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욕망의 정의

아이루다 2014. 8. 1. 08:34

 
욕심, 욕구, 욕망 등으로 표현되는 인간이 가진 무엇인가를 바라는 마음은 비슷한 의미를 갖는 희망, 소망 등의 단어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정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욕'으로 시작되는 단어들은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본질로써 인정 받으면서 산다는 것 자체가 바로 우리가 이런 욕구나 욕망을 실현해나가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말은 실제적으로도 맞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 밥을 먹고, 성욕을 채우기 위해서 섹스를 하고, 잠자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잠을 잔다. 그리고 이런 본능적 욕구 이외에 우리가 사회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됨에 따라 늘어난 수 많은 욕구들을 실현하는 과정을 통해 하루하루를 살다가 결국 가장 원하지 않는 죽음을 맞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들으며 또한 왜 이 욕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불행과 고통을 느끼게 될까?
 
어쩌면 이것은 정말 단순한 과정일 수 있다. 일단 우리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이 생기면 그것을 채우기 전까지는 계속 고통 속에 놓이게 된다. 그나마 그 욕망이 채우기 쉬운 일이라면 금방 그것을 실현하고 조금 있다가 잊어버리겠지만 그 욕망이 이루기 힘든 일이라면 수 년을 걸쳐서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노력해서 얻은 욕망 역시도 그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 욕망이 사라진 우리들은 식물인간처럼 변하고 의욕을 잃게 된다. 그래서 우린 또 다른 욕망을 찾아야 생기를 되찾고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이 전체적인 과정을 하나의 흐름으로 보면, 어떤 어리석음이 느껴진다. 이루기 힘든 욕망을 느끼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삶을 살아가고 이룬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나서는 이 무한으로 반복되는 과정이 외부에서 보기엔 왜 저렇게 살아야 하나 싶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욕망은 우리를 살게 해주는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무엇인가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가 되면 한없이 나태해지고 게을러진다. 욕망만이 우리를 바쁘게 살게 하고 부지런하게 하며 하기 싫은 일을 힘들지만 하도록 만들어준다. 
 
또한 욕망을 실현해야 한다는 욕구로 인해서 너무 힘들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나 소망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이렇게 되면 좀 덜 집착하는 듯 보이고 이루지 못해도 괜찮을 듯 보인다. 왜냐하면 욕망에 비해서 희망이라고 부르게 되면 이것은 훨씬 인간적으로 보이고 덜 강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해서 희망은 욕망을 이루기 힘든 상태이거나 욕망을 이루어 낼만한 능력이 안될 때 대체해서 부르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것 중에서 꿈이란 단어도 있다. 꿈은 좀 더 순수한 의미로 사용된다.
 
아무튼 글의 제목처럼 욕망의 정의는 과연 어떻게 내려야 할까? 욕망이 희망과 꿈의 또 다른 의미를 가진 부정적인 단어라면 욕망은 희망과 꿈이 가진 의미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정의 내려져야 할 것이다.
 
일단 욕망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례를 생각을 해보자.
 
우리가 무엇인가를 먹고자 하는 욕구를 느꼈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일단 모든 생명체는 외부에서 에너지를 흡수해야만 산다. 식물 역시도 태양이나 다른 에너지를 흡수 할 수 있는 대상을 통해서 자신의 에너지를 생산하여 살아간다. 즉 에너지를 직접 흡수하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 에너지를 이용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동물을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먹는다. 그런데 이것을 먹을 때 우린 조심해야 한다. 잘못하면 독을 먹을 수도 있고 상한 것을 먹어서 먹지 않는 것이 더 나을 경우도 많다. 이런 정보는 오감을 통해서 전달되고 또한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부모세대로부터 교육 받기도 한다.
 
여기에서 특히나 오감은 매우 중요한데, 냄새나 색깔 등을 보면서 우리는 대상에 대한 잠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또한 미각을 통해 우리가 섭취해야 할 영양분이 있는지 여부도 판단해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식사를 할 때 오감을 다 쓰는 이유다.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모두 써서 음식을 먹는다. 그리고 음식을 먹는 일은 즐겁다.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즐거운 이유는 우리가 음식을 먹어야 하루를 더 살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느끼는 배를 채어야 한다는 욕구는 실제로 우리 몸이 하루를 더 살기 위해서 보내주는 신호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는다. 그리고 먹을 때 오감을 통해 대상을 먹을 수 있는지, 그리고 제대로 먹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는 언제든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되면서 먹어야 한다는 본질은 숨겨지고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한다는 욕구로 변화되고 말았다. 즉 우리는 이제는 먹어야 하는 것에서 행복하기 위해 먹는 단계로 변화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욕망의 정체이다.
 
성욕은 아이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생긴 욕구이다. 우리는 섹스를 할 때 엄청난 희열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 때문에 우리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간다. 짝을 찾고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매우 힘든 과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힘든 일을 해내는 이유는 아무튼 섹스를 하면 기분이 좋고 그러다 보면 아이가 생기고 따로 그것을 없앨 방법이 없으니 키우다가 낳게 된다.
 
거기에 낳으면 아이를 키우는 행복도 덤으로 얻어진다.
 
그런데 인간이 하는 섹스 중 과연 얼마나 아이를 갖기 위해 하는 섹스가 과연 얼마나 될까? 우리는 이미 성욕이 가진 본질적 의미를 잊었고 이젠 그것을 할 때 얻어지는 쾌감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이 역시도 욕망의 정체가 된다.
 
섹스 상대를 고를 때도 마찬가지 원리가 작동한다. 우리는 균형이 잘 잡힌 모습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미남, 미녀를 판별하는 기본 원리이다. 잘 생길수록, 이쁠수록 그 사람의 체형과 얼굴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선호된 상대의 외모는 그와의 관계를 통해 얻어질 자녀의 유전자적 우월함을 보장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이런 본능적 단계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그것도 아니다.
 
우리가 사회 생활을 할 때, 누구나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자존감과 존재감이다. 이것은 모두 어떤 무리에 소속되어 있을 때 자신의 중요도를 가늠하는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결국 이 둘이 높을수록 사회에 필요한 사람으로 인식된다.
 
무리에서 필요한 사람은 그 무리에서 쫓겨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딘가에 난파되었다면 그 중 가장 끝까지 중요한 사람은 바로 의사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에 걸쳐서 이 자존감과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살아간다. 이것은 자신의 외모와 지위, 권력, 돈 등의 여러 가지 수단으로 인해 채워지는데, 결국 우리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만족해하고, 자신이 부재할 때 사람들이 얼마나 자신을 찾는지를 보면서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이 자존감과 존재감은 명확히 말하면 사회 속에서 자신의 경쟁력이다. 그래서 무리를 이루지 못하고 사는 경우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혼자 살 때 상어를 혼자 잡는 용맹함이나 나무에 오줌을 싸서 나무가 잘 자라게 하는 것은 그 어떤 의미도 없다. 그냥 상어를 잡으면 고기가 생긴 것이고 나무가 잘 자라서 열매를 맺으면 먹을 수 있으니 좋을 뿐이다.
 
하지만 같은 일이라도 이 일을 무리 속에서 하게 되면 상어를 잡은 용맹함은 그 자신이 얼마나 그 무리에 필요한 사람인지 암시적으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나무를 잘 키우는 능력 역시도 매우 큰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능력들은 사회의 구조에 따라서 계속 변해간다. 못 먹고 살던 시절엔 이런 능력이 귀했지만 먹을 것이 풍부한 사회에서는 먹이를 구하는 능력은 그리 크게 인정받지 못한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존감과 존재감 역시도 욕망이다.
 
욕망을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본질을 잃어버린 껍데기. 하지만 껍데기라고 해서 그것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인간의 한계는 분명하다. 우리는 오늘도 맛있는 것을 먹기 위해 밥을 먹고, 성적 쾌락을 얻기 위해 섹스를 하며 사회 속에서 자신의 필요성을 인정받아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일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이 욕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일까?
 
물론 버릴 수는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 모든 욕망의 시작이 바로 우리가 느끼는 단 하나의 욕구에서 비롯되었기에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바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며 생명체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다. 이것은 그 어떤 생명체도 모두 가지고 있는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욕망이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욕망이 바로 식욕, 성욕 등이며 다시 또 이것을 채우기 위해 생겨난 욕망들이 바로 존재감, 자존감 충족이고, 그 욕망을 깔고 다시 만들어진 욕망이 바로 권력, 돈, 명예 등에 대한 욕망이다.
 
즉 모든 욕망의 뿌리는 바로 생존이며 이를 위해 우리는 수많은 욕망을 만들어 냈고 그 욕망은 모두 우리를 행복하게 해준다. 왜냐하면 우리 몸은 생존을 보장 받게 되면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상을 우리는 행복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욕망을 버리기가 무척 힘들다. 욕망을 버리는 것은 생존을 포기하는 것과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못해도 줄일 수는 있다. 그것은 바로 원래 우리가 느끼는 본능적 단계의 욕망 자체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다.
 
살기 위해 먹고, 자식을 낳기 위해 섹스를 하고, 몸을 회복 시키기 위해 잠을 자면 된다. 먹기 위해 살고, 쾌락을 얻기 위해 섹스를 하고, 편안하기 위해서 잠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 바로 원래 우리 몸이 원했던 본질로 되돌아 가면 된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렵다.
 
이미 이런 것들이 주는 행복을 맛 본 인간은 맛있지 않으면 먹지 못하고, 스스로 자위를 하면서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전혀 아이와 상관없는 동성간의 사랑도 한다. 물론 이 역시도 욕망의 다른 모습이지만 말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외부 전기 자극을 통해 우리가 원하는 모든 욕망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마약을 통해 하긴 하지만 그것은 제어되지 않아서 불안하고 위험하다. 하지만 제대로 제어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좋은 발전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먹지 않고도 먹는 행복을 누리고, 섹스를 하지 안 해도 성적 쾌락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단지 그것을 얻기 위한 돈만 벌면 된다. 따라서 우리에겐 사회 속에서의 존재감을 얻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욕망이 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 발전 방향이다.
 
여기에서 단 하나의 문제점은 바로 우리가 가진 본질적 욕구, 즉 생존에 대한 욕구가 모든 욕구의 기반에 있다는 것을 점차 잊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젠가 우리가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종말을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죽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역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