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적극적인 혹은 방관자적인

아이루다 2014. 7. 26. 07:21

 
학창시절 불교에 대해 배울 때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다. 오래 되었지만 지금의 기억을 되살려 그때 이해한 두 종류 불교의 개념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소승 불교는 자기 구도, 그리고 부처에 다다른 해탈까지의 개인적 목적이었고, 대승 불교는 개인적 관점에서 좀 더 나아가 부처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인간 사회의 의미 있는 변화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이것에 대한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단순하게 소승 불교보다는 대승 불교가 더 옳은 방향이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종교라면 자기 혼자만 득도를 해서 부처가 되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웬만큼 먹고 다시 이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니 그 구분을 그리 단순하게만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현실적으로 개인이 사회를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역사상 한 명의 인간이 전 세계적인 영향을 미친 경우는 꽤나 자주 등장한다. 그것은 알렉산더, 징기스칸과 같은 칼과 병사를 이끌고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영웅을 통해서도 나타났고, 불교, 기독교를 만든 종교 지도자들을 통해서도 발현되었으며 페니실린이나 백신과 같은 의학 기술적 발견에서도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스마트 폰을 만들어 낸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도 그런 류의 사람일 수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이 세상을 상대로 큰 반향을 주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기 마련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것을 이루어낸 것에는 개인이 가진 의지력보다는 타고난 능력과 이미 고정된 배경 그리고 특히나 수 많은 운이 따랐다는 점을 쉽게 간과한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 세상을 바꾸고자 마음을 먹고 그것을 향해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어쩌면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단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아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 냈을지는 의문이고, 21세기에 태어난 히틀러는 그런 독재 권력 만들어내고 반 인륜적인 폭력적 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을까? 역시도 비슷하다.
 
냉정히 말해서 현실적으로 개인이 마음을 먹고 세상을 바꾸고자 할 때, 그것은 이루질 가능성보다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비교하지 못할 만큼 높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은 많지만 세상은 잘 바뀌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전혀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연히 상황과 잘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세상을 바꾸게 하는 힘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민주주의의 절대적 원리처럼 믿고 있는 삼권 분립 중 행정과 사법의 분리가 미국에서 태동될 때 2, 3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와 토마스 제퍼슨의 정치적 알력으로 인해 우연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대승 불교가 원하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노력은 결코 의도대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기 마련이다. 실제로 이것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사랑과 용서, 화해를 말하지만 지구촌엔 아직도 전쟁과 학살, 증오, 무차별한 폭력이 매일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서 종교를 통해서든 아니든 인간적 완성을 꿈꾸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어떤 길을 선택해야 할까? 해도 가능성이 아주 낮은 대중과 함께하는 구도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옳을까? 아니면 결국 불가능할 가능성이 너무 높은 길은 포기하고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그 자신에게만 집중을 하는 것이 옳을까?
 
물론 그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것 자체도 정말로 힘들어서 그조차도 안 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완성보다는 사회의 완성을 꿈꾸고 강력한 신념과 믿음을 기반으로 하여 사회 속에서 정치활동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꽤나 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자아의 완성이란 주제는 좀 한참 뒤쳐져 있으니 이들과 먼저 말한 인간적 완성을 꿈꾸는 이들과는 기본적으로 출발점 자체가 다르다.
 
쉽게 얘기하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꿈을 꾸고 희망으로 가득 차 정치에 입문한 사람과 삶에 대한 지독한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구도의 길을 가는 어떤 스님과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단순화 시키면 이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에 대해서 과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기준으로 단순화 시켜서 참여자와 방관적 입장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참여자로써 그 시작이 정치이든 종교이든 상관없이 세상을 바꾸고자 꿈꾸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곳은 각종 음모, 배신이 난무하는 세상이며 진리와 정의는 책 속에서나 나오는 말임을 알게 되는 인간 세상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 변화를 꿈꾼다면 결국 같은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반면에 방관자로써 그런 세상에 대해 그리 많은 기대를 하지 않고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을 얻고자 한 자는 어느 깊은 산중에 은거하여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자신만을 상대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은 반드시 중일 필요는 없다. 설령 서울과 같은 번잡한 대도시에 살아도 타인과 인연을 끊고 그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노출된 매체들을 보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것도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타인이 자신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최소화 시킬 수만 있으면 되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후자는 전자에 비해서 매우 소극적 태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비겁해 보이기까지 하다. 혼자만 그 답을 찾아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것은 이 문제 투성이 세상을 그냥 두고 혼자만 잘 살겠다는 심보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 놓고 비난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처음에 말한 대로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꿔지는 것이 아닌 세상이기 때문이 그렇다.
 
물론 이것은 원래 관심조차 없고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과는 차원이 다르니 마냥 이기적이라고 부르기도 그렇다. 엄격한 스스로에 대한 통제와 견고하게 쌓아가는 도의 경지는 결코 인간 세상에 그냥 있는 것보다 쉽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즉, 세상을 떠나 산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개인의 행복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행복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정말로 오랜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런 문제를 곧잘 마주하게 된다. 세상은 문제투성이인데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과 의지가 없으니 보고도 못 본 척, 봤더라고 그냥 그때만 분노하거나 마음 아파하고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망각해 가는 모습이 바로 보통 우리들의 평범한 모습이다.
 
여기에서 어떤 삶을 선택해야 그런 초라하고 무기력하고 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벗어날 수 있을까? 누군가처럼 적극적으로 뛰어나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모든 것을 접고 자신에게만 집중하면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대다수가 선택하는 그냥 그 모습대로 살아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물론 그냥 사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선택이다. 앞에 나서는 것도 자기 세계로 파고드는 정말로 힘든 결정이며 또한 쉽게 행복하기 힘든 길이기도 하다.
 
어떤 결론이든 간에 사람은 어느 정도 나이가 먹으면 이것을 결정해야만 한다. 만약 계속 그런 고민과 번뇌 속에 살아가게 되면 미치거나 매우 불안정한 성격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선택 가능한 것들 중에서 가장 자신에게 맞는 것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몰라도 이런 고민은 인간들 중에서 아주 소수만이 하게 되는 것이기에 실제로는 큰 문제 꺼리는 아니다. 단지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이라면 매우 중요한 결정이다.
 
그렇지만 또한 이것의 결정 자체는 꽤나 쉽다. 그것은 이미 타고난 성격, 가지고 있는 생각 등을 통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을 최종 마음 먹기만 달린 것이다. 단지 문제는 그런 결정을 완전히 내리고 실천하기엔 마음 속에 걸리는 것이 많이 있을 뿐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방법들 중 정답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존재로써 세상에 있어야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나 혼자만으로 결정될 수 없기 때문에 마음에 많은 것이 걸린다는 뜻이다. 내가 있다는 것은 남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혼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결정하기는 쉬우나 결정 되었다고 해서 그대로 살기도 매우 어렵다. 물론 보지 않고 듣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도 나름 괜찮은 방법이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저 방법일 뿐 아닌가? 안 본다고 없는 것도 아니고 안 듣는다고 소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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