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왜 사는가?

아이루다 2014. 10. 17. 07:36

 
인간이 동물과 다르다고 가정 한다면, 무엇이 가장 큰 증거가 될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그 답은 '스스로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태도'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대답에는 많은 다양한 표현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각', '자기 인식', '각성'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으며, 이 모든 표현은 비록 선택된 단어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에 대해 '왜 사는지' 를 묻는 질문이다.
 
하지만 이 오래된 질문은 수천 년의 역사를 걸쳐 철학이란 학문으로 정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그 어느 누구도 정답을 내지 못했다. 물론 지금까지 제시 되었던 답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답이 많은 철학자나 종교가에 의해서 주장되었지만, 그 중에서 어떤 답도 정답으로 만장일치를 보지 못했다.
 
그나마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가장 확신 있는 답을 내놓고,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답은 바로 종교 전문가들이 내놓은 것일 것이다. 이들은 그보다 먼저 명시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신의 존재를 통해 우리 인간 개개인의 존재를 증명하는 답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답은 적어도 그 종교를 믿는 사람들 안에서만큼은 정답이 된다.
 
하지만 이것은 종교의 다양함만큼 많은 답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떤 하나의 문제에 있어서 많은 정답이 존재한다면, 안타깝게도 그 답들은 모두 오답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왜냐하면 양립이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그들 모두 동시에 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로 봤을 때,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역사 속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의 답을 내기 위해서 노력해왔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류사에 있어서 철학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철학은 조금도 발전하고 있지 못하다. 그저 변형되고 있을 뿐이다.
 
아무튼 나름대로 똑똑하고 생각을 많이 한다는 이들이 답을 내기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조금 비슷하지만 다른 질문을 하나 생각해 냈다. 그 질문은 바로 '왜 살아야 하는가' 이다.
 
'왜 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 는 참 비슷한 말이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의미는 완전히 차이가 난다. 왜 사는가는 존재의 절대적 필요성에 대한 질문이고, 왜 살아야 하는가는 존재에 대한 상대적 필요성에 대한 질문이다. 그리고 후자가 훨씬 답을 내기가 쉽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아이를 가진 부모는 답이 이미 나와 있다. 아이를 잘 키워야 하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 좋아하는 취미를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취미를 함으로써 행복하기에 살아야 한다. 즉, 왜 살아야 하는가는 모두 행복하기 때문에 살아야 한다는 대답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차이는 단지 무엇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느냐의 방법론적 차이만 존재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행복하지 못하면 왜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역 논리도 가능하다. 즉, 우리가 죽는 이유는 바로 불행하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정확히 현실과 일치한다.
 
그래서 왜 사는지는 몰라도 왜 살아야 하는지는 알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왜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자신이 왜 반드시 존재하는지는 몰라도, 이미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면 계속 살아갈 이유는 찾은 것이다. 그리고 더해서 종교를 갖게 되면 비록 그것이 오답이라고 해도 왜 사는지에 대한 답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계속 왜 사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입장에서 보면, 이런 사람들이 답답해 보인다. 도대체 왜 사는지에 대한 아무런 답도 없으면서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덜 떨어진 사람이나 심하게 표현하면 도대체 정말로 '왜 사는지'가 궁금하다.
 
왜냐하면 이 상태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써 살아가게 된 것은 바로 존재적 질문을 던지면서인데, 그 질문을 잊어 버리고 사는 것은 바로 그들 스스로가 동물과 다름이 없다고 인정하는 꼴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왜 사는지 궁금한 이는 이것을 궁금해 하지 않는 이들에게 강하게 설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그 답을 모르기 때문이며, 오랜 시간을 생각해봤지만 답을 찾을 가능성이 매우 낮아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도 답을 낼 수 없는 문제를 다른 이들에게 이것을 풀어야 한다고 우기는 모습은 우스운 상황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나 자신도 이 우스운 짓을 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런데 최근에 거의 결론을 내었다. 그것은 바로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은 불가능 하다 라는 결론이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가장 큰 이유가 존재에 대한 절대적 가치를 증명 받고자 하는 존재적 허영심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생각이 인간 전체적으로 유효한 공통적인 진리라고는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것은 오직 나 자신 안에서 생각과 경험을 기반으로 내린 결론일 뿐이다. 즉, 이 역시도 그냥 평범한 오답 중 하나일 것이란 뜻이다.
 
아무튼 이 결론은 나 자신에게 더 이상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멈추게 했다. 물론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 역시도 무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추가적인 질문은 존재의 절대적 가치를 설명할 수 없게 된 인간이 존재의 상대적 가치라도 얻기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절대적으로 존재할 필요를 찾을 수 없으니, 상대적으로라도 존재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 대안으로 제시된 질문은 시작부터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하늘을 날고 싶다면 비행기를 타는 것이 정답이지만, 높은 곳에서 추락하면서 그것을 '날고 있다고' 우기는 꼴인 것이다. 물론 순간만을 보았을 땐 그것도 날고 있는 것은 맞다. 단지 단 한 번만 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그래서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평생에 걸쳐서 왜 살아야 하는지에 끝없이 집착한다. 그것은 아이, 취미, 가치, 사상, 종교, 인간다움, 행복, 정의 등등의 우리가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이 바로 그 대상이 된다. 우리 안에 있는 자아, 즉 에고는 우리가 악한 것이라고 말하는 질투, 분노, 미움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선한 것이라고 믿는 관용, 용서, 사랑까지를 모두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로 믿는다.
 
하지만 이미 말했듯,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무리 찾아봐야 결국 대안일 뿐이다. 즉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엔 추락하고 있는 것뿐이다. 결코 우리는 날고 있지 못하다. 단지 모두가 같이 추락하고 있고 평생에 걸쳐서 추락하기 때문에 이 상태를 날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정말로 나는 사람이 생겨나면 따르는 무리가 생겨나며 존경과 믿음이 생겨나서 결국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날았다고 알려진 사람은 신이 된다.
 
하지만 추락하는 이들에게 나는 이들의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다. 실제로 그들이 정말로 나는지, 아니면 낙하산을 펴서 추락 속도를 줄였는지조차 알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보다 추락 속도가 조금이라도 줄어들게 되면 같이 떨어지고 있던 이들의 시야에서 금새 사라져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사라진 존재에 대해서 알 수 없는 상태가 되며 결국 막연한 환상을 품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훗날 날았던 사람들로 기록되고,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되어서 이들이 살아 생전에 한 말들은 고귀한 말씀으로 기록되어 널리 퍼지게 된다.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지만, 혹시나 날았을지도 모른 이들이 존재했다는 전설은 추락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주 실낱 같은 희망을 갖게 해준다. 하지만 문제는 정말로 그들이 날았냐 에 대한 질문과 과연 그들을 믿으면 우리들도 추락을 멈추고 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 남아 있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은 종교 생활을 통해 제대로 믿으면 그 자신도 날 수 있다고 믿긴 한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왜 사는지에 대한 의도적인 답을 찾는 것은 멈췄지만, 왜 사는지를 알 수도 있다는 희망까지는 버리지 않았다. 이것은 노력을 하지 않는 노력인 것이다. 또한 의도하지 않는 의도일 수도 있다.
 
이것은 원래 처음 던졌던 질문과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원래 왜 사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은 바로 존재에 대한 절대적 필요성을 기반으로 한, 자아의 존재 가치 욕구였다. 즉,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어야 하고, 또한 필요도 있어야 하며, 절대적으로 일어날 사건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무엇인가 절대적으로 의미를 가진 존재 이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본능과도 같은 욕구이다. 우리는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마다 격렬하게 생명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하지만 만약 우리 자신이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라면 그 반항은 얼마나 무의미한 짓인가?
 
그래서 우리에겐 이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사는지를 알고 싶지만, 알 수 없으니 왜 살아야 하는지 정도 까지만 생각하면서 산다.
 
반면에 왜 사는지에 대한 질문 던지기를 포기하고 (이 말은 자아의 존재 가치 욕구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는 아님을 받아들이고 인정한 후, 혹시나 왜 사는지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사는 모습이 바로 새로운 '왜 사는지'에 대한 접근법이다.
 
이것은 미묘하게 다르다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긴 하다. 왜냐하면 원래 우리가 처음 가졌던 '왜 사는지' 는 제대로 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아의 또 다른 욕구이며 욕심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이 만들어 낸 철학과 종교에는 우리들의 오만함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인간이 특별한 존재 이길 바란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땅이 특별해서 지구가 우주의 중심 이길 바랬고, 우리는 육체를 뛰어 넘는 영혼을 가지고 있길 바랬다.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다른 동물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 이길 바랬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왜 사는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 미몽을 깨어나고 나면 현실이 보인다. 우리에게 왜 사는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존재할 뿐이다. 좀 더 정답에 가까운 설명이라면 우린 그냥 운이 좋아서 존재한 것이다. 우리 각자가 처음 만들어진 순간에 난자와 첫 번째로 결합할 수 있었던 정자의 운 좋음이 그 시작이 된다. 물론 그 전에는 남자의 자위 행위가 아니었어야 했고, 피임이 되지 않았어야 하는 운이 먼저 작용했어야 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왜 사는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나면, 우리는 새로운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 경험은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도 미지의 영역이며, 경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자신도 없고, 큰 기대도 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단지 이 시점에 알 수 있는 것은, 희망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바로 원래 처음 가졌던 '왜 사는지'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그것을 버리면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힘들 것 같다면 그냥 '왜 살아야 하는지' 에 대한 답을 찾고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다.
 
지금 이것이 나의 현재 상태이기도 하다. 그리고 더해서 왜 사는지를 알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마음 속에 품고 살아가고 있다.
 
 

 

'인간과철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왜 그 일이 나에게 일어난 것일까?  (0) 2014.10.23
검은 늑대, 하얀 늑대  (0) 2014.10.18
균형 잡기  (0) 2014.10.15
나쁜 사람, 착한 사람  (0) 2014.10.11
불행함을 통해 배우는 것들  (0) 2014.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