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만들어지는 가치

아이루다 2014. 6. 20. 07:55

 

인간에게 있어서 먹고 자고 싸는 등의 생존 자체의 행위를 제외하고 나면, 동물들과는 다른 우리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가치있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우리들의 거의 본능과도 다름없는 욕구이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먹을 것이나 입을 것 그리고 잘 곳과 같은 생존 자체에 관련된 것들도 역시 중요한 가치의 일종이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더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과 더 안락하고 살기 좋은 집을 얻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이것들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단지 이런 생존에 연관된 가치로만은 살아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누구나 자신만의 살아갈 이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보통 인간들은 그 자신이 살아갈 이유를 명시적으로 찾지는 않는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떤 이유나 경로를 통해서 얻어진 가치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그 자신의 존재 이유에 대한 필요성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법을 선호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그 과정 전체를 제대로 인식하면서 행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나중에 시간이 한 참 흐른 후 지나 온 시간을 되돌려서 볼 때 그때야 바로 그것이 자신을 살게 해줬음을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끝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 자녀를 키우는 부모는 처음엔 자녀를 위해 모든 양육행위를 한다고 착각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국 그 아이를 키우는 것이 자신의 행복임을 알게 된다. 즉 부모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녀를 키운다. 그런데 자녀가 행복해야 만족도가 더 높아지므로 당연히 자녀가 행복하길 바라게 된다. 좋은 조화이다.

 

아무튼 가치의 중요성은 이전 글에서도 설명한 적이 있었고 혹은 지금 바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라고 해도 그리 어렵지 않게 설명 가능하다. 그만큼 가치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명백하며 또한 우리는 이런 가치들을 묶어서 가치관이란 용어를 쓰기도 하여 삶의 이유나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필수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가치란 것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지는 것일까? 물론 가치가 어떻게 만들어 지느냐에 대한 글 역시 기존에 몇 번 언급해왔었다. 가치는 기본적으로 자원과 노력과 시간이 투자될 때 만들어 진다. 그런데 지금의 질문은 그 과정보다는 대상에 대한 궁금증을 언급한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대상을 가치 있다고 느끼고 선택하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가치의 특징 중 하나는 바로 그 가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을수록 그 가치의 대상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대상 가치의 중요도 자체가 올라가게 된다. 즉 우리는 서로가 상대의 가치를 인정해줄 때 가치가 상승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가치는 인정하는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다. 결국 가치가 만들어 지는 과정은 그것에 가치를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하나의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조그맣고 하얀 돌멩이가 하나 있다고 치자. 어떤 이가 이 돌멩이를 발견하고는 매우 좋아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친구에게 이야기 했는데 그가 아는 모든 이들이 그 흔한 돌멩이가 무슨 가치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얼마 후 처음에 돌을 주운 당사자는 그 돌멩이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 버리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집안에 구석에 짱 박아 두고 오랜 시간이 흐르자 기억에서 조차 사라졌다.

 

이것과 함께 이 돌멩이의 가치는 사라졌다.

 

그럼 이제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같은 상황에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이 돌멩이를 주운 것을 부러워하고 그 자신도 같은 돌멩이를 주우려고 노력하는 상황이라고 가정해보자. 심지어 돈을 주면서 팔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해보자. 이럴 때 당사자는 당연히 이전 경우와는 달리 이 돌멩이에 대한 가치를 느끼고 따라서 소중하게 간직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상황이 잘 이해가 안 간다면 이 돌멩이를 그냥 얼마 전 우리나라에 떨어진 운석으로 생각해보자. 실제로 그 운석은 지구상의 돌과 약간 차이가 날 뿐 그냥 돌멩이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주에서 떨어진 운석이라는 이유로 인해 이것의 가치는 지구상의 일반 돌멩이와는 차원이 다르게 여겨진다.

 

이 전체적인 과정이 우리가 어떤 대상에 대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과정이 된다. 3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개는 복날 잡아 먹을 대상이나 혹은 집을 지키는 존재로써 정도만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개를 예상 주사를 접종 시켜주는 것이나 미용을 위해 털을 깎아 주는 짓은 정말로 쓸데 없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요즘처럼 애견인들이 많은 세상에서 예방 주사나 혹은 각종 애견 용품에 돈을 쓰는 것은 그다지 쓸데 없는 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가 달라진 것일까? 아니다. 개는 그냥 개였다. 그런데 인간의 사회에서 개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면서 개는 기존과는 다른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치를 교환할 때 쓰는 각자가 가진 돈을 개에게 쓰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돈과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개는 다른 개와는 달리 그 본인에게 중요한 가치가 되어 준다. 그리고 이렇게 가치가 부여 된 개는 그 개의 주인에게 살아가는 의미가 되어 줄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치 있는 갖고 추구하는 것은 삶을 연속시키는데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일이며 거기에 더해 우리가 늘 얻고자 하는 행복을 향한 길을 가게 해주는 중요한 수단도 된다. 그래서 가치 있는 것이 많은 이일수록 더 행복하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니 누구나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싶어하는 것이 보편 타당한 생각과 행동 양식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가치는 가지고 싶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보편적인 가치도 있지만 그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든 수 많은 가치들 중에서 누구나 자신에게만 맞는 가치가 있다. 그래서 남들이 아무리 가치 있다고 설득해도 본인이 못 느끼면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그 자신에게 맞는 가치를 찾아 내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길이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명 사회가 발달하면서 한 가지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앞의 예를 들었던 이야기를 이용해서 설명하면 과거에 하얀 돌을 주운 사람이 주변에 자신이 아는 이들 20명 정도에게 이 돌을 보여주고 자신이 느낀 가치를 공유해보려고 했으니 실패해 돌을 버리고 말았다면, 이제는 그 돌의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 상의 어딘가에 올림으로써 수 만에서 수십만 명이 그 돌을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실로 대단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만약 평균적으로 1000명 중 한 명이 이 돌의 가치를 느낀다면 10만명이면 백 명이라는 숫자의 가치 있다는 것을 공유할 사람을 찾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 모두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중 10%만 의사 표현을 했어도 10명의 사람이 바로 처음 돌을 주운 당사자와 같은 가치를 표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터넷의 대단한 힘이며 또한 이것으로써 과거엔 그냥 사라졌었던 수 많은 가치를 가질 수 있는 대상들이 미지의 다수라는 숫자의 힘으로 인해서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다 보니 과거엔 국수적으로 쓸데 없는 것이나 짓이나 그것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가던 수 많은 것들이 인터넷이라는 넓은 세상을 통해서 가치로써의 생명을 얻어 사람들 사이에 공유가 되고 이로 인해 원래 그것들에 가치를 못 느끼던 사람들조차도 처음엔 무시하다가 차츰 반복되는 교육에 의해서 서서히 스스로 가치를 느끼진 못해도 가치를 느끼는 사람들 인정하는 정도로는 발전이 된다.

 

즉 이것이 바로 어떤 대상에 있어서 가치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는 분명히 전통적으로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알고 있다. 그것에는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 돈과 같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나 혹은 애국심, 희생 정신, 배려심, 의리와 같은 정신적으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가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전통적 가치들은 딱히 누가 그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설득할 필요 없이도 그냥 알아서 가치 있다고 느껴지게 된다. 물론 정신적인 것들은 보통 사회로부터 교육을 받아서 생기긴 한다.

 

이런 전통적인 가치들의 특징은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상대를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만약 애국심이 가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고 쳐도 그 사람을 미친 놈이나 매국노라고 몰아 부치면 대다수의 다른 사람들이 동조를 해주기 때문에 거기에서 더 이상 애국심이 가치 있는지 없는지 싸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작고 하얀 돌은 다르다. 10만 명 중 100명이 그 돌의 가치를 인정했다고 쳐도 인정하지 않는 나머지 9만 명 이상의 사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100명에게 중요한 가치는 이제 나머지 9만명에게 이것이 왜 가치가 될 수 있는지를 설득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100명에게는 설득되는 숫자가 하나라도 늘수록 돌멩이에게 가치를 느끼고 있는 자신의 당위성과 돌멩이 자체의 가치가 높아진다.

 

기본적으로 가치의 창조는 개인의 행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할 수록 우린 더 행복하기에 누구나 우리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내거나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데 행복이란 것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당장은 행복하나 시간이 지나면 쉽게 잊혀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당장 크게 행복하지는 않아도 많은 시간이나 혹은 평생에 걸쳐서 좋은 것들이 있다.

 

보통 우리의 삶의 패턴을 볼 때, 우리는 당장 행복한 것을 선호한다. 이것은 본능적이며 단지 여기에서 당장 행복한 것만을 추구하다간 나중에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조정을 하곤 한다.

 

재미 있는 개그프로를 보거나 신나는 액션 영화를 볼 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우리는 행복해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일어난다. 보통 가치 있는 것을 통해 행복을 느낄 수 있는데 이젠 반대로 행복이 가치 있는 것을 만들어 주게 된다.

 

물론 행복하기에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은 전혀 이상한 흐름이 아니다. 하지만 단기적 행복, 즉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즐거움을 가치로 환산시키는 과정에서 무리한 의미부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의 쉬운 예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대표적인 개그 프로그램인 개그 콘서트를 많은 이들이 즐기며 본다고 쳤을 때, 이것을 즐기는 것은 상관없는데 이것을 가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느끼고 즐기는 것 이상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자신은 개그 콘서트가 너무도 소중해서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표현하는 경우로 이해하며 된다. 그런데 이런 사람의 생각에 대해 얼마나 많은 다수가 이것을 인정할까?

 

이런 경우는 정말로 많이 일어난다. 드라마, 유명한 스포츠 스타, 배우, 아이돌이라고 알려진 그룹 가수들, 특정 회사의 전자제품 등등 우리가 흔히 가치를 느낄 수도 있고, 가치 있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 힘든 것들도 있다. 그래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이들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빠 라는 식으로 그들을 비하 한다.

 

이것은 가치를 느끼는 쪽에서는 그 가치를 더욱 가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려 애쓰는 것이고 반대로 전혀 가치를 못 느끼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의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한심하게 쳐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말 했듯 이것이 단지 동네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나마 쉽게 수습될 수 있다. 동네 애들 10명 중 1명만 가치를 느끼게 될 때 그 나머지 9명이 무시하면 가치를 느낀 한 명은 쉽게 포기한다. 하지만 인터넷의 세계는 다르다.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또한 거기에 더해서 현실의 세계보다 훨씬 관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별하기가 무척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스운 말로 인터넷에서 가장 큰 거짓말이 "ㅋㅋㅋㅋ" 라고 한다. 이것은 명확하게 웃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것을 치는 사람은 웃고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인터넷의 공간에서는 딱히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타인의 가치에 대해서 그냥 관대하게 대할 수 있다. 설령 그 자신은 전혀 그것을 가치 있다고 느끼지 않더라도 너의 가치를 인정해주겠다는 온라인 세계 전용 아량을 베풀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사라질 수 밖에 없던 가치들이 무덤에서 부활하듯 살아나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것을 좋은 말로 다가치 사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다가치 사회가 될수록 사회적 쏠림 현상이 줄어 들어서 우리는 좀 더 자신에게 맞는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 수 있게 된다. 즉 가치가 다변화 될 수록 사회적 시선보다는 그 자신이 느끼는 가치에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역시나 여기에서도 문제가 발생한다. 앞에서 말 했듯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찾기는 참 힘들다. 많은 노력이 필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그나마 안전한 전통적 가치를 자연스럽게 갖지 못한 이들은 이젠 재미를 통해 행복을 느끼고 그 행복을 이용해 가치를 만들어 내려 애쓴다.

 

하지만 가치란 것이 재미난 순간처럼 그리 쉽게 사라져가게 되면 가치로써 의미를 갖기가 힘들다. 오늘만 가치 있는 것이 어떻게 어떤 인간에게 있어서 가치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손톱 깎기는 손톱을 깎을 땐 최고의 가치를 갖지만 그 순간은 매우 짧기에 우리는 손톱 깎기를 가치 있어 하지는 않는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들은 많다. 그렇기에 가치는 끝없이 만들어지고 또한 쉽게 사라져간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만족된 가치는 그 자신의 삶과 함께 할 가치를 만드는데 있어서 노력을 덜하게 만든다. 즉 당장은 행복하니 인생을 함께 할 행복을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다가치 사회는 좋지만 단가치 사회는 좋지 않다. 한 번 만들어진 가치는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때 진정한 의미의 가치라고 평가될 수 있다. 당장 입에 맛난 음식은 행복으로써 큰 가치를 갖지만 장기적으로 보아 그로 인해 살이 찌고 건강을 해쳤다면 그것을 가치로 인정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그 가치가 어떤 종류이든 그 자신이 정말로 깊고 오랜 시간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남의 평가가 필요 없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 자체가 그 자신에게 있어서 가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몇몇이 그 설명을 듣고 동조를 해줬다고 쳐도 그것으로 인해 불확실한 가치가 확신으로 변하겠는가?  그러다가 누군가 또 그것을 반대하면 금새 확신이 의심으로 변할 텐데 말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진정한 자신만의 가치를 찾고 살기엔 너무도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결혼을 하고 애를 키우는 전통적 가치 있는 삶을 많은 이들이 늦추고 포기하는 이유 역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치 있는 것에 대한 포기는 할 수 없으니 (행복을 포기하는 것이니) 이젠 마구잡이로 가치를 만들어 내고 생명을 불어 넣었다가 금새 죽이는 일을 반복한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고 찾지 않는다면 우리들 자신의 삶을 함께할 그 자신만의 가치는 절대로 먼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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