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용기에 대하여

아이루다 2014. 5. 9. 07:47

 
한 20년 전쯤에 SBS 라는 방송국이 생길 무렵 '모래시계'라는 드라마를 방영 했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케이블 채널이 있던 시대도 아니고 또한 드라마의 내용 및 완성도가 높아 꽤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그 당시 살던 자취방에 TV가 없어서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드문드문 보기는 했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세 명의 주인공 격의 인물이 나오는데 검사 역으로 나오는 박상원, 카지노 사업을 하다 죽은 아버지를 둔 고현정 그리고 그 둘과 대척 점에 선 조폭으로 나오는 최민수이다. 이 셋은 모두 소중한 친구였는데 시대가 그들을 모두 다른 입장에 서도록 만든다.
 
이 드라마는 내용이 제법 복잡해서 내용을 설명하긴 힘들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국 검사인 박상원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최민수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역할을 해야 했으며 그것을 위해 아마도 고현정은 자신의 사업에 막대한 손해를 입는 상황에서도 증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즉 둘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상황에서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이를 사형으로 몰아 넣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 박상원이 최민수를 마지막으로 면회하는 장면에서 그 유명한 대사가 하나 나오는데 바로 그것이 '내가 지금 떨고 있냐?' 라고 묻는 장면이다. (정확한 대사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세상 만사에 모두 두려움 하나 없었고 사형 선고마저도 친구에게 직접 해달라고 말했던 최민수는 사형 집행에 앞서 자신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지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연하다, 초연하다 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것들은 보통 어떤 상황에 맞서서 감정적 격정에 휘말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데, 보통은 큰 두려움이나 공포에 맞서서 사람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멋진 반응이기도 하다. 하지만 뼈를 깎는 고통을 참고 바둑을 두던 관우의 용맹과 같은 이야기가 실제로 우리들에게 과연 '용기' 라는 것을 제대로 정의하고 있는 것일까?
 
나도 오랜 시간 동안 용기란 것이 바로 어떤 경우든 흔들리지 않고 늘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 한 차례의 갈등도 없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것은 바로 용기가 없는 것이며 설령 결론이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해도 과정 중에서 그런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을 용기라고 인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용기에 대한 이런 정의는 과거의 나에게도 연결이 되어 내 인생 전체를 아우르게 된다. 즉 과거에 내가 어떤 한 순간 용기가 없는 행동을 했었다면 나는 내 인생 전체에 용기 없는 존재로써 나를 정의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큰 불행한 일이기도 하다.
 
사람은 변한다. 오랜 시간을 통해 변해서 그 변함의 정도가 매우 약하긴 하지만 우리가 1년 , 10년이 지남에 따라 변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겁 많고 비겁했던 나는 평생의 나가 된다. 그러기에 나는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다고 스스로 믿게 된다. 그리고 미래에 또 어느 날 내 스스로 그렇게 과거처럼 비겁하게 행동할 것이라고 자조한다.
 
그렇지만 과연 이것이 맞는 말일까? 과거의 내가 용기가 없었다면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도 용기가 없는 것이 맞는 해석이 될까?
 
만약 용기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어떤 불의나 공포에 대해서 단호하고 물러섬 없이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해석이 맞는다고 보는 게 옳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용기의 정의는 과거의 잘못 전해진 이야기와 인간의 몰이해로부터 나온 잘못된 판단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이나 죽음의 문턱에 서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전해 내려오는 어떤 이들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들로 인해서 각색되고 치장된 만용으로 인해 벌어진 잘못된 용어의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용기는 어떻게 정의되어야 맞는 것일까?
 
만약 죽음 앞에서 설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용기라고 할 때, 인간에게 있어서 용기란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고 초연하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공포를 견디면서 힘들게 힘들게 한 걸음씩 아주 느린 걸음을 하더라도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린 벌벌 떨면서도 물러서지 않아야 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란 뜻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죽음에 초연해 보이는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신념이나 신앙의 힘을 빌어서 죽음마저도 초월한 듯한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실제로 이것은 용기가 아닌 만용이나 일종의 정신적 환상에 사로잡힌 상태로 봐야 옳다. 물론 이것이 미친 짓이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실제로 우리가 용기를 갖는다는 것에 정의가 바로 그들의 모습으로만 한정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믿고 흔들림이 없는 것은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힘이 되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대의를 위해 살아갈 수 있는 삶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와 싸울 수 있게도 해준다. 하지만 그 역시도 방향이 잘 맞을 때나 좋은 결과를 내지 그렇지 못할 경우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다.
 
과거 공산주의의 환상을 믿었던 지식인들이나 현재도 종교적 잘못된 믿음에 의해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는 사상과 종교적 관점에서 보여지던 용기는 실제로 세상에 커다란 해악을 끼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희생을 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사상과 종교간의 충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을 고려해본다면 우리가 흔히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정의 내려진 행동들은 결론적으로 용기 있고 위대한 존재로써 대접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로 조심해야 할 양날의 검과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사상과 종교에 완전히 몰입되어 한 점의 의심도 없는 상태는 보통 일반 사람에겐 도대체 그렇게 빠져드는 것 자체가 쉽지도 않다. 아마도 이것은 인간의 성격이나 특징과도 관련이 있는 듯 보이는데 잘 빠져드는 사람과 의심이 많은 이들이 분명히 존재하기에 그런 생각도 든다. 하지만 이 부분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가기에 여기까지만 언급하겠다.
 
우리는 용기가 아주 대단한 것이라고 믿기에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하지만 용기는 주저함, 후회, 불안함, 변덕스러운 마음까지도 모두 포함해야 옳다. 어떤 평범한 젊은이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불량배에 맞설 때 그는 정의감에 불 타 한 점의 두려움 없이 그 앞에 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 상황을 두려워하며 그들에게 맞서는 것을 후회하기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덜덜 떨 수 있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심지어 바지에 오줌을 싸더라도 상관없다. 그로 인해 그 불량배들로부터 비웃음을 살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때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의미의 용기이다. 그것을 신념이나 사상, 종교의 힘을 빌어서 하는 것은 좀 더 멋있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이 두 가지 경우에서 더욱 힘든 용기를 낸 사람이 과연 어떤 쪽일까?
 
이것이 용기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덜덜 떨면서 하는 것이며 정말로 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면 울면서 하는 것이 용기이다. 인간이 죽음이나 고통 앞에서 초연할 수 있는 것은 그야말로 정신적 마약을 맞은 상태인 것이지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란 뜻이다.
 
인간은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것은 자연적 본능이며 누구도 그것을 벗어날 수 없다. 단지 특정 사상이나 신앙에 완전히 빠져버린 사람들에 한해서 그것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럴 정도로 그런 믿음을 갖긴 힘들다.
 
따라서 평범한 사람들은 두 다리를 벌벌 떨면서 불량배 앞에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가져야 한다. 여기에서 두 다리를 떨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만용이다. 아니면 그 동안 싸움을 지겹도록 한 사람일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다리가 떨려야 옳다.
 
용기에 대한 다른 정의를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용기를 내기가 조금 쉬워진다. 다리를 떨지 않으려고 할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도 쉽지는 않다.
 
우리는 과거 각자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비겁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불의를 보고 눈을 감았고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에게 해로운 짓을 하기도 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 보다는 이득과 손해를 먼저 계산했으며 그로 인해 어느 날 스스로 나는 용기 있느냐고 되물었을 때 은근슬쩍 대답을 회피했어야 했다.
 
그런 후 우린 강한 영웅이 나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을 보고는 박수를 보내고, 드라마에서 나쁜 놈들이 죄를 받는 것을 보고는 후련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용기 있는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이 사회가 정의로워지지도 않는다. 우리가 용기를 실천하지 않는 한.
 
슈퍼맨과 같이 강한 힘을 가진 존재가 하는 행동은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능력이다. 검도, 유도, 태권도 도합 20단이 되는 어떤 무술사범이 불량배를 제압하는 것도 용기 있는 것이 아닌 능력이다. 우리 평범한 이들은 보통 어떤 무술이든지 1단도 없고 그 짧은 다리를 올려봐야 어깨 남짓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불량배에 맞서 싸워야 하고 사회의 불의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설령 너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불안하더라도 꾹 참고 또 참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 수 십 번이 들더라도 그 자리에서 버텨내야 한다. 그것이 용기다.
 
막연한 두려움에 한 번은 도망칠 수 있다. 물론 두 번도, 세 번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한 번 도망쳤을 때 그것을 반성하고 미래에는 그것보다는 조금 더 버티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다잡으면 된다. 정말 잘못하는 것은 도망 친 후 그것을 스스로 합리화 하는 짓이다.
 
과거의 내가 그 자리에서 도망갔다고 해서 현재의 나와 미래의 나가 그러지 않아도 된다. 우린 평생 두려움을 느낄 것이며 도망가고 싶어 할 것이다. 단지 과거에 도망쳤다면 지금은 조금 더 버티다가 도망치고 미래엔 제법 버텨주기만 해도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마지막까지 버텨낼 수 있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나보다 좀 더 어린 나이에 그 자리에서 버텨내고 있는 이들을 고깝게 보고 세상을 모른다고 비판하지 말고 소심하지만 작은 응원을 보내줘야 한다. 세상엔 이런 용기가 없다 못해서 다른 용기 있는 이들에게 자신처럼 비겁하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너무 많다.
 
매일 매일 조금씩만 용기를 내보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나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의 용기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처음에 바지에 오줌을 쌀지 모르지만 미래의 어느 날엔 얻어 맞는 것도 이골이 나서 나름 노련하게 고소하기 쉬운 부위를 골라가면서 얻어 맞지 않을까?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아지길 원한다면 우리 개개인은 이제 용기에 대한 다른 정의를 내리고 작은 용기의 실천을 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런 작은 용기들이 모였을 때 결국 큰 용기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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