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균형 잡기

아이루다 2014. 10. 15. 11:04

 
하루는 부처에게 신이 절대적으로 있다고 믿는 사람이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부처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이 있다는 것을 믿느냐고 말이다. 그러자 부처는 신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신을 믿는 사람은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부처를 비판하면서 떠나갔다고 한다.
 
다음 날, 이번엔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이 부처를 찾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도 역시 부처에게 신이 있다고 믿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는 신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은 부처를 사기꾼이라고 욕하면서 떠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날 모두 부처와 함께 했던 제자는 안절부절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처가 제자에게 왜 그렇게 안절부절 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제자는 '스승님께서는 하루는 신이 없다고 하시고, 하루는 신이 있다고 하시니, 사람들이 스승님을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럽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자 부처는 씩 웃으면서 나는 그들에게 그 자신이 믿는 절대적 믿음에 대해서 균형을 맞춰주기 위해서 그렇게 대답을 했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신을 극단적으로 믿는 이에겐 반대편 극단을, 신을 극단적으로 믿지 않는 이에게도 반대편 극단을, 그래서 결국 그 둘이 모두 가운데로 올 수 있도록 말이다.
 
이 이야기는 내가 어느 책을 읽다가 우연히 읽었던 부처님에 대한 에피소드인데, 생각보다 부처님의 삶이 재밌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억이 난다.
 
이 이야기는 어떤 개인의 극단적인 쏠림 현상에 대한 문제점을 말해주고 있다. 물론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자신이 평소에 얼마나 극단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부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이란 것을 꽤나 경계하는 편이다. 그래서 보통 자신은 극단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다가 누군가 어떤 주장을 너무도 강하게 하면, 당신은 왜 그렇게 극단적이냐 라고 비난하거나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당사자는 정말로 극단적이지 않을까?
 
보통 극단적이다 라는 표현은 다양한 의견이 충돌할 경우에, 한쪽 면만을 무조건 옳다고 주장할 경우에 적용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대상 전체가 극단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한국과 일본 축구 경기가 벌어질 때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한국을 응원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에, 누구도 이것을 극단적이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자. 이것이 과연 극단적인 것이 아닌 것인가?
 
극단적이란 말은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 넓은 영역에서 양쪽 끝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데 경기에서 한쪽의 승리만을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과 부합하는 일이다. 물론 일본 사람들은 일본의 승리를 원하고 응원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 역시도 극단적이다.
 
그런데 그냥 단순히 생각해보면, 이런 승부에서 극단적인 것이 아닌 부분이 과연 존재 할 수나 있을까?
 
놀랍게도 대답은 '있다'. 아주 작지만, 그냥 승부를 즐기는 것. 누가 이기든 상관하지 않고 진정한 스포츠 정신처럼 최선을 다하고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중심점이 될 수 있다. 우리가 4년마다 치르는 올림픽의 정신은 역시도 ‘올림픽 대회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 라고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면서도 승부에 연연하고, 그 승부가 자신과 관련이 있으면 바로 극단적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우린 이것을 극단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이것은 상식이며, 당연한 것이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은 매국노가 되고 국가에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선택을 하고, 확신을 갖게 됨으로써 결국 극단적으로 변한다. 또한 그것을 정의로움이라고 믿고,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래서 우린 늘 싸우게 된다. 왜냐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있다면 일본 국민도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확신을 근거로 한 극단적 사고는 늘 갈등을 야기 시킨다. 그리고 갈등은 다양한 형태의 비용을 생성하고 우린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아주 불필요한 노력을 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승부를 즐기는 이유는 그냥 이기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 이긴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그것은 그냥 축구 선수들이 이긴 것이지 대한민국이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서 뭔가 이득을 본다면 바로 축구 선수들이며, 우린 이겼다는 기분으로 이득을 얻었다고 믿는다. 즉, 기분이 좋기 위해서 극단적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승부는 우리의 생존에 대한 욕구와 연결되어 있다. 원래 모든 생명체는 지는 것보다 이기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지는 것은 바로 죽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린 축구 경기에 졌다고 해서 죽는 것도 아닌데 그것에 대해 강한 승부욕을 느낀다. 그것은 바로 확신에 의한 극단적인 사고 방식 때문에 그렇다.
 
이것은 아주 평범하고 누구나 그렇기에 이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또한 그런 생각으로 구성된 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많은 확신은 충돌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축구 경기 수준이 아니다.
 
남녀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 계급 갈등 등등 우리가 책임져야 할 갈등은 도대체 끝이 없다. 그리고 이런 갈등이 모여서 우리 전체를 불행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없을까?
 
우린 여기에서 부처님의 생각을 도입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극단을 바로 잡는 균형이다.
 
균형, 다른 말로 중용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이 상태는 공자님도 무척 중요한 것으로 강조한 덕목이다. 또한 서양 철학의 시작으로 알려진 소크라테스 역시도 '의심'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전혀 다른 것 같은 중용, 의심, 균형 등은 모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떤 사고나 사상, 종교, 자기 확신 등에 빠졌을 때 그것을 어떻게 바라 봐야 하는 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신은 우리 삶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기 때문에 확신을 가진 것에 대해서 의심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떤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를 우리는 보통 불안정하고 불편한 상태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원전 건설 문제로 사회가 시끄러울 때, 서로 이야기를 들어보고 뭔가 한쪽 편을 들기가 애매할 경우, 우리는 그냥 그 생각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은 이것에 대해 꽤나 확고한 이론과 근거를 통해 명확하게 입장을 표명한다.
 
이런 식으로 어떤 생각들의 충돌이 일어나면 그때 우리가 하는 것은 양쪽 극단을 선택하든가, 아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방법을 쓴다. 보통 남자들은 극단을 선택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여자들은 생각을 없애는 쪽으로 움직인다.
 
이것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렇게 해야 불확정성도 없어지고 그로 인한 불안함도 없어지면서 결국 그로 인해서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균형이나 중용은 실제로 힘든 과정이며 행복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사는 것은 매우 어렵다. 또한 잘못하면 의견을 제대로 제시하지 않는 회색주의자로 몰릴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린 어느 한쪽을 반드시 선택해야 하는 극단주의가 되길 바래진다.
 
그리고 이렇게 더 강한 극단주의자일수록 확신이나 신념, 믿음이 있다고 믿어지기에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그래서 추종자도 많이 생겨나며 결국 어떤 힘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무리는 반대 극에 서있는 무리와 강한 충돌을 일으킨다.
 
하지만 우리가 절대로 잊지 말라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는 누구나 이기주의자란 점이다. 본질적으로 보면, 단지 그 이기주의가 어느 범위로 한정되느냐에 따라서 우린 입장이 다른 것뿐이다. 예를 들어서 이득 범위가 자신과 가족 범위에 한정되는 사람들은 많은 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공동체의 이득을 위한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가 단위에서는 거의 명백한 입장을 취한다.
 
즉, 누구나 자신이 속한 나라의 이득을 원한다.
 
이런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 균형에 대한 작은 힌트를 준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자신이 옳다고 믿고 주장하든 상관없이, 반대편 극에 서있는 존재들과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는 점이다. 이것을 ‘극과 극은 통한다’ 라고 말할 수도 있고, ‘극과 극은 실제로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한쪽을 선택했다고 믿는 우리들은 다른 극을 용서하거나 이해할 마음이 없다. 그래서 서로 더욱 더 심한 상처를 주고, 그것을 달성했을 때 승리감을 맛본다. 하지만 그로 인해서 점점 더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결국 우리가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 유일한 방법은 다시 외부에 공동의 적을 만드는 수 밖에 없다. 즉, 우리는 늘 더 큰 범위의 극단화와 그 반대 극을 만듦으로써 우리의 작은 극과 극의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을 써왔다.
 
국가별 전국대회에서는 전국의 각 시와 군을 기준으로 싸우지만, 국제 대회로 가면 이젠 언제 싸웠냐는 듯 손을 잡고 국가를 기준으로 싸운다. 그냥 이것은 끝없이 극의 규모만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전 인류가 하나의 같은 극으로 모이는 날은 아마도 외계인이 지구를 정복하려고 오는 날일 것이다. 물론 그때도 지금처럼 자기가 서야 할 극을 배신하고 더 강한 쪽으로 붙는 존재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래 극에 남은 사람들은 그들을 배신자, 인류의 매국노 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보았을 때, 서로는 각자 입장에 따라 극에 선 것이다. 이 선택은 무한히 자유롭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지구와 외계인들과의 전쟁에서 운 좋게 인류가 이겼다면 배신자들은 처단을 당할 것이다.
 
그래야 미래의 배신자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승자와 패자의 절차이지, 옳고 그름 혹은 정의와 악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이 서 있는 극이 옳고 정의로우며 선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선과 악은 끝없이 자신의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슴을 잡아 먹는 사자에게는 그런 정당성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일 뿐이다. 잡힌 사슴은 운이 다한 것이고 사슴을 잡은 사자는 그날 운이 좋은 것이다. 그냥 그것은 흔한 일 중 하나인 것이다.
 
사자가 정의로움을 위해 사슴을 잡거나, 혹은 사슴이 정의로움을 위해 도망치는 세상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웃기는 것인가? 우리가 외계인으로부터 침략을 받아서 싸운다면 그것은 정의로움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그냥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 단지 생존에 대한 욕구를 최대한 채우고 있는 일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이야기의 결론은 균형으로 되돌아 갈 수 밖에 없다. 정의로움, 옳음, 상식 등의 극단적 사고가 없어지면 모두 중심에 모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작은 에피소드가 우리에게 주는 명쾌한 가르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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