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우리는 왜 인간적일까?

아이루다 2014. 8. 29. 09:13

 
특수 임무에 투입되었던 소수의 군인들은 작전 중 생긴 어떤 문제로 인해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적지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적은 잠시의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끝없이 뒤를 추격해오고 있다.
 
쫓기는 군인들의 무리의 리더인 소령은 그 동안 수없이 치러낸 과거 작전들을 함께 했던 경험을 통해 현재의 동료들에겐 거의 무한한 신뢰를 얻고 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마음은 복잡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그들 무리 중 다리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한 명의 부상자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대원들의 체력이 남아 있어서 다른 부대원들이 부상자를 번갈아 가면서 끌고 가곤 있지만 그는 이것이 반나절 이상을 가지 못함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또한 추가 지원부대는 약속된 것이 없었다. 결국 그는 이제 곧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시간이 온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한 명의 목숨과 다른 여러 명의 부하의 목숨의 무게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영화 중 나오는 흔한 스토리 중 일부이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영화를 찍은 감독은 이제 나머지 스토리 라인을 선택할 때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한다. 일단 보통 일반적인 감독이 선택하는 스토리는 끝까지 부상 입은 동료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 소위 말하는 인간적인 전개이다. 그리고 사실주의를 추구하는 감독은 부상 입은 동료에게 약간의 식량과 충분한 탄창을 남기고 비장한 얼굴로 떠나가는 다른 동료들의 모습을 그려낼 것이다.
 
생각해보니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틈새 시나리오 인데, 부상 입은 군인이 스스로 남겠다고 원하는 것이나 어디론가 숨거나 자살을 해버리는 장면이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가장 좋다. 이런 스스로 한 선택은 남은 자들의 양심도 지켜주고, 자신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게 될 동료를 구하는데도 큰 역할을 한다.
 
아무튼 앞의 두 스토리 라인 역시도 각자 관객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 다음 이야기가 구성된다. 부상자를 데리고 갈 결정을 한 동료들은 이후 수 많은 고생을 하지만 기적적으로 생환을 하며, 반대로 부상자를 선택을 한 이들은 그때 잃어버린 상호 신뢰로 인해 분열되어 결국 모두 죽고 마는 비참한 결론이 난다.
 
그리고 이 영화를 감상한 우리들은 동료를 버리면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된다.
 
그렇지만 현실도 과연 그럴까? 물론 이 모든 것은 가정이기에 딱히 뭐가 옳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정말로 전쟁 중에 저런 상황이라면 동료를 두고 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물론 데리고 가면서 운 좋게도 살아 남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정말로 운이 좋을 때의 이야기이다. 운이 나쁘면 그로 인해 모두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통 우리는 대부분 이런 중요한 일에는 운이 나쁘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영화의 선택적 시나리오 속에서 인간의 두 가지 면을 엿볼 수 있다. 하나는 동료를 살리는 결정을 하게 만드는 마음이며, 다른 하나는 동료를 버리고 자신들의 목숨을 챙기는 결정을 하게 만드는 마음이다.
 
여기에서 관객의 입장으로써 우리는, 보통 영화 속 그들이 동료를 살리는 결정을 하는 것을 바란다. 적어도 그것이 내 목숨이 달린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 결정은 어떤 면에서 그들 당사자를 죽게 만드는 결정이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그 당사자들이라면 안 할 결정을 다른 사람들의 경우엔 하길 바라는 것이 되어 버린다. 정말로 실제 상황에서 우리들 중 누가 저 상황에서 동료를 데리고 가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완전히 반대되는 두 가지 결정을 모두 선택 가능할까? 그것은 양립할 수 없는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힘이 우리를 동료를 살리게도 하고 또한 동료를 버리게도 하는가? 이것은 정말로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악의 문제인가?
 
하지만 단순히 살기 위해서 동료를 두고 가는 모습을 단지 악하다고 평가하거나 동료를 살리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데리고 가는 모습을 오직 선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좀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오늘 쓰고자 하는 글은 바로 이 인간의 두 가지 면, 즉 이기심과 이타심 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두 개의 다른 결정 과정을 가진 우리들 인간에 대한 본질적 이해를 써 볼 생각이다.
 

소위 인간의 본능이라고 하면 주로 먹고, 자고, 싸고 하는 등의 자기 보존의 행동이 손 꼽힌다. 실제로 우리가 산다는 행위 자체 모두가 각자의 삶을 연장하는데 모두 쓰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맛난 것을 먹는 것이 물론 행복을 위해서 하긴 하지만, 그 행복 자체가 바로 생존의 즐거움이다. 요즘 세상은 너무도 물질적으로 풍요해진 환경하에 살기에 생존과 행복의 간극이 무척 많이 벌어져 언뜻 이해되지는 않지만, 행복과 생존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임은 틀림없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더해서 분명하게 남을 돕거나, 자신이 속한 단체를 위해 희생하거나, 아무런 이득을 원하지 않으면서 낯선 자들에게 선의를 베풀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운 상태에서도 동료를 데리고 전장에서 도망치기도 하는 행동을 한다. 과연 이런 자기 손해, 즉 남에게 이득을 안겨주기 위에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행동이 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금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가 요즘처럼 생태계의 정점에 서 있던 존재가 아닌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의 조상은 약하고 겁 많고 다소 비겁한 존재였다. 설령 우리가 진화를 하지 않고 원래 처음부터 인간이었다고 하더라도 대형 육식동물이 살아가고 있는 자연의 비정함은 우리에겐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상대적으로 약한 우리의 조상들은 밤에 습격을 피해 나무 위에서 자야만 했고,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어서 무리를 지어 살아야 했다. 그 당시 우리의 조상은 혼자 살기엔 육체적으로 너무 약한 존재였다. 우린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육체적 힘도 약하고 손, 발톱, 이도 약하고 피부도 약했다.
 
지금 현재도 자연계에는 이런 약한 존재인 토끼나 쥐 사슴 등이 땅 속 굴을 파고 살거나, 나무 위에서 살아가거나, 무리를 지어 행동하는 모습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은 약한 존재가 가야 할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말 그대로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명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 인간은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낙인처럼 새겨진 겁 많은 본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인들도 언제라도 혼자 있게 되면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전등 빛의 밝게 빛나는 자신의 방안에서는 모르겠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우리는 조금만 어둡고 낯선 곳에 있게 되면 마음 한구석에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에게 있어서 어둠과 낯선 것에 대한 공포는 머리 속에서 이뤄지는 환상이나 생각이 아닌 타고난 본능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끝없이 공포와 싸워야 한다. 공포는 고통이며, 불행함이며 결국 가장 피하고 싶은 죽음을 향하고 있다. 지금도 인간의 어린 아이는 그 공포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표현을 한다. 그것은 무서움을 느끼자마자 울면서 부모의 품으로 뛰어 들어가서 우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 유전자 속에 우리 조상의 약하고 비겁하고 공포심에 떠는 본능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용기를 내야만 했다. 잘 생각해보면 용기를 낸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용기가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용감했다면 우리는 용기를 낼 필요가 없었다. 차라리 용기가 만용이 되지 않기 위해서 두려움을 끄집어 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육체적으로 약했던 우리는 두뇌라는 강력한 무기를 얻어서 결국 지구 생태계에서 그 어떤 존재도 이룩하지 못한 문명을 이룩하고 거대한 사회를 만들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문명이 주는 힘으로 우리 자신을 보호하고 단체의 힘으로 인간 전체를 강하게 만들었다.
 
결론적으로 이젠 우리 인간은 문명 안에서만 머물면 다른 인간만이 두려움의 대상일 뿐, 그 어떤 존재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어졌다. 호랑이와 사자와 같은 포식자들은 동물원이나 사파리에서 구경하면 되고, 자연계에서 있는 존재들이라고 해도 다큐멘터리나 보면 되게 된다. 심지어는 이런 포식자들을 길들여 애완동물로 키우기도 한다.
 
이렇듯 같이 모여 사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매우 큰 힘이 되여 주었다. 하지만 모여 사는 것은 어떤 불편함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것은 바로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다른 존재들과의 갈등이다.
 
모여 사는 것의 가장 큰 힘은 바로 협동이다. 혼자서는 못할 일을 같이 하면 아주 쉽게 해낼 수 있다. 이 단체 노동의 힘은 정말로 대단해서 우리의 문명이 생성되고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또한 다양한 능력을 가진 인간들이 나타나고 그들이 만든 독특한 발명품이나 생각들이 다른 이들에게 전파되어 도움을 주거나 영향을 미쳐, 우리 전체가 더 나은 삶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길을 닦아 준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정말로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바로 다른 이들과의 갈등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 이득을 추구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서 다수가 함께 모여 살게 되자 당연히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공동체에 속한 우리들에게 있어서 나의 이득은 타인의 손해였고 타인의 이득은 나의 손해를 의미하는 경우가 되기에 우리는 갈등과 그로 인한 싸움을 결코 중단할 수 없었다.
 
단체 생활에서 이런 갈등, 그 중에서 심각한 갈등은 상해나 살인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그 중에서 어떤 이들은 남의 곡식을 훔치거나 상대적으로 강한 힘으로써 뺏기도 했다. 즉 우리 인간에게 '죄'라고 부르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혼자 사는 존재에게 죄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혼자 산다면 자신의 생존에 대한 무한한 추구를 할 수 있으며, 당연히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서 선과 악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하지만 단체의 삶에서 나의 이득은 타인의 손해와 쉽게 연결이 된다. 그러자 우리는 이것을 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모두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모든 이들이 잠재적으로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였다. 우리가 죄를 정의하자 그 후로 그 누구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도 단지 심각한 죄를 지을 필요가 없을 뿐 없을 뿐, 언제라도 우리가 생존을 위협 받게 되면 소위 우리가 정한 죄를 짓게 된다. 그것의 아주 흔한 예가 바로 정당방위이다. 이것은 사람을 죽였을 경우, 살인죄가 될 수 있으나 생존을 위협받아서 한 행동이기에 법적으로 용서가 될 뿐이다.
 
무리를 지어 살면서 일어난 다양한 갈등은 상황에 따라 그 무리 자체를 괴멸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심각했다. 우리는 전체의 생존을 위해서 각자 좀 덜 싸워야 했다. 그것을 위해 우리는 법률도 만들었지만 법률이 미치기 힘든 상황이 훨씬 많았기에 이웃과 잘 지내기 위한 다양한 가치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나의 이득의 일부를 주는 짓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작은 이득을 주고 받으면서 상호 신뢰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한 단계 더 도약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예를 들었던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한 단어를 찾으라면 그것은 바로 신뢰이다. 물론 그것을 전우애, 의리 등의 다른 말로 부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신뢰가 가장 범용적인 단어이다.
 
우리는 신뢰를 통해 내 등을 지켜주는 이가 뒤에서 다가오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나의 등을 지켜줄 것을 믿고 또한 나 역시도 그의 믿음에 부합하여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에서 뒤에 있는 이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집중력이 떨어지고 뒤를 힐끗 거리다가 결국 앞에서 오는 적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우리가 단체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생겨난 신뢰는 이후 우리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더 많은 좋은 것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내 집 앞에 말려 놓은 곡식을 옆집에서 밤에 훔쳐가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반대로 상대의 곡식 역시도 나 자신이 훔치지 않을 것이라 믿을 수 있기에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있었다.
 
반대로 신뢰가 부족한 이들은 밤에 자신의 식량을 지켜야 했기에 잠을 잘 수 없어서 끝없이 피곤함 속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이런 잠 부족에 시달린 사람들은 결국 집중력 저하에 의해서 언젠간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하여 쉽게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즉 자연적인 도태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중요해진 신뢰를 다양한 방법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것은 수 많은 종류의 기분을 표현하는 얼굴의 표정에서,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말투에서,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는 행동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 사람의 평소의 말에서 그것을 확인한다. 심지어는 빈 손을 내밀어서 맞잡아 서로 무기를 쥐고 있지 않는다는 확인을 시켜주는 행동도 한다. 그리고 이것을 악수라고 부른다.
 
타인과의 신뢰는 우리에게 있어서 거의 생명 줄과 같은 것이라서 우리는 낯선 이들을 접할 때마다 빠르게 신뢰 여부를 결정하는 능력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외모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저장하고 처음 보는 이라도 빠르게 호감과 비 호감을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처음 만나는 사이는 불편하지만 자주 보면 볼수록 그 사람에 대한 신뢰 여부를 정확히 결정할 수 있게 되어 그냥 아는 사람과 친구라는 존재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단체 생활을 하면서 만들어 낸 가치는 단지 신뢰만이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도 필요했다. 강한 다른 부족에게 여자를 조공으로 바치거나 단체 사냥에서 크게 상처를 입은 남자의 가족의 생계는 누가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을 위한 희생에 대해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부족을 살린 처녀와 부족을 위해 용맹이 싸운 전사의 희생에 대한 넋을 기렸다. 무덤을 화려하게 만들고 애도를 했다. 그리고 그런 희생을 한 가족에게는 각자 작은 이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이런 관습은 현대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군인으로써 국가에 충성한 이들을 경건하게 모시고 있으며 꼭 군인이 아니더라도 사회적으로 귀감이 되는 행동을 하여 희생을 치룬 이들에게 의사자나 열사자라는 칭호를 붙여서 그들의 죽음을 기억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 누군가 희생을 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또한 용기도 필요했다. 사냥터에 나가면 누군가 죽음을 각오하고 앞서 날 선 발톱 앞에 서야 했다. 누구는 안전한 후방에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한껏 들어낸 이빨 앞에서 창을 들이대야 했다. 그리고 사냥에 성공했을 때, 용기 있는 자들은 조금 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었다. 그들은 두툼한 살코기가 있는 뒷다리를 보상으로 받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용기는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용기는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 되어갔다. 용기 있는 자들은 죽을 가능성도 높지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용기가 있고 싶었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비하했다. 그리고 어느덧 우리는 과거의 두려움에 떨던 우리 조상들의 본질에 대해 잊고 우리가 원래 용기 있는 자들이라고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신뢰, 희생, 용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는 이후 더 많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었다. 우리는 종교에 대한 믿음, 국가나 왕에 대한 충성, 가족의 화목함,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한 정의, 자신이 믿는 신념, 더 나은 공동체 삶을 위한 사상, 친구들 사이의 우정, 남녀 사이의 사랑, 낯선 이들에 대한 친절, 약한 이들에 대한 배려,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과 의무, 죄에 짓는 것을 막는 양심 등등 우리가 사회에 속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리 전체의 생존을 위한 좀 더 좋은 것들을 자연스럽거나 혹은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 만들었다.
 
약 2500년 전쯤 인류의 역사에 이런 개념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설득했던 위대한 성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갑자기 출연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때쯤에 이젠 그런 개념들을 가져야 할 때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성인이나 철학자로 불렸으며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문명이 이룩된 곳에서는 모두 출현하였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부처, 공자, 장자, 노자, 예수 등등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이 땅에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할 것들에 대한 가치를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이것들을 통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었다. 신하에 대한 믿음과 왕에 대한 충성심은 거대한 국가를 운영할 수 있게 했고, 타인의 대한 신뢰는 시장에서 서로 상거래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새로운 장소에 대한 두려움은 용기로 극복했고,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게 친절과 배려를 베풀었다.
 
이것은 일종의 진화였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이것을 우리들 물리적 유전자에 제대로 입력하지 못했다. 지금도 우리는 원래 깊게 새겨진 생존에 대한 본능을 잃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도 두려움 속에서 살아 간다. 겁 많고 두려움에 떨던 우리는 아직도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는 그래서 지금도 살기 위해 이기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나타난 새로운 개념들은 우리 인간의 특징을 아주 다양하게 분포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제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들부터 꽤나 이타적인 존재들까지 넓은 분포를 가지는 다양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젠 이 각자 자신이 가진 성향의 특징에 의해서 각자 삶에 대한 기준점을 가진 채 다른 이들과 끝없이 작은 충돌을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과거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회는 세분화된 법률과 강한 공권력을 통해 타인의 이득을 훔치거나 손해를 입히는 행위에 대한 강한 처벌을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좀 더 안전해지고 신뢰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달라진 점은 그 신뢰의 방향이 옆에 있는 이웃이 아닌, 자신이 속한 국가로 바뀐 것 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당연하게도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믿은 그 모든 것은 바로 결국 우리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을 알 수 있다. 전체가 잘 되어야 개인이 잘 된다는 것을 우리를 역사적 사실로부터 충분히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뢰를 증명할 수 있어야 나 자신도 편하게 살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용기가 있어야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희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전체가 멸망하지 않음을 안다. 우리는 정의로움과 신념이 있어야 우리가 삶을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음을 안다. 우리는 정직이 있어야 타인이 나를 믿어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우정과 사랑이 있어야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만들 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 우리의 본능 위에 생겨난 이 좋은 가치들은 또 다른 형태의 생존 본능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개인이 아닌 전체의 범위로 확장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원래 가진 이기적 본능에 반하는 좋은 '인간적' 이란 용어를 써서 평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런 가치는 더 높게 평가되면 될수록 그래서 더 많은 이들이 이것을 추구하면 할수록 사회는 점점 더 강해지고 안전해지고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개인의 생존 개념을 넘어선 전체의 생존 개념으로 발전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이 가치들은 다른 말로 소중한 것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 말은 어떤 의미로는 정말로 적절하다. 우리는 이미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욕구는 모두 해결했다. 우리는 굶어 죽지 않고, 자다가 늑대의 습격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 안전함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계산되지 않은 손길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가 소중한 것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우리는 문명에서 멀어져 위기가 고조될수록 점점 더 본능이 지시하는 데로 행동하고 문명에 가까울수록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더 존중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판단하는 경계는 사람마다 너무 편차가 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판단하는 공용의 잣대를 만들 수 없다.
 
앞선 예에서 전투 중 부상을 입은 병사를 버리고 가는 행위나 데리고 가는 행위 모두 그 자신을 위해서이다. 단지 버리고 가는 행위는 생존 본능적 결정이라면 데리고 가는 행위는 이 위기를 이겨낸 후 지켜 낼 신뢰와 전우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결정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한계점은 바로 우리가 부상 입은 동료를 대신해서 남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결국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힘들게 동료를 데리고 가서 살릴 수만 있다면 훗날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치명적 부상의 순간에 동료의 신뢰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내 등에 서 있는 존재에 대한 믿음을 굳게 해준다. 어쩌면 이런 결정은 단기 시점의 이득과 장기 시점의 이득으로 볼 수도 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안전해진 우리는 더 먼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젠 자연스러운 죽음까지도 희망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세상이지만 많은 이들이 이젠 육체가 더 이상 쓸 수 없을 만큼 낡을 때가지 살다가 간다. 그 덕에 우리의 평균 생존 기간은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로마 시절 평균 수명이 30세도 안되었던 시기에 비하면 요즘은 거의 4배에 가까운 평균 수명을 보여주고 있다.
 
먼 미래를 꿈꾸는 것은 더 먼 미래의 이득을 목표로 하게끔 해주었다. 우리는 그래서 점점 더 단기적 이득보다는 장기적 이득에 더 집중하고 있다. 물론 단기적 이득이 쌓여야 결국 장기적 이득이 되지만, 더 나은 미래의 이득을 위해 현재의 조금의 이득은 포기할 수 있는 현명함도 생겼다.
 
이 모든 것은 바로 문명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 그리고 더욱 안전해진 사회에 속해서 살아가게 된 우리는 이젠 우리가 사회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했던 좋은 가치들 이외에 그 자신만의 가치를 추구하게 되었다. 그것은 다양한 취미나 특별한 활동으로부터 얻어지고 있다. 즉, 우리는 안전한 사회가 될수록 점점 더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실제로 좋은 가치를 추구하는 것 역시도 결국 행복을 의미한다. 우리는 먹을 것을 먹을 때도 행복하지만 그것은 남에게 베풀 때도 행복하다. 전자는 본능에서 오는 행복이고 후자는 문명이 가르쳐준 행복이다. 하지만 이젠 이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많이 안전해진 세상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은 고전적 가치들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인간 문명을 발전시키고 유지하게 만들어 준 신뢰, 우정, 사랑, 희생, 정의로움, 충성심, 신념, 믿음, 용기의 가치는 점점 사람들이 머리 속에서 잊혀져 가고 있다. 이제 이런 것이 없어도 우리의 등은 동료가 아닌 우리가 꾸린 국가가 만들어 낸 강한 공권력이 지켜주고 있다.
 
이젠 그 덕에 우리는 우리를 보호해주던 그 많은 좋은 가치가 없어도 되는 사회라고 믿기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경험이 많은 이들은 이것을 걱정하기도 한다. 신뢰와 도덕적 가치가 무너진 사회는 그들에게 과거를 떠올려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에 우리가 겨우 잊었던 공포가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걱정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는 돌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엔 너무도 많이 발전했다. 그렇다고 해도 무작정 안심할 수는 없다. 이젠 옆집 사람에 대한 믿음은 사라지고 국가에 대한 믿음만이 남게 된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데, 국가가 괴물이 되어 버리면 우리는 그것을 바로 잡기가 너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미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 단체가 힘을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이 새롭게 추구하기 시작한 가치들은 다양해서 좋긴 한데 다른 이들의 공감을 잘 얻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만의 행복을 위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긴 하지만 우리의 생존을 돕지는 못한다.
 
이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현대의 사회가 발전해 나가는 방향은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다. 우리는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단체를 만들고, 단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좋은 가치를 만들었으며, 결국 얻어진 안전함은 이젠 개인의 행복 추구를 위해 쓰이고 있다. 심지어 너무도 안전해진 현 시대에 권태를 느낀 이들은 목숨을 건 스포츠와 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어떤 해석을 해도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우리가 좋은 가치라고 주장하는 그 모든 것 역시도 결국 인간 사회 안에서만 좋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몰아낸 사자와 호랑이한테는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가 좋다고 믿는 그 모든 가치는 개인의 이기심은 아니지만 단체의 이기심인 것이다.
 
단지 그것을 우리는 인간적이라고 믿으면서 우리의 본질적 이기심과 분리를 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문명 속에서 잘 교육된 우리들은 인간적인 가치라고 여겨지는 것들을 접할 때마다 감동의 눈물을 쏟아 내고 있다.

 

또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이 혹시라도 그런 좋은 가치에 대한 것을 잊을까 봐 교과서, 영화, 소설, 연극, 드라마 등을 통해 끝없이 우리가 어떤 가치를 느끼고 살아야 할지를 가르친다. 그렇지만 이런 과도하게 쏠린 교육의 효과로 인해서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원래 그런 존재라고 믿고 사는 처지에 놓여 버렸다. 우리는 원래 선하고 신뢰를 가지고 있으며 용기 있는 존재들이며 그래서 결국 착한 존재라고 믿게 된 것이다.
 
아마도 리처드 도킨슨 씨가 이기적 유전자를 통해 주장한 '밈'이 이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문명의 통해 전달되는 유전자이다. 우리는 DNA에 새겨진 이기적 유전자와 문명으로부터 받은 이타적 유전자를 믿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결국 동료를 버리고 가는 군인들이나 동료를 데리고 가는 군인들 모두 우리의 모습이다. 단지 후자는 타고난 것이 아니라 문명에 의해 교육된 것이라서 선택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부르는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날이 찾아 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최고의 안정성을 획득했을 때일 것이다. 우리 개개인이 충분히 안전한 사회가 되는 날, 우리는 딱히 우리를 심각하게 파괴할 것만 아니라면 이젠 타고난 본능에 의해서 철저하게 개인적인 이득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또 다른 모습의 미래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 가진 좋은 가치들을 최대한 지키고 미래에 전달해서 정말로 물리적인 DNA에 새겨 넣을 수 있는 미래이다. 물론 그것은 원래 가진 것과 강한 충돌을 일으킬지도 모르지만 현재 우리의 삶을 보면 이것이 제법 잘 어울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인간이란 종이 살아가는 과정 중 아주 일부만을 연결해주는 고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것을 유지하고 후대에 전달해주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아주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간에 현재의 가치관으로 그때를 바라보면 안 된다. 모든 시대엔 그 시대에 맞는 가치가 있다. 우리의 과거도 그랬고 우리의 미래도 그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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