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란 무엇인가? 혹은 삶은 어떤 의미인가? 우린 왜 존재하고 있는가? 등의 다소 난해해 보이지만 흔히 많이 접했던 질문들을 생각하다 보면 가끔 머리 속이 매우 혼란스러워질 때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인간이 가진 다소 동 떨어져 보이는 두 가지 특성으로 인해 일어난다.
이것을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어휘로 표현하면 그것은 바로 동물적 존재로써의 인간과 인간이라고 정의된 존재로써의 인간, 이 두 개 이다.
보통 동물적 존재로써의 인간은 우리가 지구에 있는 정말로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들과 놀랍도록 유사한 점을 가졌다는 육체적 특징에서 기인하는데, 우리는 그리고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는 생명체들은 모두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자녀를 낳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려고 애쓰면서 살아간다.
이것들을 몽땅 싸잡아서 그냥 본능이라고 칭하는데 우리 인간 역시도 이 본능에 대해 숨기기만 할 뿐 완전히 동일한 형태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두 번째 특징이 있다. 아니 실제로는 이것은 우리만 있다고 믿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두 번째 우리 인간의 특징은 바로 우리가 '인간답다' 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의 기본이 되는 것들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런 것들은 우리가 그리 소중히 여기는 자신의 생명이나 후손을 남기는 일까지도 포기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행동을 통해서 마치 우리가 자연적으로 갖게 된 육체적 존재로써의 본능을 뛰어 넘었다고 느끼게도 해준다.
그리고 이런 것에는 바로 용기, 희생, 정의로움, 보살핌, 사랑, 자비, 동료애, 헌신 등의 듣기만 해도 좋은, 많은 멋진 가치들이 포함된다. 실제로 우리 인간이 인간의 사회에 소속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이런 가치를 느끼는 것들을 접할 때 마다 마음 한 구석이 숙연해지거나 혹은 그것에 대한 반응으로 어떤 위대한 삶을 살아간 존재들에게 부채 의식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방금 말한 이 두 가지는 분명히 우리 인간의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혼란스럽고 또한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킨다. 왜냐하면 그냥 단순하게 생각해도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은 보통 모두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는, 즉 생존 본능을 위배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먹고, 자고, 싸고,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 살아가는 존재인데 그것을 위해서는 그 누구나 자신의 삶을 위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이것은 기르는 동물도 마찬가지인데 모두 그 자신의 생명 보존의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생존을 위한 이기적 행동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이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위대한 정신적 능력을 가졌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신념이나 믿음 혹은 이성의 힘으로 내 삶을 연장하기 위해 오직 이기심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며 거기에 더해서 가장 중요한 가치, 즉 자신의 생명까지도 자신이 믿는 것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이니 우리의 삶은 늘 이 두 가지 특징의 충돌로써 영위된다. 즉 이득을 추구하는 이기적 존재로써의 나와, 인간다움을 가진 존재로써의 나, 이 두 개의 자아가 어떤 판단의 시점이 될 때마다 서로 완전히 다른 입자에 서게 됨으로써 갈등이 야기되는 것이다. 우린 빵을 쥐고는 이것을 자신의 입에 넣을 지 타인의 손에 쥐어줘야 할지 고민한다.
실제로 이 충돌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또한 그것으로 인해 얼마만큼의 힘듦을 겪느냐에 따라 사람의 성격이라는 것이 결정된다. 우리의 성격은 매우 복잡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아도 그 근본을 바라보면 단순하게 이 두 가지 특징의 충돌로써 설명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는 사고가 필요하다. 그리고 지금은 두 개의 주제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해나가기로 하겠다. 그 첫 번째는 바로 인간다움이란 말의 정의에서 시작된다.
우리 인간은 보통 우리가 해 낸 위대한 업적들이 있을 때 그것을 우리 전체의 능력으로 확장해서 보는 방식에 매우 익숙하다. 이런 예는 인간의 위대한 업적들이 있을 때마다 확연히 들어나고 앞에서 말한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다수의 고귀한 희생들이나 일반 범인의 범주를 훌쩍 뛰어 넘는 불굴의 용기를 가진 이들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좋게 평가하는 어떤 인간의 행동을 접하면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지고 그것을 닮으려고 애쓰며 그것을 우리 전체가 가질 수 있는 가치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반대 급부로 우리가 비난하는 인간의 행동을 생각해보자. 히틀러의 학살, 연쇄 살인범, 유아 성폭행범 등등의 우리가 엄청난 비난을 퍼부어 대는 존재들은 과연 우리 인간의 고유 특성은 아닌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인간 전체에 나타나는 현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좋은 가치에 대해서만 범용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익숙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을 정의할 때 우리는 보통 아주 나쁜 사례를 가지고 말하기 보다는 좋은 쪽으로 동작된 사례들을 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래서 인간다움이란 말엔 우리의 잔혹함이 빠져 있다.
그리고 두 번째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개별적 특징을 전체화 시키는 우리의 사고 방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나의 예를 들어 보겠다.
TV가 하나가 있고 이 TV의 가격은 십 만원에서 최신 형은 오천 만원까지 하는 다양한 가격대를 가졌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이 TV의 가격은 싼 것인가? 비싼 것인가?
이 질문을 잘 생각해보면 당연히 TV는 싸다고 정의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비싸다고 정의 할 수도 없다. 하지만 비싸든 싸든 TV는 그냥 TV이고 이 TV의 기능은 전파를 화면에 표시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가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TV란 제품의 특성이 된다. 하지만 가격 역시 TV의 특성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의 가치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예를 인간에게 적용시켜보자. 만약 어떤 육상 선수가 100M를 9초에 달렸다면 이것은 인간의 특징인 것인가? 아니면 그 사람의 특징인 것인가? 또한 인류가 달에 우주선을 보냈다면 그들이 보낸 것인가? 혹은 내가 보낸 것인가?
보통 우리는 이런 일이 있으면 이것을 인간 전체의 업적으로 환산한다. 하지만 나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100M를 9초에 달릴 수 없다. 이것은 물리적 한계이다. 또한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우주선을 만들어서 달에 보낼 수 없다. 실제로 나는 혼자서 세탁기 하나 만들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보여주는 과거의 존재들의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기꺼이 먹었다고 해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웅의 이야기나 용기 있는 사람들의 도전들이 분명히 인간의 역사상 끝없이 반복되었지만 그것은 모두 그들의 이야기일 뿐 나의 이야기는 아니다.
분명히 나 자신은 인간임이 확실하지만 그런 이야기 속에서 나오는 인간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우리 머리 속에는 그들과 나 자신을 분리해내지 못하고 그것을 전체적인 특징으로 간주한다. 즉 이것은 10만원짜리 TV와 수 천 만원 하는 TV가 같은 기능을 하는 TV 라고 해서 완전히 같은 취급을 하는 것과 같다.
어떤 것의 특징이라고 하려면 그 전체에게 발현되어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육체적인 특징은 인간 전체, 아니 자연계 전체에 모두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의 특징이 맞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답다는 표현을 쓸 때 필요한 우리의 소중한 가치들은 실제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모두 들어나는 특징은 아니다. 실제로는 이것이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들어나기에 이런 이야기가 퍼지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누가 죽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에 어떤 존재가 죽을 때 마다 그것을 책으로 쓰고 기사로 내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보통 하지 못하는 용기 있는 행동들은 흔하지 않는 일이기에 타인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어서 기사화 되는 것이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온전히 개개인의 영역이다. 그래서 인간의 좋은 사례를 보고 인간 자체를 좋은 존재로써, 삶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 역시도 나쁘지 않다. 반대로 인간을 악한 존재로 보고 삶의 부정적인 면만을 바라보는 사람 역시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본능, 즉 육체적 특징이 아닌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판단하는 것은 모두 상대적인 판단이고 생각이란 점이다. 즉 본능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절대화 된 진실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특정 종교를 믿고 그것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사는 것은 온전히 그 자신에게만 절대적 진실인 것이지 그 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만약 그 자신이 믿는 것처럼 절대적인 사실이 되려면 이 세상 그 누구나 다 믿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은 세월이 흐르면 죽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자신과 자신이 어울리는 소수의 존재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서로 확인해주면서 거대한 착각을 일으킨다. 이 때 앞에서 말한 인간의 위대한 가치들은 마치 그것을 우리 인간 모두가 추구할 수 있는 것인 냥 스스로에게 착각하도록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위기 상황에 처했을 때 타인을 위해 그 목숨을 버렸다고 해서 그것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누군가 했기 때문에 나 역시도 가능성을 쥐꼬리만큼 가졌다고 할 수는 있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실제로 그 때 가봐야 안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이 되면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남아 타인을 돕겠지만 그 때가 되어보지 않고는 어떻게 그것을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신은 어느 그룹에 속할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우리 자신이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100M 달리기를 해서 9초내로 뛸 수 있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한 것이다.
이 거대한 착각은 이후 많은 문제를 야기 시킨다. 그 중 가장 흔한 예가 바로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 시켜서 그것을 마치 전체 인간에게 적용되는 듯 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100M를 9초에 뛴 선수가 자신의 성과를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데도 불구하고 노력하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9초 달리기에 도전하는 문제를 연쇄적으로 발생시킨다. 즉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이룩한 업적을 따라 하려고 노력하면서 자신이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그들이 쓴 책과 매뉴얼을 손에 쥐고 따라 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책과 매뉴얼에 모든 것이 다 적혀 있지는 않다. 냉장고를 TV 매뉴얼을 보고 동작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이미 다른 존재인데 단순한 정보 전달을 통해 어떻게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하지만 10만원짜리 TV가 아무리 노력해도 수 천 만원에 팔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만 원짜리 TV는 옆에서 팔리고 있는 수 천만 원짜리 TV를 보면서 그 자신도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자부하게 된다. 즉 우리는 위대한 인간의 가치를 접하면서 마치 우리 자신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것이 문제인가를 묻고 싶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진짜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정작 우리를 인간답게 해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본능을 거스르는 매우 힘든 과정이기에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데 타인이 이루어 낸 결과를 보고 이것을 자신의 것인 냥 착각을 하여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100M를 8초에 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마도 인간은 꾸준히 그것에 대해 도전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과 실제로 달성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인간 전체의 평균 달리기 속도가 더 빨라질까?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스포츠를 구경한다고 해서 내 몸이 건강해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 인간의 위대한 가치에 대한 간접적인 만족은 바로 이런 현상을 야기 시킨다. 그리고는 다양한 형태의 자기 기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푼돈을 타인들에게 전달하고는 자비로운 사람인 것처럼, 약간의 노력을 한 후 자신은 위대한 정신적 가치를 추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처럼 우리 자신을 착각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것은 마치 한 열흘 정도 100M 달리기를 연습한 후 조금씩 나아진 기록을 보면서 자신이 언젠가는 9초에 달리기를 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갖게 된 후 연습을 그만 두는 것과 동일하다.
혹시 정신적인 능력은 육체적인 능력과는 달리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지금 당장 자신의 버릇 하나만 고치려고 노력해보았으면 한다. 늦잠을 자는 사람은 일찍 일어나기, 술을 먹는 사람은 술을 끊기, 늘 드라마에 빠져 있는 사람이 TV를 안보기 등등. 이것이 쉬울 것 같은가?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가능성이 없다고는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가능성이 0.00001%라면 0%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거기에서 열심히 노력도 하지 않는데 말이다.
실제로 이 상황은 다른 역설을 하나 말해준다. 즉 가능성이 그리 낮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걸쳐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정말로 인간다움의 가치를 갖고 싶다면 그 0.00001%의 가능성을 붙잡고 평생 노력을 해서 1%의 가능성까지라도 높이려고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기 인정이다. 나는 수 천만 원짜리 TV가 아니다. 나는 100M를 9초에 뛸 수 없다. 나는 타인을 위해 자기 희생을 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 나는 내가 감동 받은 그 수많은 이야기 속 주인공과 같은 용기가 없다. 나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만 내 부모는 왕과 왕비가 아니라서 나는 공주가 아니다.
그리고 이 인정이 있은 후 정말로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평생을 걸쳐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다움이다. 그리고 혹시나 정말로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때 절대로 쉽게 타인들에게 당신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길 바란다. 그것은 오직 그 자신에게 있어서만 진실이며 상대적인 가치일 뿐이다. 그것을 전체적인 개념으로 절대화 시키는 순간 많은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처음에 글에서 인간의 두 개의 특성에 대해 말했지만 실제로 우리 인간의 특징은 하나뿐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육체에 종속된 존재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그리 믿고 있는 '인간다움'에 대한 추구를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노력하면 그 자신에게만큼은 인간다움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
이런 우리의 특징을 이해하면 잠시 비참함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나면 내가 가려고 하는 길이 제대로 보이고 가기에 불가능한 목표를 바라보는 안개와 같은 거품이 내 안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내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함으로 다가오며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삶은 결국 상대적인 것이지만 나 자신에게만큼은 절대적인 진실이 되어 준다.
그리고 그 때 우리의 삶을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