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말씀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아이루다 2014. 4. 14. 10:06

 

요즘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늘 인간이 사는 세상은 그래왔는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부터 우리 사회의 큰 흐름을 하나 만들어내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힐링' 에 대한 유행이다. 굳이 이것을 유행이란 용어를 써서 표현을 한 까닭에는 분명히 내 개인적인 약간의 거부감이 개입된 것은 부정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나 개인적인 입장과 달리 많은 이들은 오늘도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또 사회적으로 꽤나 유명한 힐링 전도사들은 쉼 없이 세상 사는 사람들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실제로 이 말만 듣고 있으면 그 말 안에 담긴 현기로움을 많이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는 다르지만 어떤 다른 사람들은 이들이 해주는 말이 좋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로 들리는 모양이다.


기본적으로 나는 힐링의 전도사로써 유명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만 판단하지는 않는다. 그런 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땐 정말 오랜 시간의 깊이가 담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절대로 머리로 기억하고 생각한다고 해서 나오질 않는다. 적어도 그것을 진정으로 이해를 했든지 아니면 이해를 하려고 노력을 했든 지의 과정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 산속에서, 공기 좋고 사람 없는 곳에서 마음 수련을 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 정말로 인간 세상에 나와 사람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부대끼고 현실적인 수 많은 문제를 부딪힐 때, 여기에서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마음의 안식을 찾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 과연 정말로 현실적이고 의미 있는 조언이 되겠는가?


이 의견을 일단 들어보면 확실히 그런 면이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 말이 갖고 있는 의미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바람이 없어서 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나무가 바람 속에서 계속 흔들리는 나무에게 너는 왜 그렇게 흔들리고 사느냐 라고 물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에서 또 다른 관점을 하나 더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오늘 쓰는 이 글은 바로 그것에 대한 내용이다.


복잡하게 말할 것도 없이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바람 속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무에게 너는 왜 바람이 많이 부는 곳에서 자랐느냐 라고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그냥 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웃긴 말인가 싶겠다. 나무가 거기 자라고 싶어서 자랐겠는가? 물론 이 말은 정확하게 맞다. 하지만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는 나무는 아니라는 점이다. 분명히 우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긴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후엔 분명히 스스로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인간이란 존재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나무와는 다르다. 우린 바람이 많이 불면 바람이 불지 않는 곳으로 이동 할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태어나 스스로 의지를 발현하기까지는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필요함을 나 역시 인정한다. 타고난 가정과 타고난 외모, 성격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어릴 때 가질 수 있는 고민이고 사람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게 되면 솔직히 이런 것들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어려운 형편에 태어난 사람도 노력을 해서 성공할 수도 혹은 남들만큼은 먹고 살아갈 수 있고 외모가 남들에 비해 그리 좋지 않는 사람들도 짝을 찾아서 살아간다.


물론 위의 예에서 타고난 한계지점이 명확해서 정말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은 삶의 여유가 없어서 힐링이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간다. 내가 오늘 폐지를 주워 살아가는 형편이라면 사회적 멘토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이렇게 사는지,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살아가겠는가?


그러니 적어도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과 공감하는 사람은 먹고 살만하니 그렇게 사는 것이다. 단지 이들에겐 먹고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닐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에겐 욕망이란 것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통 어떤 힘든 사연을 적을 땐 분명히 처음엔 자신의 고민을 적는다. 그래서 행복하지 않다, 두렵다, 괴롭다, 누군가가 너무 싫다 등을 통해 시작이 된다. 그런데 그 안에 적힌 내용은 점차로 모두 그 자신이 왜 행복하지 않는지에 대한 외부적 요소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행복하지 않은 것은 나 자신인데 그 모든 원인은 외부에서 끌어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자신이 불행하다고 표현한다.


남편이 바람 펴서, 여자친구가 돈을 밝혀서, 남자친구가 게을러서,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시부모가 그지 같아서, 처가 사람들이 너무 괴롭혀서, 집이 못살아서 등등.


그런데 그런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과연 그것이 나무처럼 스스로 그 자리를 찾을 의지가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물론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자식의 입장은 어쩔 수 없는 것은 나무의 그것과 같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내용인데 그래도 그 관계성의 불변성은 아이의 나이가 20살쯤 되었을 때, 즉 성인으로써 독립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정도까지로 한정된다.


언뜻 생각하면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의 문제는 또한 선택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것은 완전한 부모의 의지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낳는 것이 어떻게 의지적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태어나긴 하지만 누구나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것은 의지에 의한 선택이 된다.


그리고 이렇게 답하면 그 자신은 별로 생각이 없었지만 아내나 남편이 원하고 부모가 원해서 낳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분명하게 아이를 낳는 것과 관계성의 원활함을 바꾼 자신의 선택이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고 불편하게 사는 것과 아이를 낳고 관계성을 원활하게 하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것뿐이다.


아이의 예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아주 다양한 형태의 선택적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 욕망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불행하고 고민이 생기면서 누군가 나를 위로해주길 바라게 된다. 그런데 그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질 않는다.


자신이 선택한 남편이 성격 좋고, 돈 잘 벌고, 가정이 충실하고, 아이와 잘 놀아주길 바라는 것은 거의 모든 결혼한 여자들의 바램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과연 전체 남자들 중에서 몇 명이나 될까? 남자 역시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아내가 살림 잘하고, 육아 잘하고, 청소도 잘하고, 시부모한테도 잘하고, 거기에 요즘은 돈까지 잘 벌길 바란다.


그런데 이럴 수 있는 여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리고 정말로 솔직히 말해서 그런 남자나 여자를 얻을 그 자신의 능력은 과연 어디까지 갖춰져 있을까?


높은 연봉을 원하고 부자 이길 바라며 무엇을 해도 잘 되길 바라는 그런 수 많은 욕심들을 보통 우리는 나 자신이 가질 어떤 당연한 것쯤으로 여기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퍼져있다. 즉 내 친구가 성공했으니, 내 친구가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했으니, 내가 소위 말하는 상위권 대학을 나왔으니, 외국 유학을 했으니.. 등등 하면서 내 자신은 어디까지를 욕망할 수 있으며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일년에 한 번 정도는 외국 여행을 해야 만족하는 삶도 있고, 일년에 영화 한 편이라도 봤으면 하는 삶도 있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삶은 훨씬 작은 욕망으로 보이긴 하지만 결국 이것도 욕망임에는 분명하다. 왜 우리는 어떤 것을 꼭 해야만 하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이것을 정말로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개와 내가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사람들이 개보다는 나를 먼저 꼭 구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과연 나는 왜 개보다 소중해야 할까? 물론 여기에서 사람들은 당연한 것을 이상하게 주장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나와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동시에 물에 빠졌다면 어떻게 결정을 내릴 것인가?


그의 목숨이 과연 나와 동시에 빠진 개와 다른 가치를 가졌을까? 그래서 나보다 그를 먼저 구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힐링 전도사들이 이야기는 바로 이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그 모든 권리의 부당함을 근간으로 해서 그 모든 마음의 문제가 바로 그 자신으로부터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욕망의 근원적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선택 불가능한 것이라고 고정시켜놓고 그 후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는 욕망으로부터 이어진 사람들의 모든 행동은 바로 어떤 의도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 내게 되고 결국 그것이 자신의 삶을 억누르게 될 때 우리는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그래서 누군가의 치유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 모습을 본 상담자는 과연 무엇을 말해줄 수 있을까? 머리 위에 커다란 돌을 들고서는 팔이 너무 아프다고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보고는 그 돌을 내려 놓으라고 밖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 결혼을 한 후 그 사람이 그런 사람인지 몰랐다면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이 부족함을 탓해야 하고, 배우자가 자신을 너무 힘들게 해서 고민이라면 이혼하지 못하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심약함을 탓해야 한다. 아이를 핑계로 사회적 시선을 핑계로 결국 경제력을 영위해서 힘들게 세상을 살아갈 자신이나 혹은 혼자서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꼼짝도 못하는 자신에게 오직 너는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무겁게 자신의 삶을 누르면 그것을 버리면 해결이 되는데도 그것이 원래 자신이 가졌던 것인 냥 허우적거리면서 누군가의 도움말을 원하고 그러다가 영 마음에 안 들면 당신은 내 입장이 안되어 봐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스님이 그런 말을 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그 스님은 바로 원래 그럴 수 있는 삶의 무게가 두려워서 머리를 깍고 중이 된 것이란 점을 몰라서 그럴까?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 인간이 왜 자신의 미래에 닥칠 그 무거운 짐을 예상하지 못하고 그 많은 욕망을 실현해놓고 결국 그것의 부작용이 발생하면 그 안에서 허우적거리고 살아갈까?


배우자를 만나 인연을 맺는 것이 우리 사회에서 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드라마에서 주변 이야기에서 숱하게 듣는다. 아이를 키울 때 문제나 노후에 발생하는 문제들 역시도 너무도 많은 사례를 통해 계속 전파가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그 많은 관계를 모두 맺어놓고서는 결국 그 안에서 나 깔려 죽네요 하고 불행해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두려워서 속세를 떠난 스님들이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는 그렇게 살지 않아서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말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살라고 누가 강요했나? 친구가 결혼하니 나도 결혼하고, 부모가 아이를 낳으라고 하니 낳고, 도심에서 살아야만 사는 것 같아서 도심에서 살고, 취직을 해야 하니 그 비좁고 불편하면서도 비싼 집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살아가게 되는데 과연 그 모든 것이 모두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에서 강요한 것인가?


진정으로 우린 태어나는 것과 어린 시절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시기를 빼놓고는 우리 자신의 의지가 없는 것은 없다. 이 후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자발적 선택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수 많은 과거의 사례들이 즐비하게 우리의 미래를 예측해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한 삶이 이미 예측된 문제점을 발생시켰을 때 '나는 몰랐다. 내가 그런 나쁜 예에 해당될 줄은' 이라고 말하면서 억울해 한다.


과연 우리는 왜 우리 자신이 늘 행운이 함께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믿을까? 그래서 누군가 집을 사서 부자가 되었다면 자신도 따라서 무리하게 빚을 내어 집을 샀다가 그것에 억눌려서 허우적 걸릴까?


아이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왜 낳았으며, 남편의 시부모를 감당할 자신이 없으면 왜 결혼을 했으며 어쩔 수 없다고 해도 그 관계를 왜 유지하는 것인가? 혹시라도 유산을 받고 싶어서? 도대체 왜 그 모든 것을 선택한 후에 그럴 줄은 몰랐다라고 말하고 있을까? 그리고 제발 좀 여기에서 우리 자신을 좀 꺼내어 달라고 울부짖고 살아가게 되는 것인가.


모든 행복은 자신의 마음 속에서 발생하는 가치인데 왜 그것을 외부에서 찾으려고 할까. 실제로 외부에서 행복을 주입시켜 주는 단 한가지 방법은 바로 '항 정신성 의약품' 으로 분류된 각종 마약류 뿐인데 마약을 통해 행복을 주입시켜 준다고 하면 그것을 좋다고 하면서 받아드릴 것인가?


혹시나 그들의 고민 상담에 쓰인 이야기처럼 자신의 행복과 불행이 모두 외부에서 왔다고 믿는다면 결국 해결책 역시도 모두 외부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중에서 남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결국 몸에 바늘을 꼽아서 마약을 주입시키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는 없을까?


그러니 당연히 행복과 불행은 모두 그 자신의 내부에서 생성되고 또한 그로 인해서 자신의 행복에 대한 욕구 역시도 모두 그 내부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개나 고양이가 아닌 인간이기에 삶을 선택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 또한 책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실제로 겪지 않는 것에 대한 다양한 미래 예측도 가능하다. 그래서 자신의 성격, 성향 등을 기반으로 해서 현재의 선택의 미래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지에 대해서 가장 좋지 않는 경우와 가장 좋은 경우를 모두 예측 가능하다.


여기에서 가장 좋지 않은 상태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그 길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이것을 용기 없다고 표현할지도 모르지만 그 선택의 기반엔 분명히 욕망이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용기 역시도 얼마나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욕망이 강한 사람일수록 의지적이고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된다. 우린 그것을 매우 좋은 것으로 포장하는데 익숙하지만 과연 강한 욕망을 실현하는 사람을 정말로 좋게만 볼 것인가? 만약 그것이 좋다면 그것은 단지 좋은 방향으로 잘 흘러갔을 때뿐인 것이다. 누군가 집을 사서 돈을 벌었다면 그 집값이 우연히 올라서 그런 것이지 반대로 떨어졌다면 그것은 미래예측의 현명함이 아닌 탐욕의 결과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거의 최소한의 것이라고 믿을 뿐 절대로 그것이 과한 것이라고 믿질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의 조언을 두고 너는 내 입장이 아니라서 그렇게 말 할 수 있다는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힘든 삶의 조언을 구해서 가짜로 정신 진통제를 맞는 것이나 혹은 그런 가짜 진통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나 어쩔 수 없이 가짜 진통제를 처방해야 하는 치료사나 모두 같은 입장이다. 모두 그 문제는 단 하나의 원인으로 발생하는데 그것을 지적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진정한 의미의 해결책은 단 하나이다.


"누가 당신에게 그렇게 살라고 했나"

 

하지만 누구도 이 답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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