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에고 이야기

아이루다 2014. 9. 26. 09:32

 
19세기 말쯤 그리고 20세기 초쯤에 정신 분석학계엔 커다란 변화가 하나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걸출한 학자의 출현 때문이었는데, 그는 '꿈의 해석' 이란 책을 통해서 인간 정신에 숨겨진 비밀을 공개했다.
 
물론 지금 현시대에 그의 정신 분석적 해석은 오직 진실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해석은 편협적이고 전체보다는 부분만을 바라 본 연구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정의한 몇 가지 개념들은 지금도 꽤나 유효하다.
 
그는 인간의 정신 세계를 '이드', '에고', '슈퍼 에고' 세 가지로 분류 했다. 이것은 이해하기에 그리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이드는 우리가 보통 '본능' 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에고는 '자아', 슈퍼 에고는 일종의 이상적 인간, 즉 에고를 넘어선 듯 보이는 인간의 행동들을 의미한다. 한국말로 해석하면 '초자아' 라고 한다.
 
이드나 에고에 비해서 슈퍼 에고는 약간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대충 비슷하게 예를 들자면,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는 에고와는 달리 타인을 위한 희생을 하는 이타심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이 중에서 에고에 대한 것이다.
 
에고는 자아라는 말로 해석이 된다. 실제로 에고는 모든 이들에게 그 자신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고민하고 불행과 행복을 느끼는 그 주체가 바로 에고(자아)이다.
 
인간은 실제로 에고 그 자체이다. 우린 에고의 만족을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고 달성하고 실패한다. 에고는 그 의도대로 성공하면 흥분감, 기쁨, 만족감, 행복을 선사하고 반대로 실패하면 좌절, 슬픔, 불행을 느끼게 한다.
 
만약 우리 개개인이 자신의 에고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우리는 아마도 자기 자신을 완벽한 타인으로써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바로 나 = 에고 라는 뜻이 된다.
 
또한 에고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 자신이 얼마나 에고의 노예인지 역시도 어렵지 않게 알게 된다. 우리 각자가 의미 있다고 믿는 것, 가치 있다고 믿는 것,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 옳은 것, 정의, 진실, 믿음 등등 그 모든 것이 바로 에고의 영역이란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서 만약 다른 이들과 생각이 달라 토론이나 언쟁이 벌어지게 되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옳다고 믿는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장의 강력함은 바로 에고가 가진 확신에서 비롯된다. 토론이 격렬할수록 우리는 에고와 한 몸이 되어서 상대의 주장을 꺾기 위해서 자신의 생각을 절대적 진리로 믿는다. 이기고 싶어하는 에고는 ‘믿음’을 ‘진리’로 만든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이 에고를 통해 세상을 살아간다.
 
만약 타인과 비교해서 좀 더 나은 잘생기고 예쁜 외모를 가졌다고 생각할 때, 그 얼굴을 거울을 통해 확인할 때 우리가 가진 에고는 만족스러워 한다. 하지만 얼굴에 뾰루지가 났거나 잠을 잘 못 자서 얼굴이 부었다면 우리는 금새 그것으로 인해 기분이 나빠진다. 그것은 바로 에고의 기대치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에고는 욕망을 만들고, 기대치를 계산하며,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믿게 만든다. 

그런데  에고의 가장 큰 문제는 그 자신을 과대 포장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의 행동은 이 에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고 있다.
 
아주 단순한 행동들만 봐도 에고의 허영심을 알 수 있다. 수 많은 셀카를 찍은 후 단 한 장의 상당히 잘 나온 사진을 가지고 자신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쓰는 것이 그 대표적인 증상이다. 에고는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것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자기가 경험하는 삶의 보편적인 모습으로 결정한다.
 
그것은 마치 평생 굴에서 살다가 단 한차례 넓은 광야로 나온 쥐가 금새 자신을 덮친 독수리의 발톱에 낀 채,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보낸 그 넓은 광야를 죽는 순간까지 기억하는 것과 비슷하다.
 
에고의 허영심은 끝이 없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욕망 역시도 끝이 없다.
 
사람들은 자존심의 상처를 입으면 화를 낸다. 그런데 왜 이 자존심이란 것이 생겼을까? 이것도 정말로 단순하다. 에고는 자기 자신을 높게 평가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어떤 근거 없이 자신이 어떤 존재쯤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 근거는 있다. 10년 전 동네 아줌마가 지나가다가 한 말인 '몸매 예쁘네' 가 그 근거이다. 또 한번 더 있다. 5년 전 옷 사러 매장에 갔었는데 거기에서 옷을 팔던 점원이 옷 맵시가 참 좋다고 했었다. 근래 10년 동안 두 번의 이런 경험은 자신의 몸매가 꽤나 괜찮은 편이란 스스로의 평가를 갖게 해 주었다.
 
그래서 어찌 되었건 몸매에 대해서 자존심이 있었는데, 어느 날 누군가 자신의 몸매가 그리 좋지 않다는 험담을 하는 소리를 듣게 되자 너무도 화가 난 것이다. 분명히 자신은 근거가 있는데, 그 사람은 사람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리고 또한 자신이 다 벗은 몸매를 볼 기회도 없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이 화가 난다.
 
이것이 단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만 같은가? 절대로 아니다. 학자는 학자대로 자신의 지식에 대한 에고의 허영심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존경하는 그 많은 사람들 역시도 존경심에 대한 에고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거의 대다수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그 방향만 다를 뿐 에고의 노예를 벗어날 수 없다. 실제로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슈퍼 에고라고 부르는 초자아 조차도 아예 에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거기엔 희생의 가치, 이타심 추구 등의 에고가 존재한다. 그 어떤 것이든 가치를 느끼는 순간 에고는 발동된다. 그런데 어떤 인간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치 없다고 생각하면서 하겠는가?
 
이것의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존재 자체가 가치가 있을 수 없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이것이 물질적 관점에서 본 환원주의나 반대 지점에 있는 동양의 신비주의까지 막론해도 근본적은 그 사실은 동일하다. 단지, 신비주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찾는 것은 이 세상의 틀에서 벗어나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다. 그러니 이것은 아예 기준점 자체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유명한 공즉시색, 색즉시공이란 법어가 나온다. 불교에서는 자신, 즉 에고를 버리고 나면 전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공은 에고의 부재를 의미한다.

 

어려운 종교적 관점은 그냥 두고, 현재의 보편적 기준점으로 보았을 때, 우리 각자는 존재해야 할 객관적 이유란 전혀 없다는 평범한 사실을 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물론 종교를 가진 분들은 이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이유를 만들었겠지만 지금까지 인간을 들여다 본 결과로는 이것 역시도 거대한 에고의 허영심이다.
 
본능인 이드의 관점에서는 생존 자체가 의미가 있다. 실제로 자연은 그런 관점에서 살아간다. 올해 핀 한해살이 풀은 한해만 살고는 씨를 뿌리고는 죽는다. 도대체 이 풀에게서 존재의 의미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단지 자신의 유전자를 미래로 전달하는 역할로써 끝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전달해야 하는가? 이것은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아니 찾으려고도 안 한다.
 
물론 유전자를 전달하는 것이 의미 있다고 주장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어느 날 지구가 한 순간에 멸망하게 되었을 때, 그 수 천만 세대를 거듭해서 온 그 노력은 일시에 물거품이 된다. 그런데 지구는 반드시 멸망한다. 이 우주에서 영원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우주 자체도 없어질지도 모르는 마당에 이런 작은 행성 하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이드의 관점은 흔들림이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생존하고 미래에 후대를 연결시켜주면 된다. 하지만 에고는 다르다. 에고는 이드처럼 단순하지 않다.
 
에고는 이드에게 없었던 이유가 필요하다. 욕망을 가져야 하고 무엇인가 이루어야 한다. 또한 가치를 찾아서 그것을 위해 사는 것이 매우 뜻 깊고 절대적으로 의미가 있길 바란다. 이 에고의 허영심은 결국 우리 개개인이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하게 밀어 붙인다.
 
그래서 좋은 차를 사려고 하고, 좋은 집, 좋은 가방, 멋진 배우자와 결혼하고 평가가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한다. 당장 하루만 지나도 똥이 되어서 나올 먹을 것도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런 삶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 부지런히 성현들의 책을 읽고 좀 더 행동적인 사람이라면 숲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살거나 아예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동조차도 에고의 또 다른 변형된 모습이다. 단지 에고가 가치의 기준점을 바꾼 것일 뿐, 차를 욕망하는 일반인이나 깨달음을 욕망하는 스님 모두 같은 모습니다. 물론 에고를 넘어선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에고를 넘어서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닌 듯싶다. 단지 그렇게 하는 분들은 정말로 드물다는 점이 문제이지만.
 
그렇지만 누군가는 수십 억 원의 스포츠카에서 가치를 느끼고 누군가는 갓 채취한 산나물의 향취에서 가치를 느낀다. 이것은 가치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카를 버리고 산으로 간 이는 스포츠카를 쫓는 삶을 비판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진 가치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비판이 바로 에고의 활동 모습이다. 우리는 모두 에고를 갖고 있기에 자신의 가치를 비호하면서 자신이 가치 없다고 판단한 것을 폄훼한다. 그것이 낮은 평가를 받을수록 나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스포츠카를 타는 사람은 황당하다. 자신은 단지 자신의 에고를 추종했을 뿐인데 또 다른 자신의 에고를 추종한, 근본적으로 똑같은 사람이 어이없게 자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그 비싼 스포츠카를 사는데 나쁜 짓을 했다면 법적인 처벌을 받아야 하겠지만, 이 사람은 황당하게도 도덕적 비판을 받는다.
 
물론 모든 가치가 전체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람들마다 평가는 다르다는 점은 존재한다. 변태 성욕에 대한 가치를 가진 사람과 남을 돕는 것을 가치로 삼은 사람이 모두 같은 평가를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은 인간 전체에 대한 이득의 관점에서는 다르게 다뤄져야 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전체화된 에고일 뿐이다. 우리 인간 종족의 영원한 군림을 위한, 아니면 이 지구의 영원한 군림을 위한 모든 인간 안에 존재하는 에고의 총합이다. 도대체 이 우주조차도 왜 만들어졌고, 왜 존재해야 하는지 설명할 수 없는 마당에 우리는 이 조그만 행성 하나를 두고 그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 맨 얼굴이다.
 
우리가 에고의 노예임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고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에고를 바라보는 노력을 하게 되면 훨씬 더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에고를 꿰뚫어 봄으로써 에고가 만든 허영심 거품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어처구니 없는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내려 놓을 수 있다. 이것은 생각보다 행복한 일이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가 줄어들면 욕망이 줄어든다. 이것을 다른 말로 '내려 놓는다' 라는 표현을 쓴다.
 
지금 행복하다면 에고가 충분히 활동 중이고 어느 정도는 만족하는 삶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리 행복하지 못하다면 에고의 기대치에 못 미치고 있는 형편이다. 이때는 에고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에고의 허영심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또한 지금 행복하다고 해서 거기에 만족하다간 언제 에고에게 뒤통수 맞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사는 삶은 생각보다 우연함이 크게 작용한다. 우린 언제 팔다리에 문제가 생겨서 걷기도 힘들게 될지도 모르고, 우리는 언제 평생 가치를 부여한 일이 아무런 의미없게 될지도 모른다. 우린 언제 직장에서 잘리지도 모르고, 심지어 우린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
 
이 중에서 죽는 것이 에고 입장에서는 가장 편하긴 하다. 더 이상 에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에고는 바라보는 훈련을 해놓지 않으면 좀처럼 바라보는 것 자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왜 화가 나는지, 왜 슬픈지, 왜 불행하게 느끼는지, 왜 불안한지, 왜 저 말이 신경 쓰이는지, 왜 거울 속 자신이 생각보다 안 예쁜지 알 길이 없다.
 
인간이 늙어가는 과정은 바로 에고의 기대치에 계속 제대로 부흥하지 못하게 되는 과정의 연속이다. 이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내려 놓든가, 바둥거리든가.
 
어떤 삶을 선택할지는 개인의 영역이다. 그리고 에고를 바라 보는 법을 익힌 사람은 그 자신이 큰 행운을 얻었음을 알아야 한다. 적어도 그는 무엇이 문제인지는 파악은 할 수 있다. 물론 알든 모르든 정답이 없다는 점은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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