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욕망을 대하는 자세

아이루다 2014. 5. 26. 09:57


인간은 정말로 특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무리 생활을 하도록 습성이 정해져 있다. 아프리카에서 작은 규모의 부족과 사는 어떤 사람과 뉴욕과 같은 대도시에 사는 사람의 차이라고 한다면 단지 그 무리의 규모만 있을 뿐 근본적으로 인간이 무리를 지어 사는 삶의 형태는 다름이 없다.
 
인간은 개나 고양이와 같은 존재가 아닌 그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 - 인권을 갖고 소속된 사회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 -  존재와 살아가기 때문에 그 관계의 본질적 특징이 상하가 아닌 평등하고 동등한 입장으로 서로를 대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니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또한 이것을 그 자신의 이득으로 만들어 내는데 있어서 매우 복잡한 셈법이 필요해졌다. 
 
그런데  사회의 규모가 커질수록 다양한 형태의 인간이 나타나고 그 인간들끼리 경쟁이 일어나다 보니 아프리카에서 수 십명 단위로 살아가던 어떤 부족의 일원보다는 대도시에서 대규모 경쟁 속에서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이 훨씬 관계의 계산을 위한 경험을 할 기회가 많고 그것을 통해서 실제로 계산 실력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게 된다.
 
이것은 역사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19, 20세기에 제국주의 팽창 시기에 유럽인들은 기술적 우위도 갖추고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들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소규모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그 순박함을 지니고 있던 이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어 조종할 수 있었던 계산법임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를 위한 계산법을 배우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생존의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문제는 이 계산법이 꽤나 어렵다는 점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계산법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발달된 지능과 제어 가능한 성격을 모두 제대로 갖춰야 한다.
 
관계 계산을 위한 지능의 역할을 당연히 미래에 대한 예측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즉,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이 나에게 혹은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과 타인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지를 예측해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타인을 주변 사람 정도로 한정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일이고 지역 사회나 나라, 인류 전체로 확대하는 것은 보통 학자들이나 보통 사람들 보다 좀 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의 행동이 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좀 더 명확한 결과적 차이가 존재하는데, 주변 정도에서 머무는 사람보다는 그 범위가 커질수록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하지만 능력이 안 되는데 그 범위를 확대하는 것이 좋다는 사실만을 인지한 채 잘못된 미래 예측이나 혹은 능력이 안되니 다른 이들의 미래 예측을 참고하거나 맹목적으로 따르게 될 때 커다란 손해를 입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이것을 개인 차원에서는 사기를 당했다고 표현하는데 실제로 가장 큰 문제는 그 사기를 당한 본인에게 있는 것이 맞다.
 
그렇다면 지능만 되면 다 해결이 될까? 아니다. 두 번째 항목인 성격은 지능 못지 않게 중요하다. 지능은 이득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면 성격은 그것을 실제로 해낼 수 있도록 해준다. 쉽게 예를 들어서 똥을 먹으면 100만원을 벌 수 있다고 했을 때 그것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은 지능이지만 그것을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것은 성격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남들보다 똑똑하고 스스로도 잘났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어처구니 없는 실패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런 실패의 거의 대부분의 이유는 바로 성격적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은 그 본인들은 그것이 성격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생각은 하더라도 스스로 제대로 된 인정을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기엔 스스로 잘났으니까.
 
나에게 지능과 성격 중 이득을 얻는데 있어서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성격이라고 말 할 것이다. 지식은 반드시 그 자신이 생각해낼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실현해내는 성격은 절대로 남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특수한 예도 있다. 로마의 황금기를 만들어 낸 초대 황제 옥타비아누스는 그 자신이 카이사르에 비해 외적과의 전쟁을 주도할 군의 리더로써 자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는 자신을 대신해서 전쟁을 실천할 아그리파라는 인물을 대리로 세웠다. 즉 자신은 지능을, 아그리파를 통해서는 성격을 실현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아그리파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황제는 언제 그 자리가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정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이런 무모한 짓은 하지 못하는 게 보통 인간의 행동 양식이다.
 
이 역사적 사실에서도 나타나 듯 옥타비아누스, 훗날 아우구스투스라고 불리게 된 이 황제는 자신의 지능을 총 동원해 아그리파 라는 인물을 대신 세울 수 있었던 판단을 해낸 것이다. 만약 그가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잘못된 판단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아주 심한 경우라면 로마라는 나라가 제대로 세워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다면 세계 역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끝없이 배우게 된다. 이 배움의 과정은 구체적인 언급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남을 흉내내거나 혹은 남의 뭔가 이득을 얻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그것을 얻고 싶어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도 흔하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그들이 쓴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

 
현실 세계에서 우리는 각자 많은 생각과 다양한 행동을 하고 살아간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보면 매우 합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전체를 보면 온통 혼란스러운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타인이 우연히 혹은 많은 노력을 통해 가능성이 높아진 우연한 기회로 얻은 행복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따라 하거나 운 좋게 얻게 되길 바라는 본능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자극된 욕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이 욕망의 근원엔 반드시 계산을 한 후 실행한 결과에 대한 성공을 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 있다. 즉 우리는 우리 자신이 타인보다 좀 더 계산에 능해 좀 더 많은 이득을 얻길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에게서 자신에게는 없는 어떤 행복을 느끼게 되면 자신도 그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좀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라게 된다.
 
이것은 소소하게 건강한 식품을 먹어서 건강해졌다는 어떤 주변인들의 이야기부터 로또나 운석을 주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아주 다양한 형태로 우리들에게 전해진다. 물론 우리는 로또에 대한 이야기는 좀 경계하고 몸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먹거리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겠지만, 이것을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정말로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일 뿐이기도 하다.
 
내가 시장에서 몸에 좋다는 당근을 사먹는 것은 거의 100% 달성 할 수 있는 것이지만 반대로 로또는 수백 만분의 일의 가능성이므로 실제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다. 따라서 1차원적인 계산은 채소보다는 로또가 더 좋지만 조금만 더 계산을 해도 채소를 사 먹는 것이 로또를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결론을 낼 수 있게 된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자극 받았을 때 그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과 버리고 무시하는 것의 차이점이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자극된 욕망을 받아들이거나 버릴 때 반드시 그것의 이유를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즉 그것을 잘 계산했기에 선택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서해안에서 보물이 발견되었다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문 기사를 보고 마는 수준이지만 어떤 이들은 배를 전세 내서 그곳으로 가기도 한다. 이것은 자극된 욕망을 사람마다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단순한 예이다. 그리고 아주 소수지만 배를 전세 내어 간 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분명히 그들만의 논리와 그들만의 믿음이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세상을 존재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욕망이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누구나 원하는 것이 있고 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이들에게 그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 듯 어떤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에 합당하게 계산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지능과 그것을 실제로 행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성격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대다수 많은 이들의 불행은 바로 스스로 이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타고난 지능은 부족한데 정말로 오랜 시간을 끊임없이 노력해서 결국 원하는 것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당장 그 자신이 그것을 얻지는 못해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해서 얻는 다는 말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바로 성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신이 정말로 끊임없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인내력과 추진력이 있는지를 제대로 바라봐야 한다. 그리고 이런 능력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똑똑한 머리나 노력을 오래하면 결국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은 우리로 하여금 자극된 욕망을 좀처럼 포기하기 힘들게 만든다. 일단 머리가 좋으니 어떤 식으로든 성격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것이고 지능은 떨어지지만 성격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보통 이룰 가능성이 아주 낮은 것들은 그리 아쉬워하지 않고 살아간다. 로또를 사는 사람들이 매주 1등이 될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되면 하는 심정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룰 가능성이 매우 낮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능력을 오판하게 되면 이것이 얻을 수 있을 것이란 착각에 빠져서 그 욕망으로부터 헤어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고 이것은 다시 본인을 매우 스트레스 받거나 불행하게 만든다.
 
즉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 이 작은 문제는 자극된 욕망으로 증폭되고 그 결과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대학에 갈 필요가 없는 사람이 그리 좋지 않은 어떤 삼류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교 졸업생이기에 하지 못하는 일들을 보게 되었을 때와 비슷하다. 이런 경우엔 그냥 자신의 처지에 맞는 일을 하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말 그대로 자극된 욕망이 그 자신이 생각했을 때 낮은 자리에 자리잡길 거부하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개인별 욕망을 가장 강하게 자극하는 존재는 누구일까?

 

이것의 답은 아주 쉽다. 그것은 바로 광고이며 이 광고를 만든 사람들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면서 우리가 속한 기업이다. 이 기업의 광고는 TV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사이트를 운영하도록 해주며 또한 수 많은 스포츠 행사가 열리도록 해준다. 

 

우리는 월 2500원의 수신료와 한달에 2만원 가량의 유선 비를 TV를 본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 안에 나오고 있는 그 모든 이들의 (연예인, 방송인, 스포츠 선수 등등) 연봉을 우리 스스로 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예인 누군가 월 10억을 벌었다면 TV를 본 모든 사람이 자기 돈을 보탠 것이 된다.


기업은 대중의 욕망을 자극하고 마치 자신들이 생산하는 제품을 사면 그 욕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다. 물론 아주 소수는 그럴 수 있지만 나머지 대다수는 거의 돈만 버리고 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오늘도 자극된 욕망의 덫에 걸려서 몸부림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자극이 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노출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그나마 현명한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고난 계산 능력과 그것을 실천할 성격적 능력이 없다면 포기할 건 해야 한다. 아니 겉으로는 포기한 척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든 불타오를 수 있는 잔재를 가진 욕망을 품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아채야 한다. 실제로 이런 욕망들이 광고를 통해 자극 받아 언제고 불타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이룰 수 있는 욕망만을 받아드리고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행복한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어떤 이들은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리고 인간의 사회 속에서 속해 살아가는 이상 욕망을 모두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현명하게 욕망을 골라낸 후 그것을 충족시키면서 욕망을 이룰 때 마다 몸이 주는 행복감을 느끼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욕망을 부추기는 사람들은 이젠 우리들에게 더 큰 욕망을 품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개발하라고 부채질 하고 있다. 즉 어느 정도 포기하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욕망을 품고 실현할 수 있다고 광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이제 자신의 현재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살 수 있는 선택마저 불가능해졌다. 우리는 이제 어떤 욕망이 자신이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할 처지가 아닌 그 욕망을 이루어내기 위해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래서 그냥 살수 있었지만 성형 수술을 하고 진한 화장을 해야 하며, 그냥 살 수 있었지만 왜 필요한지 모를 학위를 따고 영어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단칸 방에서도 살았던 우리 세대의 부모들은 20평의 아파트도 좁고 30평은 되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갈지 모르지만 지금보다 더욱 치밀하고 강력하게 우리를 자극시킬 욕망은 점점 더 그 범위를 확대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는 점점 더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뺏기게 될 것이란 이야기이다. 과거 우리는 소고기 국만 먹어도 행복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횡성 특A급은 먹으면서 입안에서 살살 녹아야 행복하게 되었다. 소고기 국물은 이젠 라면에서나 맛보는 맛이 된 것이다.

 

그나마 이런 척박한 현실에서 그 자신의 절제된 욕망을 지키고 살아가고 싶다면 최대한 광고에 노출되는 삶을 줄여야 한다. 그 중 가장 첫번째가 바로 TV가 된다. 그리고 인터넷, 스포츠를 보는 것들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이 세 가지를 빼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살아가야 할까는 의문이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또 다시 다른 자극을 받게 될 것이고 자신이 힘들게 번 돈을 그 자극받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란 또 다른 기업의 광고를 받아 들여서 마치 자신을 위한 삶을 산 것마냥 그래서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 왜 비싼 물건을 사야하고 왜 비싼 화장품을 발라야 하는지 그다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나는 소중하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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