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검은 늑대, 하얀 늑대

아이루다 2014. 10. 18. 08:45

 

어제 우연히 만화로 그려진 좋은 이야기를 보았다. 아마 인터넷 상의 각종 커뮤니티를 접속하는 분이라면 한 번쯤 봤을 법한 이 만화는 꽤나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
 
원래는 그냥 말로 알려진 오래된 이야기를 어떤 분이 만화로 그린 것 같다. 그런데 명확한 출처를 찾을 수가 없어서 이미지를 그냥 가져왔다.
 
늙었지만 현명한 노인은 손녀에게 두 종류의 늑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선과 악을 표현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아' 라고 부르는 존재와 '믿음' 이라고 부르는 각각의 검은 색과 하얀 색 늑대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설명해준다.
 
그리고 어떤 늑대가 이기게 되는지에 대해서 묻는 손녀의 순수한 질문에 '네가 먹이는 주는 쪽' 이라는 멋진 마무리를 한다.
 
여기에서 에고(자아)는 화, 질투, 슬픔, 후회, 욕심, 오만, 자기연민, 죄책감, 억울함, 열등감, 거짓말, 헛된 자존심, 우월감으로 구성되고, 믿음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평온함, 겸손, 친절, 자비, 공감, 너그러움, 진실, 연민으로 구성된다.
 
아마도 각각은 더 많고 다양한 구성 요소가 있을 것이나 이 정도만 나열해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당연하지만, 우리 모두는 자아의 요소와 믿음의 요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이의 성공에 대해서 질투심이 섞인 축하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 존재이다. 이때, 어느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친 사람도 존재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쪽만 100%인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내부의 선과 악의 각각이 차지하는 비율로써 정의된다. 또한 그것들도 어떤 상황인가 혹은 자신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 끝없이 변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우리 자신이 어떤 비율로 선과 악을 섞어 놓고 살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할 길이 없다.
 
그 덕분에 우린 평생을 걸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함을 느낀다. 우리는 때론 천사 같기도 하고 악마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인해 노인은 우리 인간을 하얀 늑대와 검은 늑대가 공존하며 둘이 끝없이 싸운다고 표현한 듯 하다.
 
지금까지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라서 더 이상 설명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 의문점이 생긴다.
 
그것은 이 만화에서 설명된 '선' 혹은 '믿음'으로 설명된 것들은 과연 '자아(에고)' 와 반대되는 개념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질문은 좀 혼란스러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누가 봐도 뻔히 보이는 하얀 늑대가 검은 늑대와 반대 되는 것인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추가로 덧 붙이고 싶은 말은, 과연 검은 늑대와 하얀 늑대는 분리된 존재인가에 대한 것이다. 즉, 이 둘은 원래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 말이 맞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하얀 늑대는 검은 늑대가 만족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니까 말이다.

 

이것은 이상하지만,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다. 왜냐하면, 선과 악은 서로를 반드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린 이런 이분법에 익숙하지만, 실제로 선은 악이 있으므로 의미가 있고, 악은 선이 있음으로 인해 의미가 생겨난다. 즉, 둘은 분리가 불가능한 것이다. 한쪽이 없어지면 다른 한쪽도 없어지고, 반대로 한쪽이 생겨나면 다른 한쪽도 생겨난다.
 
원래 늑대는 한 마리뿐이다. 그리고 이 늑대는 원래 배가 고프면 검게 변하고, 배가 부르면 하얀색을 띨 뿐이다. 즉 우리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검은 늑대가 되고, 욕망이 완전히 충족되어서 충분히 만족스러우면 하얀 늑대가 된다.
 
여기에서 사람마다 차이점은 바로 그 욕망이 얼마나 쉽게 만족되느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실제로 우리 안에 선이나 믿음과 같은 것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조건부로 유효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목숨에 대한 명확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그를 도와줄 방법을 찾더라도 자신의 심장까지는 내주지는 못한다.
 
어떤 것이 조건부로 유효하다는 말은, 그 조건이 없어지는 순간 의미가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조건이 붙은 그 모든 요소는 언제든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
 
아마도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예로 들면서,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부모에겐 자신의 자식이란 점이 조건이다. 누구도 남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반론으로 입양도 있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입양을 했다는 것은 단지, 자신의 몸으로 낳지 않았다는 것만 다를 뿐, 자신의 소중한 자식으로 여기는 것은 동일하다. 우린 입양한 후 자신의 자식처럼 키우지 않는 부모들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에고(자아)의 존재는 생각보다 막강하다. 실제로 에고는 우리들 그 자체이다. 우리는 그래서 에고의 한계에서 단 한 발자국도 벗어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진실로 가능하다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의 범위를 벗어난 사람이 된다. 즉, 깨달은 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하지만 보통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희박한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 있는 늑대가 가능하면 하얀색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아니 실제로는 검은색 늑대를 더 선호하는 사람들도 꽤나 된다.
 
어떤 이들은 욕망을 거부하고,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어떤 다른 이들은 이 욕망을 추구하는 삶 자체를 무척 좋아한다. 야망을 가지고, 남들보다 더 성공하여 더 높은 곳으로 가, 낮은 이들을 굽어 보길 좋아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욕망은 딱히 나쁜 것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의 안에 있는 늑대가 검은 색을 띌 때 행복해 한다. 반대로 어떤 이들은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그리 좋은 것이 아니라고 배우고,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을 참지 못하며, 결국 욕망을 실현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대안으로써 욕망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늑대가 하얀 색을 때를 선호한다.
 
하지만 냉정히 말하면, 인간의 발달은 모두 욕망의 산물이다. 단지 그것이 학문, 문학, 미술, 음악 등으로 발휘되면 우린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정복, 권력, 돈, 지배력 등으로 발휘되면 부정적으로 생각할 뿐이다.
 
위대한 건축물로 여겨지는 피라미드나 만리장성 등에는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착취가 섞여 있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우린 그렇게 만들어진 오래된 건축물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위대함을 칭송할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것을 인간의 선한 면으로 연결할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이것은 피의 역사인 셈이다.
 
현대 의학 발달의 바탕엔 독일과 일본의 비 인간적인 실험이 존재했었고, 심지어 전쟁 기간이 아니지만 매독 치료제를 개발한 미국의 한 의학자는 심각한 수준의 비 인간적인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우린 이것을 객관적으로 볼 때 그것을 비난하겠지만, 그 자신이 매독에 걸렸다고 해서 치료를 거부하진 못한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어떤 면에서 우리 인간 문명은 모두 이런 비 인간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가능하게 한 건 모두 욕망인 것이다. 우린 욕망으로 인해 마음껏 나빠질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검은 늑대의 본질이다.
 
반대로 하얀 늑대는 단지 검은 늑대인 상태를 참아내지 못하여 하얗게 변한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얀 늑대가 원래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둘은 실제로 하나의 다른 면인 뿐이다.
 
그래서 저 만화에는 선, 악 혹은 에고, 믿음 등의 단어를 쓰면 안되었다. 그냥 저것은 에고의 두 가지 면일 뿐이다. 그래서 결국 에고를 잘못 이해한 사람이 쓴 글인 것이다.
 
우리는 에고와 100% 일치 한다. 우리와 에고는 한 점의 틈도 없다. 우리는 그저 에고로 인해 끝없이 흔들리는 존재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착한 행동 했다가 비난 받거나, 남을 도왔을 때 그 사람이 심하게 화를 내면 그땐 잠시 자신의 착한 행동을 후회하기도 하고, 착한 행동을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 무척 화가 나기도 한다. 왜냐하면 착한 행동엔 원래 미소나 고마움을 표시하는 행동이 따라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린 왜 이런 기대치를 갖게 되었을까? 그냥 도우면 돕는 것이지 왜 상대가 자신에게 고맙다고 해야 할 것이라고 믿을까? 그리고 왜 상대가 자신의 친절함에 화를 내면 안 된다고 믿을까?
 
선하게 생각하고 착하게 사는 사람은 자신이 착하게 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그것을 스스로 인식하든 못하든 간에 상관없이 그 내면엔 반드시 그것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바로 에고이다. 그래서 우린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착하다는 만족감을 기대한 것이다. 그러니 그 누가 에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으랴.
 
저 만화를 진지하게 설명해서 정말로 에고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면, 우린 이 두 늑대 모두에게 먹이를 주면 안 된다. 어느 한쪽이라도 먹이를 주면 우린 단지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따라 조금 다른 인간이 될 뿐이다. 근본적으로 우린 선하게 보이는 존재이거나 악하게 보이는 존재가 될 뿐이지, 결코 선한 존재나 악한 존재는 될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이 선하다고 믿고, 하얀 늑대에게 먹이를 주면 마치 자신이 믿음이나 선에 다가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한 단계를 더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조언이다. 그리고 또한 나 자신에게도 해주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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