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의 거품을 다루는 법

아이루다 2014. 9. 10. 10:17

 
어린 시절에 보았던 애니메이션 한 편이 있다. 제목은 '빨간 머리 앤' 이였고 같은 제목의 소설을 기반으로 만든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개인적인 경험으로 소설을 먼저 읽고 애니메이션을 보았는데, 지금 기억은 온통 애니메이션 장면만 가득하다.
 
이 작품은 빨간 머리에 대한 열등감을 가졌지만 엉뚱하고, 상상력이 풍부했으며, 자아 의식이 강했던 여자 아이의 성장기를 그렸다. 그리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서양 문화권에서는 빨간 머리를 가진 이를 못 생기고 독하다는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빨간 머리 앤은 자신의 머리 색을 무척 싫어한다. 그런데 그 사실보다 더 싫은 것은 바로 그녀의 머리 색을 다른 사람이 언급하는 것이었다. 기억을 확실하지 않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 길버트라는 남자 아이가 자신의 머리 색을 언급했다가 그 남자 애를 어린 시절 내내 미워한다. 그런데 결말엔 둘이 결혼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빨간 머리 앤은 머리가 빨갛기 때문에 빨간 머리 앤이다. 그리고 그녀 역시도 자신의 머리 색이 빨갛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스스로는 괜찮다고 여기지만 타인이 그것에 대해 언급을 하면 정말로 무척 심하게 화를 낸다.
 
그런데 빨간 머리 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작은 것을 알지만 누군가 키가 작다는 것을 언급하면 그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실망을 한다. 이런 종류의 신체적 열등감은 사람마다 거의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있다. 또한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성격이나 지능, 운동 능력과 같은 말 그래도 타고난 능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운동을 못하는 아이는, 누구도 언급하지 않을 땐 그냥 그것을 즐긴다. 하지만 누군가 와서 너는 왜 그렇게 못하냐고 언급하는 순간부터 그 운동을 싫어하게 된다.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 역시도 시험을 보고 나서 그 결과를 보는 순간 더 공부를 싫어한다.
 
우리 인간은 현실을 아는 순간 불행해진다.
 
우리는 현실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에 대해서 그럴듯한 상상을 한다. 그리고 그 상상에는 그것에 대해서 자신이 가장 잘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공부를 못해도 성적이 가장 잘 나온 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신은 노력을 하면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수 많은 셀카 사진을 찍은 사람들은 그 중 제일 잘 나온 사진을 자신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모든 운동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실수 했던 장면들보다는 우연히 아주 멋진 장면을 연출했을 때를 기억하면서 자신이 그 운동을 좀 더 잘할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한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일을 실수해서 상사에게 깨졌던 장면은 술로 이미 잊고, 자신이 무엇인가 성과를 낸 것을 마음 속에서 부풀린 후, 자신이 회사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느낀다.
 
우리는 영리하게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은 부풀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허풍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50% 정도만 부풀린다. 아니 기분이 좋을 땐 100% 정도 부풀리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지면 호인이 된다. 거품이 최고조로 달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반복적인 일에는 평균치라는 것이 있다. 사람이 원래 잘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볼링을 치면 200점이 나오는 날도 있지만 100점이 나오는 날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머리 속에는 200점이 기억된다. 100점이 나온 날은 그냥 매우 컨디션이 좋지 않는 날이었을 뿐이라고 기억된다. 그리고는 그리 오래되지 않아 아예 기억 속에서 제거시켜 버린다.
 
이것은 인생 전체로도 확대되기도 한다. 우리는 삶의 전성기라는 시기가 있다. 그런데 이 전성기를 향해 가는 과정과 전성기를 지나서 늙어가는 과정은 자신의 머리 속에 잘 남지 않는다. 그리고는 실제로 가장 짧은 순간이었던 전성기를 통해 자신을 정의 한다.
 
즉, 우리는 전성기 시절에 보여줬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10년만 젊었어도 다 할 것 같다고 여긴다. 하지만 10년을 젊어지는 것은 현대 과학 기술로 절대로 불가능하다.
 
우리의 머리 속은 자신의 존재, 즉 '자아' 라고 알려진 이 부풀림쟁이의 역할로 인해서 늘 거품이 발생한다. 그래서 우리는 거울 속 자신을 좀 더 잘 생기고 예쁘다고 여기고, 자신의 외모가 다른 이들의 판단에 비해서 좀 더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는 많은 착각을 한다. 누군가 매력적인 이성이 우연히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마치 그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착각한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이 일어난다. 실제로 우리가 아는 우리 자신은 원래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비해서 모두 부풀려져 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이런 거품이 꺼질 때가 있다. 시험을 봤는데 망쳤거나, 시합을 해서 지거나, 좋아하던 이성에게 고백했다가 차였거나, 회사에서 능력 부족으로 잘리거나, 취직을 못해서 전전긍긍 하거나, 자신에게 거의 관심이 없는 다른 이들의 모습을 알게 되거나,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경쟁자를 만났을 때, 우리는 좌절을 경험한다.
 
좌절이란 말은 마치 나쁜 일처럼 인식되지만 냉정히 말해서 현실 인식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좌절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이 가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제대로 인식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절은 매우 불유쾌한 감정이고 누구에게나 불행의 순간이다.
 

누구나 빨간 머리 앤처럼 누군가 빨간 머리라고 말해서 알려주는 순간을 싫어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런 이야기를 괜히 상대에게 했다가 괜히 커다란 미움을 사게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구 상의 모든 인간이 솔직해지는 병에 걸리면 아마도 우리는 멸종하게 될 것이다.
 
다행히 어린 시절을 보낸 성인들은 어린 시절의 솔직함이 가진 문제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그래서 어른이 되는 것은, 머리 속에 든 생각을 외부로 표출하지 않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결국 어른이 되면 어린 시절보다 한층 더 거품이 심해진다. 외부의 자극을 통해 좌절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고, 혹시라도 그런 순간이 와도 술을 먹거나 뒷담화를 통해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각한 문제는 머리 속 상상 속의 자신과 현실의 진정한 자신의 차이가 크게 벌어질 때 일어난다. 즉 거품의 크기가 자신이 감당할 수준을 벗어날 때 무엇인가 엇나감이 발생한다.
 
이런 상황이 심한 경우엔 주로 현실 부정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누군가 사실을 말해주면 크게 화를 내고 그 사람과 관계를 끊어 버린다. 그러면서 점점 더 불행해진다. 상상과 현실의 차이를 줄여야 좌절하더라도 그나마 살만한데, 그것을 부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마저 끊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가 서로의 거품을 인정해주는 사람들과 만나서 끝없는 거품 경쟁을 하게 된다. 이것이 매우 특별한 이야기 같지만,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인간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현장이다. 그리고 이렇게 맺어진 관계는 서로가 서로에게 만들어 준 거품으로 인해 타인에 대한 남다른 우월감을 갖는 경우가 많아서 배려심이나 친절함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 마누라, 내 남편, 내 아이가 최고라는 생각 역시도 이런 과정으로 발생한다. 남편과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는 것과 서로가 서로에게 만든 거품을 인정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사랑으로 거품을 만들어서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세상 어떤 것보다도 가치 있다고 믿는다.
 
자신의 아이를 소중한 것은 오직 그 자신들에게 한정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강도만 차이가 날 뿐, 이 세상 모든 부모에게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실제로 거품을 가진 사람은 세상 사람들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린 누구나 자신이 느끼는 가치에 대해서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단지 그리 나쁜 의미를 갖지 않은 가정, 연인, 인간, 환경, 취미 등의 괜찮은 가치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치의 목표가 잘못 방향 지어지게 되면 이것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런 한계점을 가진 존재라서 평생 아주 작은 거품이라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이것에 대해서는 사람들마다 많은 답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가지 답을 찾을 수 있는 힌트는 있다. 물론 이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야말로 힌트이다.
 
만약 실제적 자신과 상상 속 자신이 완전히 일치를 하게 할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 생각 속에 자신에 대한 아무런 거품이 없다면 말이다.
 
물론 이 상상 속 자신이 현실 수준으로 내려오면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많은 실망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좌절의 순간을 모두 경험하고 나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도 있다고 본다. 또한 자신을 있는 그래도 인정함으로써 새로운 각오를 가질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물론 또 그러면서 거품이 생기겠지만 말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런 거품을 가진다. 그들의 성공엔 실력도 중요했지만 운도 크게 작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의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 비결에 운을 먼저 꼽질 않는다. 만약 운이 크게 작용했다고 여기는 순간, 자신의 성공 자체가 의미를 많이 잃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현실과 상상을 같은 수준으로 맞출 기회가 거의 없다. 이미 그들의 삶은 거품이 잔뜩 들어간 상태로 포장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 그 과정은 매우 힘들고 괴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에서 가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회이다. 그리고 그 기회는 바로 자신이 성공하지 못한 인생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부터 인정할 때 생겨날 수 있다.
 
현실적 자신을 인정한다는 의미는 원래 괴로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에 좀 더 깊게 들어가면 또 하나의 숨겨진 진실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토록 갖고자 했거나, 다다르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 실제로 그리 그 만큼이나 큰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욕망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원할 땐 그것이 없으면 죽을 것 같고 잃으면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절망을 느낄 수도 있지만, 시간이 얼마간 지나고 나면 그 과거의 감정은 참 우습게도 재미난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경험을 흔히 한다.
 
자신이 이루고자 한 모습, 그러니까 상상 속의 자신 역시도 이런 욕망 중 하나이다. 우리는 자신을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실제로는 정말로 힘겨운 노력과 많은 포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웬만한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하다.
 
물론 이것을 의지력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욕망에 대해 얼마나 강한 욕구를 느끼느냐로 보는 것이 더 옳다. 우리는 욕망을 이루려는 태도에 대한 강도가 높은 사람을 의지 있다고 표현하는 것뿐이다.
 
일단 자신의 머리 속에 가졌던 상상 속의 자신의 모습이 그리 별 것 아니란 생각이 들 수만 있다면 이젠 본격적으로 좀 더 깊은 생각으로 진화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을 훨씬 더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된다.
 
물론 늘 이런 행복한 결말이 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행복함을 느끼는 것은 다른 이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다. 우리 자신이 행복하다면, 그 어떤 환경에 놓여도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행복의 가장 큰 비밀이다.
 
하지만 누군가 알고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기도 하다. 단지 우리는 머리 속에 든 상상 속의 자신의 모습을 현실로 끌어 내리려고 하질 않을 뿐이다.
 
빨간 머리 앤은 힘들게 대학교까지 간 후 졸업하고 다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학교의 선생님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순수했던 시절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리고 그 땐 그녀가 평생 가졌던 빨간 머리에 대한 열등감은 없어진 후였다. 이미 충분히 만족할 만큼 열심히 살아 온 그녀는 현실적 자신을 상상 속 자신만큼 끌어 올린 것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아주 소수는 현실의 자아를 상상의 자아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상 속 자아를 끌어내려서 현실로 맞춰야 하는데, 좀처럼 용기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빨간 머리 앤과 같이 소수의 이들 역시도 거품은 늘 존재하기에 단지 거품의 크기만 문제일 뿐,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들은 거품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찌되었건 간에 행복하다면 아무것도 상관없이 살면 된다. 하지만 그 거품으로 인해 불행하다면, 한번쯤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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