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감정의 근원

아이루다 2014. 3. 23. 07:58

 

우리는 흔히 현재보다 훨씬 기술이 발전된 미래에 만나게 될 로봇에 대한 상상을 할 때, 그 존재와 인간이 무엇이 다른 점을 가지고 있을지를 궁금해 한다.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래에 나타날 로봇을 다룬 많은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의 말이나 태도 등을 통해 우리가 그 만들어진 존재들과 어떻게 근원적으로 다른지를 설명하려고 하기도 한다.


영화 아이로봇에서는  근본적으로 인간과 로봇은 다른 존재이며 로봇은 신뢰할 수 없다고 확신하는 형사가 주인공이었으며, 터미네이터 1에서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말 그래도 살인기계 로봇이 나왔었으나, 2편에서는 같은 모델이지만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고 흉내도 내는 존재로 표현되기도 했다.


또한 부모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이 출연했던 A.I도 있었고 그림을 그리는 창조적 활동을 하는 로봇이 출연한 영화도 있었다. 특이한 경우엔 우리나라의 영화 중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은 로봇이 나오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는 다양한 감독의 로봇에 대한 그 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을 보면서도 비교적 공통적인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기계라고 여기는 이 로봇이란 존재가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기계 이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는 점이다.즉 우리 인간이 어떻게 우리 스스로와 로봇을 분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바로 감정을 인지하는 로봇을 등장시킴으로써 인지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생명체와 기계 사이의 가장 들어난 차이점으로 여겨지는 감정이란 것이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 고유의 것이란 것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 할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외모가 인간과 동일하고 말이나 행동이 인간의 그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해도 결국 감정이 없다고 알려진 로봇은 결코 우리와 같은 존재로써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 역시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감정은 현재 생명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은 맞다. 그런데 여기에서 궁금한 점은 "감정은 왜 로봇이나 기계에서는 나타나지 않을까"에 대한 의문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아주 당연하다는 것을 묻는다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지금 그것의 이유가 궁금하다. 이 질문을 바꿔서 하면 "로봇이 감정을 느끼게 되면 우리는 그 존재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된다.


나의 이 어처구니 없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느끼는 감정에 대한 기본적인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감정이란 것을 인지하는 몇 가지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일단 첫 번째 슬픔을 느끼는 상황을 예를 들어보자. 나는 개인적인 경험으로 얼마 전 내가 키우던 토끼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때 나는 매우 많이 슬펐는데, 이 토끼의 죽음의 과정과 보내는 과정에서 나는 묘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토끼가 화요일 오후에 죽었는데 토끼를 주말에 묻어주기로 한 것이다.


나는 토끼가 썩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일단 급한 대로 토끼를 냉장실에 넣어 두어야 했다. 그런데 이때 이 토끼는 갑자기 내가 사랑하는 존재로써 토끼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고기로써의 토끼로 분리되고 말았다. 나는 이 토끼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지만 객관적으로 말하면 이 토끼의 상태는 우리가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토끼고기였던 것이다. 물론 나는 단지 토끼고기를 먹을 만큼 배가 고프지 않았고 만약 배가 고파도 토끼고기는 아마도 최후로 선택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토끼고기를 먹지 않을 가능성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슬퍼하는 것을 잘 생각해보면 나는 토끼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그 토끼의 부재로부터 오는 행복감 상실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은 단지 부재로 인한 상실만 의미하지는 않는다. 거기엔 감정 이입, 즉 죽음은 나쁘고 고통스러운 것이란 우리의 인식이 상대의 죽음에 이입됨으로써 우리는 평소에도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의 죽음의 명복을 빌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지 일어난 헤어짐으로 인해 일어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는 슬픔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진 후 가장 힘든 것도 바로 이것이다.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뺏긴 것이 우리를 참으로 힘들게 한다. 그리고는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다른 존재를 만나 다시 행복해질 수 있으면 우리는 과거의 기억은 금새 추억을 잘 만들어서 보관해둔다. 그리고 그 땐 슬픔은 감정으로써가 아닌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상태가 된다.


두 번째로 기쁨을 느끼는 상황을 생각해보기로 하자. 아주 사랑하는 연인이 아주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 매우 행복해하고 있는 상태를 상상해보자. 둘은 오랜만에 본 재미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 때 두 사람의 경험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자. 두 사람은 영화를 보는 동안 아마도 영화 속에 완전히 몰입했을 것이다. 즉 시간을 잊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몰입은 현실을 잊게 해준다.


시간과 현실을 망각한 상태를 우리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비단 영화만이 아니다. 친구들과 재미난 수다를 떨거나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술을 먹을 때도 시간은 어느새 인지를 못하는 상태에서 흘러 버린다. 즉 행복은 현실을 잊는 상태, 시간을 잊은 상태일 때를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무아지경에 오른 상태를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기도 한다.


세 번째 이야기는 직장에서 상사에게 업무의 실수로 인해 질책을 받는 상황에 대해서 이다. 이 때 우리는 보통 당혹감과 그 질책에 대한 짜증감 느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불행한 감정의 일종이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에게 좋지 않는 평가를 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싫어하는데 과연 왜 그럴까?

 

직장상사에게 받은 좋지 않는 평가는 훗날 나에게 어떤 형태의 불리함이 야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내년에 월급이 안 오른다든가, 미래에 진급에 실패한다는 예상되는 어려움이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내가 살아갈 돈이 덜 모이게 되거나 직장에서 짤리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연결된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내가 살아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쪽으로 작동하게 된다.

 

이런 직장상사가 아니라더라도 친구 사이의 평판이나 이웃의 평판 역시도 모두 그것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하게도 혹은 불리하게도 작동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많은 이들과 잘 지내는 이들은 행복하게 살아가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사는 경우가 많다.


이 세 가지, 슬픔과 기쁨과 짜증스러움이나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전혀 다른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재미있게도 공통 분모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란 것이다. 실제로 슬픔은 행복의 부재, 기쁨은 행복의 실현, 짜증과 분노는 행복의 박탈이라고 말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렇다면 몇 개의 가정을 해보자. 일단 우리가 느끼는 행복지수를 -100 에서 100까지의 값으로 정하고 -100을 완전히 불행한 상태, 100을 최고의 행복 상태라고 하자. 그리고 -100의 상태는 우리가 보통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즉 자살의 가능성이 100%인 상태라고 가정하자.


이럴 경우 우리는 보통 적어도 +의 값을 가진 상태로 살아가길 원할 것이다. 물론 크게 행복하지도 크게 불행하지도 않는 사람들은 0 값 근처에서 살아가겠지만 그래도 살아 있음을 유지하는 데는 크게 지장이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큰 불행이 닥쳐 그 행복지수가 급격히 - 값으로 이동하게 되면 우리는 크게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죽음에 더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 값에 해당되는 감정들은 보통 두려움, 분노, 짜증스러움, 불만족스러움, 질투, 절망감 등의 좋지 않는 감정이 배치되어 있다.


이 이야기를 다시 하면 우리가 느끼는 감정 중 우리가 그리 선호하지 않는 행복의 반대가 되는 감정들은 모두 죽음과 가까워지면서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의 단순한 예는 바로 공포의 감정을 느끼는 상태를 상상해보면 된다. 우리는 단순하게 높은 곳에서 밑을 바라보면 공포심을 느낀다. 왜냐하면 높은 곳이란 결국 내가 떨어져 죽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좀 더 극적인 상황으로 예를 들어보면 거의 추락할뻔한 비행기 사고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죽음의 공포가 생존에 대한 희열로 바뀌면서 거대한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즉 거의 100에 가까운 행복감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렇듯 단시간 내에 우린 -100에서 100까지 수직 상승하는 극적인 행복감의 경험을 할 경우 사람 자체가 변화하기도 한다.


결국 이런 전체적인 이야기를 종합하면 우리의 감정은 거의 죽음과 생존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죽음 쪽인 -100으로 갈수록 좋지 않는 감정을 경험하는 불행함을, 100으로 갈수록 죽음으로부터 멀어진 현실 망각을 할 수 있는 행복함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구간에서 총 200의 범위를 갖지만 -100과 나머지 199개의 값이 대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죽은 것과 어떠한 형태의 삶이라도 살아 있는 것으로 구분된다는 의미이다. 즉 우린 순차적인 숫자의 배열을 상상하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있고 없고의 두가지 상태만이 존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이 없기를 바라면서 산다.


실제로 이 결론은 많은 우리의 본질적 모습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냥 오늘의 주제인 감정에만 맞춰서 다시 처음 생각했던 감정에 대한 정의로 돌아가 보자. 그리고 이제 좀 결론이 났다. 감정은 바로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 상태를 의미한다. 즉 죽음을 많이 인식할 땐 슬픔, 분노와 같은 감정을 반대로 죽음을 인식하지 못할 땐 기쁨, 행복, 즐거움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명백하게 우리 신체 기관이 매일 매초마다 하는 일과 동일하다. 우리는 산다고 믿지만 실제로 우리는 죽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산다는 것과 죽지 않는 다는 것은 완전히 동일한 말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지 않는 다는 것을 부정적 표현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죽음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인해서 그렇다.

 

자 이렇게 우리의 감정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난 후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왜 로봇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답은 이렇다. 로봇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아니 죽음을 아예 인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 부품이 고장 나면 바꾸면 되는 존재라면, 그리고 그런 부품이 산처럼 쌓인 상태라면 누가 죽음을 두려워하겠는가? 우리의 두뇌에 해당하는 저장 기관 역시도 단순 데이터 이동을 통해 복사가 가능하다면 더욱 더 그렇다.


반대로 이 이야기는 로봇에게 감정을 이해시키고 싶다면 로봇에게 대체 불가능 하다는 죽음의 공포감을 심어주는 것만 할 수 있어도 가능하다는 뜻이다. 물론 인간은 그것을 그리 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로봇을 만든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이 그것을 직접 하기 어렵거나 두려운 불행함에 가까운 일을 시키기 위해서 그렇다. 그런데 로봇이 공포감으로 인해 이것을 거부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감정은 참 중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이 감정을 통해 살아간다. 물론 이성은 질주하거나 폭주하는 감정을 절제하는 역할을 하지만 우리의 삶은 감정을 통해 진행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국 죽기 때문에 그렇다. 죽음은 우리가 아무리 부정을 해도 늘 옆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평소 죽음을 머리 속에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해도 실제로 그렇지 않다.


만약 인간이 영생을 얻어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아마도 가장 먼저 인간은 감정을 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할 수도, 행복을 느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아마도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우린 우리 자신을 심하게 착각하고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영생은 현재의 자신이 그대로 영원히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 중 그 어느 누구도 완벽히 죽음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삶을 경험 해 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우린 그것을 감히 상상조차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영생을 살면 얼마나 좋을지를 생각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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