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의 무게

아이루다 2014. 6. 2. 10:42

 

몇 해전 '더 로드' 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아르곤의 역할을 맡았던 비고 모르텐슨이란 배우가 나와서 유난히 좀 더 친밀함을 느꼈던 영화인데, 실제로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 한 구석이 묵직한 느낌을 받고 영화가 끝나고 난 후에도 별로 개운한 느낌이 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지구는 파괴되고 아들과 함께 그 위험하고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영화를 보는 내내 슬프고 고통스러우며 그로 인해서 결코 영화를 통해 기대했던 행복감이나 혹은 즐거움을 경험할 순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산다는 것은 처절하고 또한 잔인하며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도하지 않은 사건들이 두 부자의 삶을 마음껏 휘저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무런 힘도 없이 흔들리는 두 사람에게 주어진 삶이란 정말로 부평초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와 비슷한 류의 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일라이' 라고 알려진 작품인데, 이 영화는 그나마 로드보다는 덜 무겁다. 그래도 이 세상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려는 한 남자의 처절하고 슬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두 영화 중에서는 '더 로드'를 좀 더 높게 쳐주고 있다.

 

이런 영화들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미드도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보는 미드 중 순위를 꼽자면 1,2등을 다툴 수 있는 작품인데, 그것은 바로 '워킹 데드' 라고 알려진 미드이다. 이 드라마 역시도 좀비 전염병이 퍼져 멸망해가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절한 사투를 그리고 있다. 최근 시즌 4를 조금 봤는데 그 희망 없음과 삶에 지쳐가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도 무겁게 다가온다.

 

이런 류의 작품들에서 내가 공통으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바로 극 사실주의 이다. 그들에게 세상은 현실처럼 그리 운좋은 것만은 아니고 어쩌면 더욱 더 운이 나쁜 쪽으로만 움직인다. 하루하루의 삶은 살아가지만 미래의 삶은 불투명하며 왜 존재해야 하는지 또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과연 먹고, 자고, 싸는 동물적 욕구만 충족되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 가치 있는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도 하게 된다.

 

대다수의 영화나 드라마, 소설 등은 보통 권선징악을 주제로 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희망을 말하려 하고 있다. 또한 극적 요소를 높이게 위해 심각한 갈등 요소를 넣어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그 해결은 보통 너무 쉽거나 운이 좋게 끝나기 마련이다. 재미를 위해 극적인 위기를 넣었지만 그럼으로써 일반적인 해결책이 제시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전개된 수습하기 힘든 상황은 결국 제 삼자의 능력이나 혹은 주인공의 선함에 매료된 주변 인들의 도움 등을 통해 다소 허망하게 봉합되고 약간의 억지스러운 행복한 결말을 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워킹 데드나 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미드인 '하우스' 에서는 그런 뻔한 결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하우스 역시도 거의 모든 이들을 치료해내는 한편 한편에서의 해결책은 그렇게 보이지만 비뚤어지고 못된 인물로 나오는 하우스의 삶은 도대체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매번 붕괴되어 간다.

 

워킹 데드의 실질적인 주인공 격인 '릭'은 그들 무리를 이끄는 리더이지만 스스로는 절대 영웅이 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는 그 자신의 삶에 절망하고 그가 죽여야 하고 또한 그의 눈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로 인해 매일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런 주인공들에게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들에게 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구동성으로 '죽는 것이 더 낫지만 죽을 수 없기 때문에 산다' 라는 말을 할까?

 

 

우리 인간은 모두 동일한 삶을 산다. 여기에서 동일하다는 것은 호흡하고 먹고 싸고 자고 아이를 낳을 수 있고 가족을 꾸리는 등의 보통 사람들의 모든 행동을 말한다. 하지만 삶의 형식이 동일하다고 해서 삶의 내용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타고난 지적 능력, 육체 능력, 살아가면서 겪는 수 많은 사건과 갈등, 부모의 능력, 자녀의 능력 등등 삶의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너무 다양해서 단 한 명도 내용으로 따질 땐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없다.

 

어떤 이유로 인해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 이도 있고 운이 좋아서 부자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과 좋은 직장에서 일명 상류층 삶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처음부터 가난한 집에 태어나고 거기에 타고난 능력도 떨어져 평생을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 때 잘나가다가 병에 걸리거나 사고를 당해 삶의 거의 모든 가치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온갖 종류의 삶에서 각자가 자신의 삶에 대해 느끼는 무게란 도대체 어떻게 가늠을 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신의 체중을 재거나 체지방을 재고 암 검사 등을 받을 수는 있지만 그 어디에도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재는 장치는 없기 때문에 이것을 알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삶의 무게를 기반으로 타인의 삶의 무게를 측정하는 것에 익숙해서 상대가 짊어진 무게를 너무 쉽게 평가하려는 경향도 보인다.

 

설령 그 무게가 같다고 해도 그것을 짊어진 사람의 체력을 고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같은 무게를 졌는데 왜 너만 힘들다고 하냐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짊어진 무게를 보라고 하면서 너 역시도 이런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젊잖게 훈수를 두기도 한다.

 

그래서 가끔은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구어서 결국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이들에게 '죽을 용기로 살면 되지 왜 못나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에 대해 비난이 섞인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자살을 하는 이유가 과연 용기가 있어서 그런지 라고 나는 좀 되 묻고 싶다. 정말로 용기가 있었다면 자살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이런 조금은 어처구니 없는 삶의 무게 측정법은 수 많은 편견을 낳고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 사회는 서로의 무게를 비교하면서 각자 가장 힘든 삶을 산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미 사회적 시선으로 보았을 때 충분히 성공한 사람들 역시도 자신의 불우한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그런 어려운 시기를 넘어 온 자신의 삶을 치장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아무런 희망도 없고 매일매일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하면서 불안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나 자신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때 나는 과연 지금처럼 삶의 의미를 고민하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정의하려고 노력하고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마도 나는 그렇게 되었다면 나의 생존을 그리고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런 과정으로 인해 나는 삶에 대한 고민 자체를 머리 속에서 깨끗히 삭제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그 상상은 그리 틀리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면 현재의 나는 단순히 배가 부르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기에 하는 것일까? 이런 조건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급속도로 동물처럼 변해서 나 자신의 생존만을 고민하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될까? 나는 가끔 이것이 정말로 궁금하기도 하다.

 

인간은 정말로 딱 생명의 위협이 없을 때까지만 낭만적이고 자유롭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 자체가 위협을 받게 되면 더 이상 웃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모두들 자신의 자유를 최우선의 가치로 여기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를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있어서 전쟁이 비극인 이유는 바로 삶의 본질적 무게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쟁은 우리들이 우아한 세상에서 음악을 들으며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행복해하던 모습을 단번에 빵 한 조각에 싸우고 내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방을 경계하며 남의 것을 호시탐탐 노리는 모습으로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인간다운 우아함을 보이는 것은 오직 우리가 충분히 만족할 만큼 가졌기 때문이며 또한 오늘 우리를 먹이로 삼는 지구상 존재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안전한 사회적 울타리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들은 그런 자신의 모습을 기억 할 수도 또한 생각하면서 살 수도 없다.

 

하지만 그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세상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아주 낮을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오만해도 아마 정말로 재수가 없지 않는 한 핵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며 온난화가 아무리 진행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지는 못할 것이다. 또한 좀비를 만드는 이상한 병원체가 나타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며 그로 인해 우리 인간 사회가 한 순간에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 대다수는 실제로 그런 영화 속 세상에서 살아갈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젊잖고 우아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마치 우리가 태생적 선한 존재인양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인간은 우리를 존재하게 만든 우리의 오래된 조상들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적 한계를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우아하겠지만 언제라도 우리를 지켜주는 사회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되면 공포와 두려움과 경계심을 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또한 그런 위기는 우리를 좀 더 생기 있게 해줄지 모른다. 마치 토끼만 있는 서식처에 여우 한 마리를 넣어 주면 소수의 죽는 토끼가 있지만 다수의 건강한 토끼가 생겨나는 것처럼 말이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100% 맞을 순 없다. 우리가 아무리 예측을 하고 통제를 한다고 해도 세상은 그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또 어떤 것들이 우리가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에 더해질지 혹은 빼질지 모르겠다.

 

내가 지금 단지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지금 우리 개개인이 느끼고 있는 것은 삶의 완전한 무게는 아니란 것이다. 그러니 타인의 무게를 쉽게 무시하지도 자신의 무게를 과도하게 무겁다고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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