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나쁜 사람, 착한 사람

아이루다 2014. 10. 11. 10:01

 
한없이 삐뚤어진 아이가 있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일찍 아비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놀림으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 짧은 삶 속에서 느꼈던 많은 차별로 인해서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는 힘들고 의미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아이에게 세상은 다른 아이들처럼 행복한 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아이가 다니고 있은 학교에 젊고 열정 있는 선생님이 전근을 왔다. 아이는 잠시 새롭게 부임한 선생님에게 호기심을 느꼈지만, 오래지 않아 '저 선생님도 나를 무시할 것이 틀림없어' 하는 생각으로 마음을 닫아 버렸다. 하지만 새롭게 부임한 선생님은 뭔가 달랐다.
 
상처 입은 아이에게 선생님은 다른 어른들과 다르게 다가왔다. 그는 아이를 이해하려고 했고 익숙하지 않은 감정으로 인해서 도망 다니는 아이를 기다려줬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아이는 마음의 문을 열었다. 그렇게 아이는 삐뚤어진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수 십년이 흐른 후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가 된 아이는, 자신의 삶에서, 어린 시절에 자신을 옳은 길로 이끌어 준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전했다. 이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담으로 오랫동안 전해졌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 등에서 비슷한 형태로 많이 접하는 것 중 하나이다. 타고난 불우한 환경을 극복해내기 위한 어떤 사람의 따뜻한 노력이 가져온 어떤 기적과도 같은 일들은 실제로도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듣는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달해준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그것은 만약 어른이 되어서도 나쁜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이 어린 시절에 뭔가 제대로 따듯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다른 삶을 살았을까 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어른이 되어 착한 사람으로 분류되는 사람이 만약 어린 시절에 가난으로 인한 차별이나, 외모로 인한 심한 상처를 받았다면 과연 어른이 된 후에 동일하게 착한 사람으로 살았을까 도 역시 궁금해한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한 가정이기에 답을 낼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은 해볼 수 있다.
 
나쁜 사람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정말 타고난 나쁜 사람이 있고, 다른 하나는 나쁘지 않는데 환경으로 인해 좋은 것을 제대로 배우지 못하거나 세상에 대해 심각한 분노를 느낀 경우이다.
 
소설 레미제라블을 읽어보면 어린 코제트를 키우는 술집 부부가 있다. 읽은 지가 오래되어서 술집인지 여인숙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 부부는 힘들게 고생하는 코제트의 엄마에게 각종 핑계를 대면서 돈을 요구한다. 그리고도 실제로는 코제트를 완전히 몸종 부리듯 일을 시킨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이 부부는 소설의 끝까지 나쁜 짓만 하다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현실에서도 실제로 존재한다.
 
우리 인간의 성격은 타고난 성향과 후천적으로 교육된 성향, 두 개의 종합적인 결과물이다. 그런데 이 부부의 경우엔 타고난 것도 나쁘게, 커나간 환경도 나쁘게 되어서 결국 끝까지 나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이들은 은혜를 베풀어봐야 결국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언제든 뒤통수를 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흙 속의 돌멩이일 뿐이다.
 
이런 이들과 달리 타고난 성격은 착한데, 환경에 의해 나쁜 성격을 갖게 된 사람은 앞에서 말한 어떤 기회를 갖게 되면서 원래 자신의 착한 성격을 되찾을 수 있다. 그래서 만약에 어떤 감동적인 스토리를 만들려고 한다면, 적어도 이런 사람을 골라야 한다. 이들은 진흙 속의 진주가 될 수 있다.
 
착한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성향이 나쁜 사람이라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으면 착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워서 언뜻 보기엔 착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언제라도 그 자신에게 중요한 이득을 뺏기게 되는 상황이 오면, 돌변하듯 변해서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이것이 그 사람을 아는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이 사람의 기준에서 보면 당연한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 동안 착한 사람으로 살았던 것은, 착하게 살 때 얻는 이득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인데, 만약 착하게 행동했을 때 큰 손해가 명백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땐 착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착한 성격으로 태어난 사람이, 환경에서도 착하게 사는 법을 익혀서 평생 착하게 사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매우 일관성 있게 착하다. 개중에는 너무 착해서 답답함을 느낄 정도도 존재하며, 그 착함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입기도 하고, 여자로부터 너무 착하다는 이유로 헤어짐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착함은 말릴 수가 없다.
 
그런데 이쯤에서 사람이 착하다 와 나쁘다 의 기준을 정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래 이런 말 자체가 우리가 평소 남들을 대상으로 단호하게 정의내리는 것만큼 그다지 확신을 가질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해서 착하다 와 나쁘다 의 기준은 바로 단순히 욕심의 크기를 의미한다. 욕심이 강해서 자신의 이득을 열심히 챙기다가 결국 남들에게 손해를 입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되고, 반대로 자신이 손해를 입으면서까지도 욕심을 내지 않는 이들을 우리는 착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쉽게 다시 말하면, 나에게 손해를 입히는 사람은 나쁜 사람, 나에게 이득을 줄만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 단순한 셈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지능적으로 착하게 굴기 때문이다. 만약 1을 손해 보고 2를 얻을 수 있다면, 우린 1을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럴 때 우리는 흔히 그 사람을 착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머리가 뛰어난 사람일수록 주는 것 대비 얻는 것이 커진다. 그것이 바로 계산능력이며, 두뇌활동을 통한 최고의 이득 보장 행위이다. 만약 1을 주고 10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단숨에 부자가 될 것이다. 그리고도 남들에게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 라는 인상을 남길 수도 있다. 어떤 면에서 다른 이들에게 나쁜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득을 추구하는데 멍청하게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이 기준으로 볼 때, 앞에서 예를 든 코제트를 키우던 그 사악한 부부는 진정한 의미에서 탐심에 가득 찬 나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코제트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반면에 같은 책에 등장한 자벨 경감의 경우엔, 장발장을 의심하고 끝까지 추적하지만, 결국 자신을 살려준 그의 관용에 마음이 움직이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벨의 경우, 그가 가진 욕심은 바로 자신이 믿는 정의 실현에 대한 의지였다. 실제로 그는 그것을 자신의 삶 자체로 여기고 가치를 부여했지만, 그것은 진실된 의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계기로 만들어진 어리석은 집착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는 죽음 직전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바뀌지 않고, 보통 이미 나쁜 사람은 끝까지 나쁘 사람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절대로 쉽게 바뀌지 않을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실현은 바로 행복이며, 이 행복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개개인에게 너무도 힘든 일인 것이다.
 
코제트를 키운 여관 부부에게 돈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과, 자벨 경감에게 법의 정의로움을 포기하라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 중 겨우 자벨 경감만이 어린 시절에 좋은 선생님을 만나 성공한 사업가처럼 삶을 다시 평가하고 의미를 재해석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잡은 것이다.
 
하지만 자벨처럼 우리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질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모든 사람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욕심이 강할수록 변하기 힘들며, 혹시나 그를 바꿀 수 있는 충격이 필요하다면, 그 역시도 상대적으로 강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는 흔하지 않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평생을 변하지 않고 살아간다.
 
하지만 누구나 단 한 번의 기회는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을 앞에 둔 경우이며,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욕심을 부려봐야 의미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이런 죽음의 순간이 없이 사고 등으로 급하게 세상을 떠나야 하는 사람에겐 주어지지 않는 기회이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은 이런 기회를 맞게 된다.
 
이것을 회개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순간에 평생 가져 온 욕심을 버리는 순간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모든 욕심은 바로 미래를 위해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면 우린 당장 가질 수 있는 욕심엔 절대적 한계가 있다. 아무리 많이 먹고 싶어도 위의 한계가 있고,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싶어도 당장은 있어봐야 짐만 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를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더 많은 고기를 가져다가 냉동실에 얼리고, 더 많은 돈을 가져다가 은행에 저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변할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아주 소수만 변하게 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변화가 없이 적당히 어울리면서 살아간다.
 
우리가 가진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란 개념은 모두 허상이다. 그것은 모두 자신을 기준으로 하게 된다. 자신이 욕심을 가진 것보다 덜 욕심을 가진 이들은 착한 사람이 되고, 반대로 더 많은 욕심을 가진 사람은 나쁜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것도 자신이 욕심을 부리는 분야가 겹치느냐에 따라 달렸다. 우리 눈에는 웃겨 보이지만, 어린 아이들은 놀이용 카드 한 장에서 코피가 나도록 싸운다. 그들에겐 그것이 욕심을 부리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른들에게 돈은 바로 그 카드와 같다.
 
그래서 돈보다 다른 것에 욕심이 많은 이들은 착해 보인다. 그것은 우리들의 재미난 착각인 것이다.
 
또한 이 설명은 바로 우리가 왜 변하지 못하는 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된다. 돈과 같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것에 대한 욕심은 타고나고 또한 교육된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그것을 버리질 못한다. 또한 반대로 욕심을 덜 타고 나고 더해서 교육도 그렇게 받게 되면, 결국 욕심이 작은 사람이 되어서 착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모든 이들은 죽음 앞에서 비로소 착해진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젠 욕심을 부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그땐 자신에 대한 기억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닌 착한 사람으로 남길 바란다. 그래야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자신을 기억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린 굿 윌 헌팅에 나왔던 '윌'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이미 우린 타고난 대로 또한 교육받은 대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을 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진주여야 한다. 그래서 언젠간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닦여서 빛날 수 있어야 한다. 진흙 속의 진주는 이미 진주였던 것이다. 누구도 돌멩이를 닦아서 진주로 만들어 줄 순 없다. 누구나 닦는 것까지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돈을 많이 벌었으니 베풀고 살라고 하거나, 최고의 권력을 가졌으니 좀 나누라고 하는 것, 먹고 살만큼 돈을 벌었으니 덜 욕심 내고 살라고 하는 것, 이미 원하는 것을 다 얻었으니 이젠 좀 양보 하라고 하는 것 모두 제 삼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할 말은 아닌 것이다.
 
그것의 판단은 오직 그 욕심을 가진 당사자만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그가 돌멩이인지, 진주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혹시나 어떤 기회를 통해 누군가를 변화시켰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이젠 그 착각을 깨어나야 할 것이다. 그는 누군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닌, 누군가가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뿐이다. 물론 그것도 대단한 것이긴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금빛으로 치장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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