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산다는 것은

아이루다 2014. 9. 1. 09:06

원래 처음부터 태어나고자 태어난 것은 아니죠. 어떤 이들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만, 보통은 그렇게 태어나지 못합니다.
 
태어났으니 살아야죠. 평생 얼마간을 살아갈지는 죽는 그 순간에 알 수 있지만,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갑니다. 100년을 산다면 일년에 1/100씩 죽어가고 20년을 산다면 일년에 1/20씩 죽어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죽음의 반대인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그것을 삶이라고 부르든, 죽음의 과정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단지 우리의 언어 유희일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체 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행하며 지내는지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전체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이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행복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우리는 건강하길 바라며, 돈을 많이 벌길 바라며, 자신에게 일어날 나쁜 일들이 가능하면 충격이 작길 바랍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를 사귀길 바라며, 좋은 이웃이 옆집에 이사오길 바라며, 우리는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만나길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스러운 아이도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가 이것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것들 대부분을 얻는 행운이 있지만, 불행한 어떤 이들은 이들 중 거의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것들을 부분적으로 얻어서 거기에 최대한 만족하며 살아가려고 애씁니다.

 

 

인생은 어떤 의미에서 다듬어지지 않고 돌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산길과 같습니다.
 
그래서 잘못 걷다간 돌부리에 채어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넘어지려고 밑만 보고 걷다간 남들은 휑하니 앞서 나갑니다. 물론 바닥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 이들은 빠르긴 하지만 가끔 넘어져 크게 다치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본 우리는 빨리 가자니 넘어질까 봐 불안하고 밑을 보고 천천히 가자니 뒤쳐질까 봐 또 불안합니다.
 
살다 보니 어떤 이들은 어디엔가 집중하며 자신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친 돌길을 걸을 때나 부드러운 흙 길을 걸을 때나 늘 같은 표정으로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그것만을 바라 봅니다.
 
돌부리에 걸리까 봐 노심초사인 사람들은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합니다. 빠르게 앞만 보고 걷는 이들은 왜 저러고 있느냐고, 다른 사람들이 달리는 것이 안보이냐고 질책합니다. 하지만 집중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이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자신이 집중하고 있는 것만이 눈에 들어 옵니다.
 
그래서 걱정이 없어 보입니다. 또 그래서 행복해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집중할 수 있는 것을 원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세상은 우리가 집중할 수 있는 거리들을 많이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는 가정에 집중하고, 연인에게 집중하고, 공부에 집중하고, 일에 집중하고, 축구에 집중하고, 사진 찍는 것에 집중하고, 자전거에 집중합니다. 우리는 TV에 집중하고, 스마트 폰 속의 채팅 방에 집중하고, 돈 버는 것에 집중하고, 먹는 것에 집중하고, 집 짓기에 집중하고, 텃밭에 집중하고, 여행에 집중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줍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집중은 정말로 행복한 것인가?
 
어떤 이들은 도박에 집중하고, 담배에 집중하고, 술자리에 집중하고, 마약에 집중하고, 게임에 집중하고, 섹스에 집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집중하면 우리는 이것을 중독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집중과 중독의 경계가 혼란스러워집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집중과 중독은 같은 말입니다. 도저히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하나 찾아 낸다면 타인들의 평가입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다른 이들이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지에 대한 평가입니다.
 
돈을 버는 집중은 남들에게 부러움을 삽니다. 건강하게 해주는 집중 역시도 마찬가집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집중은 열정이라고 하고,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집중은 도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몸을 아프게 하는 집중은 중독이라고 합니다. 돈을 못벌거나 심하면 많이 쓰는 집중 역시도 중독이라고 합니다. 적당하게 돈을 쓰면서 행복한 집중은 취미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을 오르거나, 남극이나 북극까지 걸어가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이 힘들다는 이유로 인해 집에서 TV 드라마를 보는 집중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둘이 다를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차이라면 높은 산을 오르면 사람들이 좋아하면서 돈을 줍니다. 반대로 집에서 TV만 보고 있으면 누구도 돈을 주지 않습니다.
 
다른 이의 평가와 그로부터 얻어지는 돈이 이 둘의 차이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힘들기로 따지면 성적 만족을 위해 여자의 똥을 구하는 것에 집중하는 사람일 겁니다. 이런 취향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삶이 매우 피곤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위험한 일을 하는 사람을 칭송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그 집중을 변태라고 표현 합니다. 어려운 일을 해도, 정말로 원하는 일을 해도 사람들의 평가는 다릅니다.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관계에 중독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친구들과의 관계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그 전에 그들은 부모에게 중독되어 있었습니다. 직업을 가질 나이가 되면 능력에 중독되고 직장에 중독됩니다. 그리고 먹고 살만하면 취미에 중독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 생애에 걸쳐 생존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또한 행복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중독이란 말이 싫다면 그 모든 것을 집중으로 표현하면 됩니다. 하지만 집착, 집중, 도착증, 중독, 열정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이것들은 무엇에 대한 것이냐에 의해 타인에게 다르게 평가되면서 다른 단어로 해석될 뿐입니다.
 
물론 어떤 중독은 타인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할 것 같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이들의 시선을 제외하고 나면 집중과 중독은 같은 것입니다. 그 둘 모두, 산 길을 걷는 중에 바닥을 바라보지도 열심히 앞을 향해 뛰지도 않고 그저 바라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물론 뛰는 이들 역시도 성공에 집중한 것이고 바닥을 보는 이들도 안전함에 집중하고 있는 것일 뿐일지도 모릅니다.
 
바닥을 보고 걷는 것은 안전하지만 느리고, 뛰는 것은 하고 싶지만 겁이 납니다. 걸려서 넘어지면 많이 다칠 것 같습니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다칩니다. 가끔 운 좋게 끝까지 뛴 이들은 포장되어서 알려집니다. 마치 그들이 정말로 노력해서 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는 이들은 압니다. 그들이 넘어지지 않은 것은 단지 운이 좋은 것일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바닥을 보고 걷지도, 위험하게 뛰지도 않은 삶을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도 다른 이들의 집중을 평가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매일 주어지는 시간은 모두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정해진 시간이 있고 그것을 다 쓰면 죽음이 찾아 옵니다. 그래서 매일 주어진 시간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시간을 잊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장 시간을 잘 잊을 때는 바로 집중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마구 써버릴 때, 행복을 느낍니다. 우리는 시간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죽음에 성큼 다가가는 것에 만족해 합니다.
 
만약 그래서 시간이 아깝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시계만 바라보고 있으면 됩니다. 정말로 시간이 안 갑니다. 누구도 이런 삶을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이 한참 가 있길 바랍니다. 지겨움은 고통이며, 심심함은 불행함으로 느껴집니다.
 
사는 것에 정답은 없습니다. 누구나 자신이 정답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답은 결국 오답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그 문제를 정확히 해석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답을 낸 이는 정말로 소수에 불과합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답은 고사하고 문제에 대한 해석도 제대로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산다는 것에 대한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당연히 답도 모릅니다.
 
산다는 것은 자신이 느끼는 그 모든 것의 비밀을 알아야 겨우 문제라도 조금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행복의 비밀을 알아야 문제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질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만이 유일하게 답을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이것에 대해 정확한 이해를 한 이는 정말로 몇 명 없습니다. 또한 그들조차도 정말로 제대로 이해하고 답을 내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나마도 가장 정답에 근접한 분들일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문제 해석을 통해 오답을 낸 채 자신에 주어진 시간을 다 쓰고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은 돌을 조심해서 걷느냐, 모든 것을 무시하고 뛰느냐, 평생을 집중과 중독 속에서 살다 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돈을 많이 버느냐, 사회적으로 성공하느냐, 많은 사람을 만나느냐, 얼마나 행복하느냐, 죽을 때 친구가 옆에 몇 명 있어주느냐, 행복한 가정을 만드느냐, 인류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기느냐,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을 가봤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이것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단지 삶의 과정에서 만나는 작거나 큰 사건일 뿐입니다. 우리 본질을 이것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저런 모든 것들은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옵니다. 그래서 나와는 관계 없는 타인의 것입니다.
 
그 중요한 행복 역시도 홀로 생겨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행복해 합니다. 어떤 것들은 잠시 행복할 수 있지만 결국 관계가 없다면 금새 시들해집니다.
 
여기까지가 삶에 대해서 평범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최대한의 한계입니다. 이후로는 다른 해석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는 있으나 너무도 멀어 보입니다.
 
이미 강을 건넌 몇 분들은 넘어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다리에 초입에 서 있는 우리는 남겨진 것들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합니다. 또한 정말로 넘어서면 다른 세상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냥 돌길을 계속 걷길 원합니다. 그리고 뛰어가더라도 운이 좋게 넘어지지 않길 바랍니다. 걱정이 많은 이들은 뛰지 못하고 바닥을 보고 걷습니다. 열정에 중독된 사람들은 자신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걷는 중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하루씩 죽어갑니다.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평생의 과정에 걸쳐서 어떻게 하면 폼 나게 죽을 수 있을지, 남들의 선망 어린 눈길을 받을지, 얼마나 부러움을 살지를 고민합니다. 이것을 조금 벗어났다고 해도 결국 얼마나 행복하게 살 지까지를 고민하는 것이 한계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산다는 것에 대해 낼 수 있는 유일한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 해석에 따라 각자 답을 냅니다. 그리고 각자 답에 맞춰 살다가 결국 죽습니다.
 

그리고 끝내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왜 죽는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지길 어색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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