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기분 나쁘지 않게 분노하기

아이루다 2014. 8. 8. 07:24

 
고등학교 시절, 그 당시 유행을 했는지 어떤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나와 7살 차이가 나는 누나가 어디선가 '마인드 컨트롤' 이란 이름을 가진 제품을 사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제품엔, 훈련에 의해서 자신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신기한 마음에 (개인적으로 감정을 조절 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밤마다 그 안에 있는 테이프를 꺼내어 재생시켜 들으면서, 흘러나오는 음성에 따라서 훈련을 했다.
 
물론 결과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기였던 것 같다. ㅎㅎ
 
아무튼 내가 개인적으로 나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정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또한 그것이 가능할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된 계기가 바로 그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설령 시도는 실패했더라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러도 나는 나의 희망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는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없다. 물론 연기는 할 수 있다. 잘하지는 못해도.
 
아마도 처음 감정에 대한 조절을 하고 싶었던 것에는 감정의 심한 기복과 기분 나빠짐을 참지 못하는 나의 성격적 결함을 고치고 싶어서 그런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나는 꽤나 감정적인 아이였다. 자신에 대한 불만과 그것을 통해 본 세상 사람들의 본 모습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구성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는 나를 끝없이 감정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내 모습이 몹시 못마땅했다. 특히 기분이 상하게 되면 어떤 것도 하지 못하고 그것이 풀릴 때가지 마냥 기다려야 하는 나의 어리석은 모습과, 거기에 더해서 정작 정말로 분노를 하고 용기를 내야 할 자리에서는 한 없이 비겁하기만 했다.
 
나는 한 마디로 자기 집에서 용감한 개와 같았다.
 
그리고 나의 많은 시간은 이런 나를 위한 합리화의 기회로 투자되었다. 그것을 위해 현실적으로 스스로를 높히지 못하니 대안으로써 남들을 낮춰야 했다. 그래서 남들이 얼마나 비겁한지 알려 하고, 세상이 얼마나 개판인지 더 알려고 했다. 이렇게 편파적으로 쌓은 정보는 순간이나마 나를 상대적으로 좀 더 나은 존재가 되었다고 믿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자신보다 조금 못나 보이는 사람 몇을 보고난 후, 나 자신을 위로할라 치면 용기 있는 사람들과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와 겨우 진정시킨 나를 끝없이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기 부정, 자기 합리화, 자기 인정 등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나는 시기였다. 때론 스스로 대견하여 기분이 몹시 좋은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나 자신에게 심하게 실망하여 우울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런 날이면 며칠간의 생각이나 아니면 다른 이들의 삶을 보면서 스스로를 다독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위로는 상대적이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은 어쩔 수 없다.
 
이것이 내가 그 많은 출렁임을 겪은 후 견딜 수 없어서 낸 결론이다. 비겁하여 용기를 내야 할 순간에 도망가고, 순간적으로 분노하여 화를 내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내가 인간이고 또한 이런 성격이 형성된 이상 나는 원래의 나를 뛰어 넘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나를 조금 많이 편하게 해주었다. 나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과거와는 달리 나에 대해 좀 덜 부정적이고 또한 그로 인해서 타인의 삶에 조금 더 관대해졌다. 나의 열등감으로 인해 출발된 타인에 대한 분노가 좀 줄어든 것이다. 아니, 좀 더 냉정하게 말해서 그들을 비판함으로써 내가 가진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덜하게 된 것이다.
 
이 작은 변화는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지금에 와서는 많이 좋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많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다. 왜냐하면 아직도 내 머리 속에는 고등학교 시절 '마인드 컨트롤'을 하면서 품었던 감정을 마음대로 조절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욕구는 그때와는 시작 지점은 다르다. 과거의 나는 감정 조절을 통해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손해를 입지 않고 살아가길 원했다면 지금은 내가 살아가는 방향과 관련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의 행복하길 원하기에 나의 감정을 진정시키고 싶다.
 
일명 포커 페이스라는 말이 있다. 포커를 칠 때, 상대에게 어떤 패가 들어왔는지 들키지 않는 거의 변화가 없는 표정을 의미하는 말인데, 노름판에서는 매우 중요한 능력 중 하나이다.
 
우리 삶에도 이 포커 페이스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는 최대한 웃음으로 대해야 이득이 오게 되어 있다. 실제로 그래서 백화점이나 기타 고객을 상대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일컬어 감정 노동자라고도 한다.
 
어린 시절 내가 원했던 능력은 바로 이것이었다. 기분이 나쁘든, 나쁘지 않든, 슬프든, 기쁘든 상관없이 내가 웃고 싶으면 웃고, 울고 싶으면 울길 바랬다. 만약 이것이 가능했다면 나는 꽤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요즘은 다른 의미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싶다. 아니, 실제로는 마인드 컨트롤이 아니고, 나의 감정이 출렁이는 폭을 최대한 줄이고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는 의도이다.
 
좀 더 명확히 말해서 나는 화를 내는 분노나 기분이 나빠지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좀 벗어나고 싶다. 다른 말로 하면 삶을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까?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좌절을 겪고, 자신의 손해에 대해 화를 내고, 다른 상대의 행동에 기분 나빠 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 이런 문제를 이겨나가는 방법이 몹시 다르다.
 
내가 말하고 싶은 포인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과는 조금 다르게 반응하고 싶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사고 방식은 버려야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긍정적인 성격을 뛰어넘어 좀 더 깊은 정신 세계로 가길 원하고 있다.

이것을 하기 위한 답을 찾긴 했다. 단지 그것을 그 답대로 해 낼 능력이 안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약간의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지만 꽉 막혔다고 느꼈던 상황에서 보일듯 말듯한 길 하나를 찾은 것이다.
 
물론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살아 생전에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며 또한 원하는 것 자체 역시도 집착으로 작용하여 결국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막아 버리게 될 것이다.
 
요즘 나는 조금 행복해졌다. 목적지에 도착해서가 아니라, 목적지에 도착할 수도 있을 가능성에 대한 작은 희망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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