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삶을 판단하는 어리석음

아이루다 2014. 4. 28. 09:14

 

지구라는 행성에는 그 위를 채우고 있는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또 그 만큼의 다양한 형태의 삶이 펼쳐지고 있다.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완벽하게 동일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원천적으로 존재 불가능 하며 따라서 우리 인간 모두는 각자 온전히 그 자신만의 유일한 삶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두 다른 인생의 여정 속에서 어떤 이유들로 인해 자신의 삶의 방향을 선택하고 또 그로 인해 맺어지는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여러 종류의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보통은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자신만의 고유의 삶 형태를 정의한다.

 

이런 우리 인간의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우린 보통 자신의 삶을 그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적 요소를(외모, 지능, 가족, 국가, 문화, 지역, 시대 등등) 고려하여 그 안에서 최고의 선택을 하는 과정으로 설명 할 수 있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엔 우리의 의도나 의지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우연하게 벌어지거나 혹은 전혀 의도와 상관없이 흘러가기도 해서 우리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산다는 것은 이런 전체적인 인생의 과정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는 시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경로를 통했든지 간에 성인이 되고 스스로 자신을 책임져야 할 나이가 되면 우린 보통 그 자신이 정의한 어떤 종류의 정의나 혹은 옳음과 그름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갖기 마련이다. 이것은 도덕책에 나오는 내용이기도 하고 자신의 삶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조언이나 미디어, 신문, 이웃, 친구, 아내, 남편 심지어 우리가 키우는 아이들의 의견까지 모두 종합된 결과로써 형성된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형성된 인생에 대한 그 자신의 정의는 이젠 다시 외부적 관점으로 표출되어 이젠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기준점으로도 작동하게 된다. 따라서 우린 이젠 자신의 옳음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들의 삶에 대한 재단을 시작한다.

 

실제로 우리에게 타인의 삶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좋은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향이 커서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긴 하다. 물론 이것은 딱히 옳은 판단이라고 내 자신은 생각하지 않지만 결국 타인의 삶을 판단하여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을 경우에 관계의 불편함이나 단절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결과는 바로 우리 개개인의 손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비 호감을 표시할 때 그 앞에서는 자제하고 뒤에 가서 소위 말하는 뒷담화를 즐기게 된다. 아무튼 어떤 형태로 이어지든 우리는 인간 사회라는 관계망 속에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맺어지게 되는 관계의 갈등이 시작되면 속으로든 겉으로든 소위 말하는 평가를 내려야 할 처지에 놓여 버린다.

 

이것은 어떤 관계로 인해 내가 불편해지거나 불행해졌다면, 그 원인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기도 하지만 실제로 보통은 상대의 문제로 인해 벌어졌다고 믿고 싶어하는 공통적 성향에 의해 나타나는 일반적인 사고 흐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이젠 두 개의 충돌이 일어난 다른 형태의 삶에서 그 생각의 주체는 어떨 수 없이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할 처지에 놓여 버린다. 예를 들어 시부모와 갈등이 생긴 며느리는 어떻게 하든지 그 시부모의 생각과 행동이 틀리고 그 자신의 것이 옳다고 주장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야 그 자신이 남편의 입장을 공고하게 하여 관계가 서먹해졌을 때 적절한 스스로의 핑계거리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직장에서도 나타나고 심지어 친구 관계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누군가 친한 지인과 어울리고 싶은데 그 친한 지인과 어울리는 또 다른 지인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평가를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표현은 평가지만 실제로는 비난이다)

 

이것이 발전하면 우리는 이런 관계성을 맺은 사람 뿐만 아니라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삶에 대해서도 비난하는 것에도 익숙해지는데 보통 사회에 관심이 많을 수록 이 경향은 심해지고 정의로움이나 공동체의 미래 등에 대한 생각이 있는 사람일 경우에도 그럴 수 있다. 우리 자신의 옮음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충돌하는 타인의 삶에 대한 비난 역시도 강해진다.

 

하지만 이런 우리들의 매우 일반적인 성향의 근간이 되는, 우리 타인의 삶을 평가할 수 있는 자신이 스스로 세운 판단 기준의 문제는 그 근거가 생각보다 너무 약하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이 말은 우리 스스로 타인의 삶을 비난할 때는 보통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기 마련인데 이 기준 자체가 모호할 수 있고 또한 그 자신의 유 불리에 따라 좌지우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앞에서 말했듯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삶은 바로 과거의 자신의 모든 환경과 현재의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 속에서 그의 능력껏 그 자신이 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을 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에게도 합당하게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어떤 이들은 지나온 삶을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 역시도 결과론적 이야기일 뿐 원래대로 시간을 되돌려봐야 반복되는 선택일 뿐이다. 우리는 모두 현재에서 그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살아간다. 그것이 잠을 자든, TV를 보든, 책을 읽든, 공부를 하든, 데이트를 하든, 바람을 피우든, 도둑질을 하든 간에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바로 그것을 해야 했기 때문에 한 것이다.

 

순간마다 개개인의 환경의 차이로 인해 발생되는 선택의 차이는 결국 우리 인간의 그 많은 다양성을 만들어 낸다. 이 말은 결국 끝없이 반복되는 우리의 선택이 바로 개개인의 삶을 만들어내는 중요한 열쇠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이 선택에는 그 선택 주체의 온전한 지나온 삶과 환경이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이런 원리로 인해 사람은 변하게 된다.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아주 조금씩 바뀐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이미 육체적 모습부터 변화하기 때문에 이것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모의 변화는 뚜렷하지만 내부 정신세계의 변화는 확연하게 들어나지 않기에 우리가 그것을 잘 느끼지 못할 뿐이지 실제로 십 년이나 이십 년의 시간을 두고 보면 모든 사람은 변하고 있다.

 

이런 전체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현재 시점에서 타인의 삶을 평가하고 재단하는 것은 내 자신의 판단 근거의 변화성과 미래의 그 사람 자체의 변화 가능성을 무시한 행위가 된다. 만약 우리가 어떤 이를 비난할 때 '현재 그 사람은 이런 이런 이유로 인해서 비난을 받아야 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나마 낫지만 '그 사람은 이래서 틀렸다'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뜻이다.

 

또한 여기에서 그 근거가 되는 자신만의 판단기준을 꽤나 절대적인 관점에서 보는 경향이 커서 자신이 믿는 종교나 신념 등이 가미되면 거의 평생 동안 변화 불가능한 의견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타인의 삶을 판단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의견을 내는 것이 절대적 관점에서 유효해지는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시점에 어떤 판단을 했다면 그것은 바로 그 시점으로부터 약간의 시간 동안만 상대적으로 유효 할 뿐이다.

 

우리는 보통 이런 판단을 내릴 때 얼마나 다수의 삶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느냐 여부를 두고 판단을 한다. 도둑이나 강도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손해를 입혔고 또한 그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반대로 봉사를 하는 이들은 누군가에게 이득을 주었고 또한 그로 인해 공동체 전체가 이득을 입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공동체 이득의 범위가 클 수록 위대한 인간으로 반대로 이 공동체 이득에 손해가 심할수록 인간 말종의 삶으로 판단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세히 보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 옳음의 근거가 인간 사회의 이득을 절대 기준점으로 삼는다면 이 말은 틀리다. 그렇지만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이득을 그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인가?

 

두 나라가 전쟁이 나면 각자의 나라에 속한 국민들은 그들이 속한 나라의 옳음을 절대적 관점에서 주장한다. 하지만 완전히 대립되는 두 개의 옳음이 존재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경우엔 둘 중 하나가 옳은 것이 아니고 단지 그들이 그렇게 믿는 것 뿐이다. 실제로 여기엔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이득 근거만이 명확하게 존재한다.

 

이 단순한 예는 개인적 입장으로 축소시켜도 정확하게 들어 맞는다. 단지 공동체의 범위가 작아졌을 뿐이다. 그래서 개인, 가족, 자신의 지인, 자신이 속한 단체, 회사 등의 무리지음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판단 기준점을 갖기 마련이고 이를 근거로 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이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상대적인 것일 뿐이며 이득과 손해의 관점이란 것은 동일하다.

 

이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역시 타인의 삶에 대해 평가하고 비난하고 칭찬하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다. 특히나 타인의 삶을 비난하고 평가하는 일에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것은 결론적으로 틀렸다.

 

그 이유가 타인의 삶에 대해 관여하고 평가하는 일이 나 자신을 그리 행복하게 해주지도 않고 나의 이득과 부합되지도 않아서 틀린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짓이라서 그렇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갖게 되더라도 누군가의 삶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나는 어떤 노력을 하더라도 인간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으며 그로 인해 내 판단은 모두 현실적 관점에서 본 상대적 판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 삶의 기간 동안 익숙해진 사람들과의 많은 갈등이나 사회적 문제 등을 접할 때,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삶을 평가하고 비난하는 일을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은 참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앞으로 삶의 태도에서는 타인들의 삶을 평가하는 일을 최대한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도 매우 힘든 일이 되겠지만 결국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찾자면 그 중 하나인 듯싶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사람에 대한 유효한 관심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닌 무관심이라고 하는데 결국 이런 타인에 대한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는 삶이란 무관심의 영역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나는 부처님과 예수님이 말한 자비와 사랑이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로 인간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 때문에 한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런 의미도 모른채 이렇게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을 한 단계 더 높은 영역에서 바라 보게 되면 마치 우리가 개나 고양이를 볼 때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우리 역시도 그 동물들을 모습을 보면서 측은한 마음을 갖기도 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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