기도 하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그 종류에 상관없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이런 자부심은 자존감을 높여서 우리의 행복 조건을 충족시킨다.
 
하지만 우월감을 자부심으로 착각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맞닥뜨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우월함을 근간으로 하여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 대한 무시가 일어나는 경우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했다가 비난을 듣는 어리석은 사람들도 가끔 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자부심을 숨기면서 살아간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서 라면을 잘 끓이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것이 그 자신도 웃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날 라면을 잘 못 끓이는 사람을 보면서 어처구니 없어 하거나, 초보자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방법이나 지식을 강요하는 경우가 흔히 일어난다. 물론 라면을 잘 끓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가진 노하우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라면을 끓여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미각이 둔해서 대충 끓여서 먹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싱겁게 먹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판단 기준이 있는 것인데, 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것에 대한 모든 범위를 자신이 가진 기술과 정보의 영역만이 유일하게 옳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것이 타인에 대한 강요로 이어지거나 결국 같은 대상에 대해서 다른 기준점으로 자부심을 가진 이들과 강한 충돌을 일으키고 만다.
 
그렇듯 자신이 쌓은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어떤 대상에 대한 옳음의 범위를 지정하는 것이 바로 자부심이 가진 최대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로 쉽게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하는 것 역시도 누군가가 이미 경험한 것의 자부심을 보고 배운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가치나 능력을 믿고 당당하게 여기는 마음' 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르더라도 타인의 가치와 능력을 믿어주고 그것을 인정해주는 마음이 더해져야만 한다.
 
우리는 기껏해야 자신이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경쟁자 정도만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자부심은 실제로는 불완전함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인가에 깊게 알아갈수록 자신이 가진 한계를 더욱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그 중간 과정에 서 있는 우리가 어리석은 우월감을 자부심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이다.

 

젊은 철학자는 세상을 다 이해하는 듯 말하지만, 나이 먹은 철학자는 삶 앞에서 한없이 겸손해진다. 젊은 물리학자는 우주를 금방이라도 모두 이해할 듯 말하지만, 늙은 물리학자는 우주의 신비함에 끝없는 경외심을 보여준다.

 
이런 우리들의 어리석은 자부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그것은 그 원인인 열등감을 없애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열등감에는 바로 우리가 왜 스스로를 반드시 존재해야 할 개체로 간주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을 고쳐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 자부심' 으로부터 탈피를 의미한다.
 
아무런 이유 없이 지구상의 동물보다 머리가 좋다는 이유로 가진 인간 자부심은, 우리들 하나 하나가 반드시 필수적인 존재여야 한다는 뜬금없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 자부심은 우리의 아무런 근거 없는 존재에 대한 욕망을 기반으로 한 것일 뿐이다.
 
만약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열등감도 느낄 필요가 없고 따라서 우월감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우린 좀 더 자신이 하고픈 일과 해야 할 이유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것을 해 낼 수 있는 인간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우린 누구도 자신의 존재 이유가 실제로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유는, 평생에 걸쳐 이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결국엔 그 모든 열등감과 그것을 기반으로 한 우월감, 그리고 여기에서 연장된 자부심으로 남다른 고집과 자칭 신념을 가진 채 늙어 가게 되기 때문이다.
 
현명해진다는 것은 다른 뜻이 아니다. 나 자신의 유효한 한계를 인식하고 아무 근거 없이 갖게 된 존재의 필요성을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조금이라도 가능해졌을 때, 우리는 정말로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곳엔 열등감도 우월감도 자부심도 심지어 우리 자신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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