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불행함을 통해 배우는 것들

아이루다 2014. 10. 10. 08:20

 
인간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직업이 있다. 아마도 수만 가지 혹은 수십 만가지 종류의 직업이 있을 것이고, 그것도 매일 새롭게 생겨나고 있고, 있던 직업이 없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직업들 중에서 흥미롭게도 인간의 불행함이 있어야만 하는 직종이 있다. 즉, 그런 직업들은 사람들의 불행을 기반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직업인 셈이다.
 
그것의 가장 대표적인 직업이 바로 의사이다. 의사는 사람들이 아파야 먹고 산다. 그런데 의사들은 사람들을 치료하며, 표면적으로는 누구도 아프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로 누구도 아프지 않는 세상이 되면, 그들은 먹고 살 길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니 고객이 건강하길 바란다는 병원의 광고는 잘 생각해보면 어처구니 없기도 한다.
 
소방수도 그런 직업이다. 어떤 장소에 불이 난다는 것은 그 당사자들에겐 큰 불행함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분야 역시도 다수의 사망자가 나올 수 있는 심각한 현장이 제법 존재하는, 불행함으로 따지면 몇 순위 안에 들만큼 큰 고통이 존재하는 분야이다.
 
그리고 소방관 역시도 불이 나지 않는 세상을 꿈꾸지만, 실제로 불이 나지 않는 세상이 되면 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할 처지가 되어 버린다. 이런 직업은 도둑을 잡는 경찰, 조난자를 구출하는 수색대, 전쟁을 대비하는 군인, 사람들의 분쟁을 해결해야 하는 법 관련 종사자들 등등 꽤나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불행함을 기반으로 하는 사람들과 달리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직업도 있다. 즐거움을 주는 연예인이나 영화 감독, 놀이공원 종사자, 각종 휴가지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그리고 예술가들도 그런 직업 중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분명히 불행함보다 행복함을 선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더 고맙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의사와 소방수와 같은 불행함을 통해 먹고 사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들에게나 혹은 우리의 불행을 해결해주는 이들 모두에게 돈을 지불하지만, 불행을 해결해주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더 큰 고마움을 느낀다.
 
물론 어떤 영감을 주는 위대한 감독이나 예술가 등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의미의 감사함이 존재할 수 있다. 위대한 철학자나 정신적 스승으로 알려진 이들의 삶은 우리에게 다른 시선으로 삶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아주 가끔은 그들을 통해서 고통을 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불행함을 꺼려한다. 아프거나, 집에 불이 나거나, 사용하는 제품이 고장 나거나 하는 것은 모두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그래서 평소에 이 불행함을 멀리 하고자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운동을 하거나 보험에 들거나 조심스럽게 제품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그럼에도 불행함은 어느 날 우연히 그리고 급작스럽게 찾아온다. 그래서 건강검진을 받다가 암을 발견하기도 하고, 집에 불이나 홀라당 다 타 버리기도 하고, 자동차나 냉장고가 고장 나기도 한다.
 
이런 불행함은 우리가 참으로 멀리 하고 싶어 하지만, 우리의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린 그런 불행들이 큰 여파를 남기지 않길 바랄 뿐이다. 암에 걸려도 그리 어렵지 않게 치료되길 바라며, 불이 나더라도 보험이 들어서 재산 피해를 최소화 하길 바라며, 제품이 고장 나면 언제든 서비스 센터에 연락해서 고칠 수 있길 바란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이런 불행함을 처리하는 수 많은 직업과 관련된 장치들이 되어 있다. 그렇게 우리는 불행함에 나름대로 맞서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이런 불행함이 있기에 우리가 새롭게 느끼고 배우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마치 고통의 과정이 있기에 그 결과물이 가치 있어지는 것과 같다. 실제로 우리가 어떤 것을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은 거의 대부분 고통을 통해 얻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많은 가정에서는 아이를 키우는 것에 매우 큰 가치를 부여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사랑의 감정이며 또한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키운다는 본능적 감정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아이를 키우는 거의 대부분의 부모들은 그것으로 통해 커다란 행복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를 키우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은 그것이 매우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란 것을 간과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만약 아이를 키우는 것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면 그 가치는 그리 높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아이를 낳기만 하면 알아서 크는 형태라면, 혹은 낳는 것조차 그리 어렵지 않게 낳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아이에 대한 가치를 가질 수 있겠는가?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은, 그 산이 오르기 힘들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술적 작품을 만드는 과정 역시도 창작의 고통이 있기에 가치가 있어지며, 힘들게 일하여 살아가는 것도 그 노동 속의 고통이 있기에 월말에 받는 돈이 가치 있어지는 것이 된다. 그리고 우린 아픈 몸을 통해서 건강의 소중함을 인식하며 의사의 고마움도 알게 된다.
 
그래서 실제로 모든 가치는 고통, 즉 불행함을 통해 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삶의 방향을 무조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려는 쪽으로 잡는 경향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많은 글과 이야기에서 어떻게 하면 행복할 것인가 혹은 행복한 삶만이 유일한 가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의 위험함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연 오직 행복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온전히 참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행복한 돼지와 비슷하다. 매일매일 위가 터질 듯 먹는 행복한 돼지는 먹고, 자고, 싸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돼지에겐 밖에 나갈 자유는 없지만, 늘 그 자리에서 언제나 먹고 잘 수 있는 행복이 있기에 그냥 거기에 죽을 때까지 살면 된다. 이것이 돼지의 행복인데, 과연 이 행복이 우리가 말하는 행복의 가치를 대변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이런 작은 생각의 변화는 우리가 고통과 불행함을 어떻게 받아드릴 수 있을지에 대한 조그만 단초를 제공한다.
 
정말로 우리에게 고통과 불행함은 절대적으로 악인 것인가?
 
물론 사람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고통과 불행함을 피하려고 애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불행할 것 같으면 미리미리 비껴서는 것에 익숙하다. 심지어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이나 혹은 생각하는 것이 그리 행복한 일이 아니기에 결국 머리 속에서 그런 사고 자체를 없애 버리거나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이가 부지기수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삶을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득을 손쉽게 얻을 수 있을까에 집착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은 직업으로, 사람간의 관계로, 살아가는 이유로 그리고 존재의 목적으로 정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피하는 것을 통해서 행복하긴 해졌지만, 고통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가치는 좀처럼 찾기가 힘들어져 버렸다. 그래서 이젠 우연히 꽂히거나 혹은 자신의 취향을 가치화 시켜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가치를 생성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그것이 무리인 경우가 발생하고 또한 그 무리를 극복하려다 보니, 자신이 원래 추구하는 가치에 너무 많은 것을 얹은 꼴이 되어 버렸다. 즉 결국엔, 원래 자신이 하고픈 이유는 희미하게 사라지고, 남들에게 말해서 공감을 얻기 쉬운 것들만 잔뜩 포장한 형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그냥 산이 오르는 것이 좋아야 하지만, 우린 이젠 산을 오르는 것은 단지 시작점에 불과하게 되었다. 우리는 산에 오르면서 맛난 것을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며, 경치가 좋은 곳에서 사진을 찍어 남들과 공유하는 것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런 삶을 사는 자신이 휴일 날 낮잠이나 자는 이들에 비해서 꽤나 괜찮은 삶을 산다고 자위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숨은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느끼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멋진 풍광을 눈으로 직접 보는 호사를 누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이젠 우리에게 그런 흔한 것은 이미 딱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닌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산을 오르는 동안 피곤함을 호소하는 근육과 거친 호흡 그리고 머리 속으로 끝없이 밀려 오는 자신의 본질적 물음에 대한 의식은 분명히 고통이겠지만, 결국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린 산에 오르는 것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젠 맛있는 음식과 지인들과 환담 그리고 어딘가를 가서 남긴 사진으로 그 고통은 최소화시키고 더 행복함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젠 산에 갈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그런 과정으로 인해서 우린 어떤 산에 오르든 모두 같은 산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즉 우린 어떤 산에 오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먹고 이야기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그것조차도 지겨워지기 시작한 사람들은 산행을 끝내고 술을 마시고 거하게 취하고 싶어 하게 되었다. 이젠 산행이 막걸리를 마시는 목표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젠 우리 모두가 점점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굳게 뭉치고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혼자 있는 것을 피할 수 있겠는가?
 
물론 스마트 폰이란 멋진 기계는 화장실, 지하철 안, 잠자기 직전, 잠을 깬 직후 모두 그나마 혼자 있는 시간마저 이젠 혼자 있지 않게끔 해주긴 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는 점점 더 관계에 집착하고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자신이 속한 모임에서 원하는 일을 하려고 하고, 그 안에서 인정 받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된다. 그것은 스스로 우리에 갇힌 돼지의 삶이 되어가는 것이다. 이 때 우리는 자유는 잃고 행복은 커지고 있다.
 
의사의 가치는 병이 생기는 불행함에서 출발한다. 의사는 병이 없는 행복한 세상을 꿈꾸지만, 병이 없는 세상이 되면 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은 우리가 사는 삶의 본질이다.
 
불행함은 절대로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불행함과 고통이 있기에 우리는 가치를 배울 수 있고 그것을 마음 속에 간직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 즉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 준다.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를 열 가지만 말해보도록 하자. 그것을 만족할만하게 열 개를 채우는 이는 과연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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