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인간론

아이루다 2014. 3. 17. 11:52

 

2014년인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100년쯤 전으로 되돌아가 보면 우리 인간은 확실히 좀 덜 발전된 세상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또한 그로부터 또 다시 100년, 200년, 1000년, 2000년을 되돌려 보면 이런 문명 발달의 퇴보가 단지 100년 사이에만 유효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당연하지만, 우린 이렇게 시간의 진행과 함께 점점 더 발전해서 현재의 인류 문명을 이룩해내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반대로 까마득히 먼 옛날에 우리 인간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한고 불안한 삶을 살았을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 당시 까마득한 우리의 조상은 동물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단지 진화론적 입장에서만 본 것이 아니다. 그냥 당연한 논리적으로 유추가 가능한 것인데, 계속 발전하고 있다면 과거에 분명히 발전하지 못한 시절이 있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동물의 삶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 때,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일단 가장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생존의 목적 달성을 위한 최선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인간은 약하고 힘없는 존재였다. 자연계에는 우리를 먹이로 노리는 흉포한 맹수도 있고 단 한번이라도 물리는 순간 바로 죽음을 향해 갈 수 밖에 없는 독충이나 독사 등도 사방에 널려 있었다. 따라서 현대인과 달리 생존 그 자체가 매우 커다란 목표가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당시 우리 인간에게 자연은 현대인처럼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닌 생사가 오가는 전장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우리 조상은 오늘을 생존하고 내일 역시도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면서도 느리지만 우리 인간은 서서히 발전을 해 왔다.


세대가 거듭 될 수록 무기가 더욱 날카로워지고 사냥 기술이 점차 향상되었을 것이다. 의사소통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서로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으로 변하고 수 많은 시행착오 덕분에 먹어서 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좀 더 제대로 구분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당시 우리가 소위 말하는 '원시인' 이라고 부른 이들은 과연 현대인들처럼 자신과 자연을 분리해서 생각했을까? 그러니까 말 그대로 그 자신은 인간이고 그가 속한 세상은 그냥 자연이라고 인식했을까 에 대한 질문이다. 이것은 좀 웃기는 질문 같지만 현대인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머리 속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우리는 실제로 자연과 우리를 분리한다.


그 덕분에 우린 동물원에서 동물을, 식물원에서 식물을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우리를 포함한 것이 아닌 우리와 분리된 존재이기에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동물원에 인간을 넣어 뒀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즐길 수 없게 된다. 과거 한 때 유럽에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데려다가 인간 전시장을 만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그들의 머리 속에서 흑인들과 자신들은 완전히 분리된 존재였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의 원시 조상들은 현대인의 그것처럼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것은 아마도 그것을 분리시키기엔 너무 가깝고 큰 영향을 미치는 환경 속에서 살아서 그럴 것이다. 그 당시 인간은 자연의 일부였으며 먹고 먹히는 생태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한 동안 우리는 현재의 인간들과 달리 생태계의 사다리에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질문이 생겨난다. 도대체 우리 인간은 언제부터 우리를 자연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꽤나 의미심장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우리의 존재의식이 생성되기 시작한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일부였던 우리가 자연의 일부가 아닌 독자적인 존재로 되어 갈 때 우리에게 당연하게 새로운 존재에 대한 인식 및 증거가 필요했을 것이다.


일단 우리 인간이 자연과 우리 자신을 분리한 것의 필요조건은 바로 완전한 극복이다. 우리가 현재 자연을 우리와 분리 시킬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적어도 생명체만의 세상에서 틀리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지구에서도 금을 긋고 그 땅을 스스로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것을 어떤 원리로 보아 과거를 유추해보면 아마도 인간의 능력이 점점 강해져 어느 날 우리가 자연을 무서워하기 보다는 우리가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에 대해 자신감이 생겼을 때 우리는 자연을 우리와 분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면 소위 상위 층이나 귀족층이라고 불렸던 과거나 현대 사람들의 의식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가진 비교 불가능 한 부와 사회적 지위를 인식하고 그 밑에 있는 서민들을 지배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들은 서민과 자신들을 분리하여 서민들과는 다른 존재인 냥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서민이 어느 날 귀족 사회에 들어가게 되면 이 원리에 손상이 입게 되면서 심각한 갈등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고 방식이 옳다,그르다를 떠나서 우리 인간이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말 한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완전히 이겨내고 비교 불가능한 상대라고 여겨지면 그 존재들과 우리를 의미적으로 분리시키는 일에 꽤나 익숙하다. 그리고 그것의 배경엔 스스로 좀 더 나은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숨겨져 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존재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최고 자리에 오른 자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슨 이유로 존재하고 있을까?' 에 대한 인식이 시작되기 시작했다.


현대인들은 이런 질문에 대해 그다지 생각은 하지 않고 살지만 대부분 이런 질문에 대해서 한번쯤은 접해봤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아주 잠시 생각은 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과거의 우리의 조상 중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하기 시작한 사람은 정말로 극소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냥 태어나서 살다가 먹고 짝을 짓고 양육하고 늙어서 죽는 인간의 삶, 아니 모든 자연계에 속한 존재들의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던 인간이 갑자기 그 자신에게 '나는 왜 사는가' 라는 쌩뚱맞은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정말로 비웃음을 당할만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할 바에 그 시간에 사냥을 한 번 더하라고 충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결국 철학이라는 학문을 만들어 냈다. 즉 철학은 말 그대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고자 해서 만들어진 학문이다. 하지만 아마도 초창기 철학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과거 철학자들은 단지 철학만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 인간은 과거부터 매우 다양한 형태의 학문을 - 아마도 그 당시엔 그렇게 나뉘지도 않았을 학문들- 통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알고자 했다. 그것은 과학적이기도 했고 종교적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의학, 생물학, 심리학, 화학, 개체 발생학, 우주학 등의 자연 과학적 고찰과 함께 각종 종교를 만들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다.

 

* 고대 철학자들은 그래서 수학, 과학, 철학, 인문학, 신학까지 아주 넓은 분야를 공부했었다.


이것을 상황으로 보자면 종교에서 가장 먼저 답을 찾아내었다. 단순하게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고 결론을 내었기 때문이다. 신이 만들었기에 우리는 더 이상 왜 태어났는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거기에 더해서 필연적으로 맞이하게 되는 죽음 후의 세상까지도 정해줬기 때문에 정말로 많은 이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줬을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더 이상 머리 아프게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 시간에 돈을 더 벌거나 더 행복한 일에 집중하면 되었다.


실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종교가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종교를 만들어서 답을 찾은 것으로 여기 것이다. 우리 인간은 스스로 알지 못하는 두려움의 대상이 생기면 그것을 신격화 하는데 매우 익숙하다. 그래서 태양, 달, 바다, 바람, 번개, 땅, 비, 지진 등에 모두 신의 이름이 부여되어 있다. 심지어 강해 보이는 동물도 신격화시키고 각 동물의 무서운 무기들을 모아 전설상의 동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종교의 시작이다. 인간의 지식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것들을 신의 존재를 통해 설명하려는 고대의 시도가 인간 문명 발달과 함께 제법 그럴법하게 꾸며진 이야기들로 전해온 오래된 이야기가 바로 우리가 현재 믿고 있는 종교의 맨 얼굴이다.


따라서 누구나 종교를 믿는 것은 아니었기에 (종교는 증명이 안 된다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을 과학적 연구를 통해 알고자 했다. 그래서 사람을 해부하여 골격을 알아내고 우리 인간과 다르지만 비슷한 동물들과 비교 연구를 하고 더 발전된 기술을 유전자 단위까지 정보를 알아내어 결국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동물과 한 뿌리에서 나왔음을 공식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과학적 연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는 설명했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는지,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답을 주진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를 더욱 더 힘들게 한 것은 바로 우리가 그리 벗어나고자 했던 동물의 한 종류라는 점을 밝혀버린 것이다.


과학은 우리가 분류학상 영장류에 속한다는 것을 설명해주고 내가 태어난 것은 우리 부모님의 난자와 정자가 만나 열 달간의 임신 기간을 거쳐 만들어졌기 때문임을 알려주지만 도대체 왜 난 이런 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더 미래가 되면 우리의 뇌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행이 되어 우리의 의식에 대한 좀 더 명확한 과학적 사실이 밝혀질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를 나라고 느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우리 인간은 그리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많이 혼재되어 있던 학문들 중에서 과학, 종교 등을 분리해 낸 후 마지막 남은 철학을 붙잡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 많은 천재 철학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질문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껏 아무도 이 질문에 대한 절대적인 답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우리 인간이 존재에 대한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 발전시킨 세 가지 분야, 즉 과학, 종교, 철학 중에서 종교만이 유일하게 답을 내놨다. 그래서 아직도 종교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답을 찾은 것이 아니라 답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과가 왜 사과 모양으로 자라는지 알 길이 없으니 누군가 그것을 그렇게 자라도록 했다고 믿은 것이다. 바보 같지만 매우 효과적인 대답인 셈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도 많아서 그 모든 것에 질문을 던져대면 도대체 그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에게 일어난 두 번째 변화는 결국 다시 첫 번째 인식변화인 자연과 우리의 분리를 방해하게 되었다.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우리가 밑으로 깔아 보던 그 존재들과 우리가 하나도 다름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통 여기에서 생각을 멈춘다. 더 이상 생각하면 그 자신이 하찮게 여기는 동물과 다름이 없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 그냥 종교를 믿는 것이나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다.


이런 전체적인 원리로 인해서 인간은 두 가지 부류로 분리가 된다. 한 부류는 바로 교육과 경험에 의해 만들어지는 거의 대다수의 인간이다. 이것은 과거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특징인데 이것만 있으면 인간 사회 속에서 무리 없이 생활해 나갈 수 있다. 즉 안전한 생존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우리 인간이 가진 첫 번째 인식, 즉 우리와 자연을 분리시키고 살아가는 것을 고착화 시킨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즉 실제로는 사실이 아니나 그것을 외면하거나 부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이것을 종교를 통해 해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종교 역시도 그런 분리 욕구 중 하나로 인해서 발생된 개념이기에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종교는 좀 더 자기 착각을 심하게 하는 것에 도움을 줄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 부류는 바로 끝없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인간들이다.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체 중 극히 일부만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과정이 책과 같은 매체를 통해 공유됨으로써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마치 그들 자신이 이런 존재론적 질문을 하고 살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리고 이 착각은 커다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착각을 일으킨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모두들 우리 인간이 개와 고양이와는 다른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뭔가 의미 있고 위대한 생명체라고 스스로를 칭하고 있다. 심지어 만물의 영장이란 표현도 쓴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하게 착각이다. 우린 머리가 좋은 동물이다. 지금 시대라도 어린 시절부터 그냥 자연계에 홀로 두면 재수가 좋아 살아날 수는 있지만 짐승과 다를 바 없이 크는 것이 인간이다. 우리 인간이 스스로 인정하는 인간답게 크는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인간 사회에서 받는 교육의 효과이다. 진정 인간이 본질적으로 위대한 존재라면 우리는 어떤 교유과정도 없이 단지 혼자 살아도 지금 현대인과 같은 지적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사회에서 교육 받지 못한 존재는 동물과 전혀 다를바 없이 크게 된다.


또한 우리 인간처럼 훈련장에서 훈련 받은 개 역시도 인간의 행동과 비슷한 효과를 보인다. 잘 훈련된 개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기도 하고 시키는 대로 행동하기도 한다. 우린 머리가 좋아서 그것보다 좀 더 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들은 다른 개들에 비해서 제법 똑똑하고 특별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 믿는 '인간'이란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된 것일까? 우리가 그저 동물이라면 우리 스스로 가진 인간 자존감은 완전히 거짓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하나의 답을 찾아낼 수는 있다. 그것은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하고 몇 천년가 질문만 던지고 오답만 내놓고 있는 철학을 통해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 좀 이상할지 모르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을 던지지 않는 사람은 그저 동물에 불과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다. 실제로 인간이라면 그래서 모두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이것을 하지 않는 다면 개와 고양이와 같은 레벨이 된다.


개와 고양이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훈련을 받았다면 훈련 받은 대로, 주인과의 관계와 먹을 것을 신경 쓰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인간의 삶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기관을 통해 잘 훈련된 일반적인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자기 인식에 대한 아무런 질문이나 대답을 찾는 과정을 겪지 않아도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 대부분은 이런 질문을 그냥 골치 아프고 피하고 싶은 질문 쯤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과정이 바로 우리가 믿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해주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못하면 그냥 동물이 되어 버린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인식의 해답을 찾는 학문인 철학이 수 천 년간 이어져 왔음에도 전혀 해답을 못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대부분은 문제를 인식하는 사례만 새롭게 발표해 왔을 뿐 진정으로 누구나 승복할 수 있는 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쯤 되면 답이 없다는 말을 할 때도 됐다.


하지만 답이 없어서 생각을 그만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다시 동물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결국 다시 스스로 믿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생각을 해야 한다. 이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과정은 인간 역사와 늘 함께 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 스스로 존재 할 이유를 찾기 불가능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해결책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냥 동물임을 인정하고 인간 프라이드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저 머리 좋은 동물이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대신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많은 것을 버려야 한다. 사랑, 우정, 정의, 용기, 양심 등과 같은 가치이다. 이것들은 그냥 생존에 필요한 부수적인 개념들일 뿐이다. 그래서 힘들다.


두 번째 해결책은 실제로는 해결책은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오래 생각하면 답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자신의 삶 동안은 열심히 생각하고 사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답을 찾지는 못해도 적어도 자신이 동물이면서 인정도 안하고 노력도 안 하는 삶 보다는 낫다는 점에서 좋다.


현재 이 세상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훈련된 인간들이다. 우리는 이 훈련 법에 의해서 충분히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고 몇몇 종교들은 크게 알려져 이렇게 훈련된 사람들에게 딱히 자신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아도 살 수 있게끔 해준다. 냉정하게 보면 어린 아이에게 아기를 다리 밑에서 주어왔다고 말하는 것과 유사한데 이 답의 정답 유무와 상관없이 아이가 더 이상 아기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묻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렇지만 이것을 외면한다고 해서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나마 우리가 스스로 믿는 인간이고 싶다면 그 자신에게 존재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것은 누군가 대단한 존재들이나 하는 그런 사고가 아니다. 정말로 그 자신이 개와 고양이와는 다르고 싶다면 던져야 하는 필수적인 질문인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매우 드물다. 왜냐하면 개와 고양이가 어느 날 나는 어떤 개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나마 인간이라면 좀 더 이럴 기회가 있기에 가능하지만 집에서 키우는 개가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나는 왜 사는가?' 라고 질문을 하고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우리는 왜 개와 고양이와는 다른, 인간이란 존재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한 현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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