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동네 바보의 행복

아이루다 2014. 8. 9. 09:01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좋다'
 
이것은 19세기쯤 철학자 밀이 한 말로써, 원문을 조금 생략해서 만든 말이라고 한다. 이해하기 그리 어렵지 않은 말 중 하나로, 배가 부르다는 급이 낮은 행복을 위해 살기 보다는 상대적으로 질적 수준이 높은 행복을 추구하겠다는 의미를 표명한 말이라는 설명을 읽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에도 몇 차례 글을 썼었고, 나 자신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어서 글을 쓸 때마다 미묘하게 그 입장이 달라지기도 했었다. 이것은 과거에 매트릭스안에서 주인공 네오가 선택할 수 있는 파란 알약과 빨간 알약의 선택과도 연결되어 있다.
 
착각으로 행복한 것과 진실을 알고 불행한 것, 배가 불러 행복한 것과 지적 만족을 통해 행복 하려고 하는 것.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영원한 숙제이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행복을 느끼는 방식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겐 행복이 누군가에겐 고통이고, 반대로 누군가에겐 불행한 상황이 다른 이에겐 행복의 조건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을 가장 중요하고 놓치며 안 되는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먹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누군가는 책을 읽어서 지식을 늘리는 것이 가장 행복한데, 책을 읽은 누군가가 먹는 행복을 누리는 사람에게 배부른 돼지 이야기를 꺼내어서 공격을 한다.
 
사람은 부러움을 느끼고 질투와 시기를 하는 동물이다. 아무리 자신만을 바라보고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살아가는 연습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것이 아예 없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를 그리 행복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거의 절대적 해결책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면 된다. 즉, 내가 현재 매우 행복하면 다른 이를 부러워하고 질투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만약 책을 읽고 지식을 쌓는 것이 너무도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라면 배가 부르는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배부른 돼지에 대한 조언을 할 필요가 없다. 그래도 해야 한다면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네 바보가 한 명 있다. 이 바보는 늘 행복해 하는 미소를 짓고 동네를 돌아 다닌다. 지적 능력이 떨어져서 학교도 가지 않아도 되고, 오후가 되면 집에 온 동네 아이들과 놀기 바쁘다. 동네 바보의 친구들은 그가 10살 때도, 그가 15살 때도, 그가 20살이 되었을 때도 늘 동네 초등학생들이다.
 
낮에 혼자 있을 땐 조금 심심하지만 그냥 동네를 돌아다니다 보면 재미있고 개미집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있다. TV에 만화도 많이 하니 집에서 노는 것도 재미있다. 동네 바보는 늘 재미있고 행복하다.
 
이 동네 바보의 행복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까? 물론 이 바보의 행복이 좋아 보여도 사람들은 동네 바보가 되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행복할 수 있다고 해도 바보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데 조금 많이 똑똑한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사람은 이 동네 바보와 비슷하다. 지적 능력이 뛰어난 이들의 입장에서 일반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구차하고, 어리석고, 능력은 떨어지는데 욕망은 크고 욕심은 한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조금만 자극하면 얼마 되지 않는 돈도 스스럼없이 내 놓는다. 물론 스스로 만족을 하면서 행복해 하지만.
 
동네 바보가 되기 싫은 사람들은 그래서 그 자신이 동네 바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누군가에겐 동네 바보와 다를 바 없다. 그래도 동네 바보는 잘 모르고 돈도 별로 없어서, 아무리 꼬셔도 돈을 쓰지 않지만, 동네 바보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은 자신이 그리 힘들게 일해서 번 돈을 훨씬 똑똑한 그 누군가의 호주머니에 그냥 넣어준다. 만족감이라는 한 가지 이유로 인해.
 
그렇다고 해서 동네 바보가 불행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동네 바보와 다르다고 믿는 사람들 역시도 마찬가지다.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에는 바로 자신이 느끼는 행복의 조건이나 대상이 고려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뛰는 것이 행복하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것이 행복하다. 누군가는 돈을 아주 많이 버는 것이 행복하고 누군가는 해외 여행을 다니는 것이 행복하다.
 
이것들은 누군가에게 강요해서 될 이야기는 아니다. 게으른 이에게 운동의 즐거움을 아무리 설명해도 하지 않게 된다. 움직이는 것이 불행한 이에게 움직이는 것이 행복이라고 해서 그것이 먹힐 리가 있겠는가?
 
물론 어떤 행복들은 훈련이 되기도 한다. 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시작한 운동을 꾸준히 하다 보니 그 매력에 빠져서 운동 매니아가 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행복의 조건을 새로 하나 찾은 것뿐이다. 그래서 모든 이가 이런 경험을 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행복의 질적 차이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현재 느끼고 있는 행복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로 자신이 느끼는 행복에 만족하다면, 타인의 행복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아니 다른 인간들 자체에 관심이 없어진다.
 
물론 이것에는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일단 동네 바보의 행복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첫 번째 문제는 바로 자생력이다. 동네 바보는 행복하지만, 돈이 없으면 굶어서 불행해진다. 즉 스스로 경제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삶 자체가 언제든 불행해질 수 있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 문제는 몸이 늙은 것에 대한 대비가 없다는 것이다. 40살 먹고, 50살이 먹은 후에도 동네 초등학생들과 놀 순 없다. 언젠간 혼자되고, 가족을 이루기 힘들기 때문에 그를 돌봐주던 부모가 죽게 되면 외로워 진다.
 
그렇다면 동네 바보의 문제점을 알아챈 다른 사람들은 이런 선택을 하게 된다.
 
첫 번째 최대한 돈을 가지려고 한다. 돈을 직접 벌든, 아니면 잘 버는 사람과 결혼을 하든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 낸다.
 
두 번째로는 가족을 꾸린다. 책임과 의무가 생기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생김으로써 삶을 좀 더 안정적으로 영위할 수 있다. 거기에 더해서 후대를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
 
그렇지만 바보가 아닌 삶을 선택함으로써 얻는 매우 좋지 않는 것이 하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욕망' 이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을 한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돈이 가장 많은 이가 아니고, 원하는 것이 가장 적은 이라고 한다. 이것은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행복이란 것은 욕망을 충족시킬 때 얻는 감정이다. 욕망은 단지 돈, 권력, 명예 등의 우리가 조금 나쁘게 보는 것만이 아니다. 욕망은 소중한 가족, 너무도 예쁜 아기 등에 대한 것 역시도 욕망이다. 그래서 이런 욕망은 우리를 끝없이 자극하고 이것이 충족되면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우리가 동네 바보를 벗어나게 될 때, 우리는 욕망이란 혹을 달게 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우리를 끝없이 자극하고 동네 바보가 아닌 길을 선택해서 미래의 안전함을 이루었지만 결국 다시 어렵게 얻은 행복을 뺏길 위기에 처하게 된다.
 
원칙적으로 욕망이 클수록 우리는 불행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능력이 되는 이들은 생각을 하기 시작하고 그로 인해서 자신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다. 그런 정보들은 철학이란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의 삶 속에 점점 침투한다.
 
그래서 결국 배부른 돼지 이야기가 일반 사람들에게 퍼지게 된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것은 더 많은 행복을 위해 더 많은 지식과 더 많은 공부와 생각을 한 사람들이 결국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하고도 행복하지 못해서 내뱉은 투정과 같다.
 
이해는 간다. 그리 많은 생각을 하고, 그리 많은 책을 읽고, 그리 많은 일반적 욕망을 거부한 채 삶을 살았는데 결론으로 생각해보면 동네 바보보다 행복하지 못하고, 그 바보 보다 낫다고 믿는 일반 사람들의 행복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러니 한 마디 해서 그들의 문제를 일깨워줘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다. 배부른 돼지들이 자신의 행복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한 것이다. 돼지같이 살면 마치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불행한 철학자들의 궤변이 통한 것이다. 그래서 다들 좀 더 불행해졌고 그 덕분에 철학자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 또한 덕분에 행복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서 철학자들이 쓴 책들이 좀 더 많이 팔려 결국 철학자들은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철학자 밀은 행복의 질적인 구분이 있다고 말했다. 쾌락에는 고급과 저급한 쾌락이 있다고. 하지만 만약 정말로 그가 이것을 믿었다면, 그는 자신이 느끼는 고급 쾌락에 그리 큰 만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먹을 걱정, 노후 걱정 없고 개미가 이동하는 것만 봐도 행복하고 심심하지도 외롭지도 않고 건강하게 사는 동네 바보다. 누구도 이 사람의 행복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그리고 동네 바보의 삶을 피하고 싶은 그 많은 사람들 역시도 소수의 뛰어난 존재들의 눈에 보면 동네 바보와 다름이 없다. 그들에게 있어서 동네 바보들은 단지 조금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외계에 우리보다 훨씬 지적으로 성숙한 어떤 존재들이 와서 우리 인간을 보게 되면 과연 그들은 우리를 동네 바보쯤으로 대접해줄지 아니면 지나가는 파리가 낳아 놓은 구더기로 여길지는 모를 일이다.
 
만약 동네 바보가 아니면서 동네 바보의 행복을 얻고 싶은 이라면, 동네 바보 정도의 욕망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 또한 당연히 충분히 안정적으로 먹고 살면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울 만큼 관리를 해야 한다. 여기에서 문제는 안정적이란 것의 의미에 대한 개인별 해석 차이이다. 안정적이란 것에 100억이 필요한 이는 결국 불행해지고 천 만원이 필요한 이는 상대적으로 쉽게 이루어 낸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배가 고프면 배부른 돼지를 잡아먹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부른 돼지가 없어지고 나면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상대적으로 느끼던 지적 우월감을 느낄 대상이 없어져서 절망에 빠지게 된다. 이젠 정말로 누구와 비교해서 행복을 느낄지 그리고 심각하게 다가오는 배고픔의 고통은 어떻게 이겨낼 지 걱정스럽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우리가 행복을 추구하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만약 삶의 목적에 행복을 제거할 수만 있다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세상에서는 동네 바보가 가장 부러워할 이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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