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옳다는 것은

아이루다 2014. 4. 5. 09:25

 

우리는 꽤나 상대적으로 대비되는 두 개의 개념을 비교하는 방법에 익숙한 편이다. 이것의 전형적인 예는 밝음과 어둠, 낮과 밤, 옳음과 틀림, 용감함과 비겁함, 진짜와 가짜 등의 것인데 보통 우리는 이 중 하나를 좋은 것으로 보고 그 반대편에 있는 다른 것은 나쁜 것이라고 본다.


물론 밝음이나 낮 등은 그냥 자연 현상이기 때문에 과거에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시절엔 어둠이나 밤은 어떤 악한 존재를 의미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기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밤 역시도 대낮처럼 밝기 때문에 이젠 따로 그런 느낌은 많이 없어진 듯 하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 사회의 많은 가치관의 중심이 되는 것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 대비가 되면서 모든 사람들 간의 갈등에 있어서 판단 기준점으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서로의 생각이 다르거나 입장 차이에 의해 언쟁이나 다툼이 벌어지게 되면 보통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누가 더 옳은 말을 하느냐 여부이다. 즉 여기에서 두 사람은 서로 각자의 입장에서 자신이 느낀 감정이나 생각이 얼만큼 더 일반적이고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관점인지를 강조하려고 애쓴다.


하지만 보통 이런 다툼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서로 입장 차이가 너무 커서 쉽게 그것이 좁혀지지 않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오늘도 싸우고 분노하고 실망하고 헤어지거나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기반엔 바로 우리가 이미 정의해 놓은 옳음, 정의, 상식, 일반적 가치관 등의 포괄적인 개념들이 깔려 있다.


그런데 오늘은 여기에서 과연 옳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기로 하자.


우리는 대체적으로 어떤 것에 대해서는 거의 절대적인 옳음을 주장하는데 익숙하다. 예를 들어서 '남에게 해로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라든가 '독도는 한국 땅이다' 등의 의견은 물론 속으로는 다른 의견이나 평소 행동은 다를지 모르지만 그래도 딴 목적이 있지 않는 한 보통 이것에 대해 의심 없는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이런 의견들뿐만 아니라 잘 지켜지지는 않아도 신뢰, 약속, 의리, 용기, 공정함, 정의 등과 같은 가치들은 늘 많은 이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굳건하게 인간 사회의 가치 기준점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만약 배우자의 불륜이 들통나게 되면 부부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하여 바람을 핀 상대를 무차별적으로 몰아 붙일 수 있으며, 이혼 시 사유로도 이용될 수 있다.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은 것을 비난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정해진 것은 지켜야 한다는 약속의 기본적 속성에 의해서 가능하다. 또한 의리와 같은 것은 상대가 어떤 입장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상대적으로 변화하지 않고 그 대상의 미래 행동을 믿을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점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은 대부분이 긍정적이고 또한 그래서 좋다. 그런데 이 옳다는 것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하나가 있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이득' 이다.


신뢰, 약속, 의리, 용기 같은 것들이 왜 이득하고 연결되는지 의아한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득의 범위를 개인의 범주에서 벗어나 전체로 확대시켜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옳다고 믿는 많은 것들은 인간 사회 이득을 기반으로 한다.


쉽게 말해서 신뢰가 쌓여 있는 사회는 그렇지 못한 사회보다 훨씬 살기 좋고 미래 발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용기 있는 이들이 많고 약속이 잘 지켜지며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누구나 그렇게 되길 바라는 사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좁은 시야에서 이 사회가 단순히 정의롭고 공정했으면 하는 생각을 하지만 실제로 이것은 우리가 더 잘 살기 위한 기본적 바탕이 된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이들이 세상을 정의롭게 살아라 라고 말하는 것은 조언이 아니다. 그것은 나도 잘 살고 너도 잘 살자는 의무에 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정의롭길 바라고 또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언뜻 보기엔 마치 개인적 이득을 포기한 듯 보인다.


이렇다 보니 지금 이순간에도 사람들은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렇게 살면 손해만 본다고 믿는다. 물론 이런 믿음은 단기적인 관점에서는 어느 정도 가치는 있다. 눈 앞에 빵이 하나 있을 때라면 먹는 것이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빵을 나누어서 주변에 주면 나중에 내가 빵이 없을 때 그들이 나에게 그 빵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김으로써 삶이 훨씬 안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신뢰가 쌓여야 하고 사람에게 의리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는 환경에서는 누구도 자신이 쥔 빵을 타인에게 건 낼 수 없게 된다. 가족이 같은 집을 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이런 신뢰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튼 넓은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옳고 좋다고 느끼는 그 모든 것은 인간 전체의 이득과 관련이 된다. 그렇다면 도로를 뚫기 위해 산을 깎아야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도로를 뚫고 싶은 이들은 아마도 이 도로가 생기면 얼마나 많은 경제적 효과가 생길지를 주장할 것이고 반대로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도로로 인해 주변 환경이 얼마나 심하게 훼손 될 것인지를 말할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주장은 평행선을 그으면서 오랫동안 갈등 요소로서 대립을 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누가 옳다 그르다를 말하기는 힘들다. 어쩌면 서로 옳은데, 그것은 바로 도로를 뚫는 것은 인간에게 옳고 도로를 뚫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에 좋은데 실제로 그럴 경우 결국 다시 인간에게 좋다.


완전히 다른 의견처럼 보이고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갈등요소로 보이는 이런 상황 역시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기에서의 갈등은 단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단기적인 이득을 얻느냐와 장기적인 이득을 얻느냐의 차이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우리는 인간이 지구의 생태계를 망가뜨려서 결국 지구가 환경 재해에 의해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자주 한다. 이것의 가장 흔한 예가 바로 지구 온난화 와 핵 재앙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지구는 절대 망할 일이 없다. 망하는 것은 오직 인간이라는 종과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같이 망해 갈 수 많은 동식물들일 것이다.


실제로 지구는 과거 수 십 억년 간 몇 차례 대규모 멸종을 겪어 오기도 했다. 그렇게 번성했던 공룡이 멸종함으로써 우리 인간인 속한 포유류가 드디어 전성시대를 맞게 된 행운을 얻은 것이다. 이렇듯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으로 작동하기도 하니 과연 옳다는 기준에 대해서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결국 이 상황을 종합하면 우리가 옳다고 믿는 것들은 완전히 상대적이란 뜻이다. 즉 거의 모든 옳음은 인간의 기준점에서 옳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늘 그 자신들이 믿는 옳음에 대해서는 거의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고 주장하면서 살아간다. 즉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니 이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라고 말하는 것에 익숙하다는 뜻이다.


이 전체적인 상황을 다시 파악해서 정리해보면 우리가 보통 옳다 틀리다 할 때 그것에 대한 기본적인 근거는 모두 이득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으로 파악할 수 있다.


보통은 그래서 당장 눈 앞의 이득을 추구하는 행위 중 그 질이 나쁜 것을 보통 범죄라고 하여 사회적으로 정한 법에 의해 처단하고 그보다는 덜 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행위들 역시도 이기적이거나 혹은 옳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도덕적으로 비난하기도 한다.


하지만 반대로 이것들을 처벌하고 비난하는 행위들의 근거가 되는 바로 그 옳음 역시도 또 다른 형태의 이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고 보면 결국 비난하는 주체나 비난을 받는 사람들 모두 같은 입장이란 점은 원칙적으로 맞다.


하지만 이 이득의 범위가 넓을수록 우리는 그것이 옳다라고 말한다. 즉 좀 더 다수의 인간이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정의, 옳음, 선 등의 단어를 이용해서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아닌 동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상황일까?


쥐들이 모여서 인간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려서 쥐들 전체 이득을 더 얻기 위해 인간의 집에 있는 치즈를 훔쳐 먹는 것을 하루에 100g으로 한정하자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이 쥐들이 귀여울지도 모르겠다.


외계인의 존재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침략을 할 때 우린 분명히 정의와 용기의 이름으로 그들과 대항을 하겠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지구로부터 가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 범위에서는 나의 이득, 가족의 이득, 도시의 이득, 국가의 이득, 인류의 이득으로 넓어질 뿐 그 본질은 모두 같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이 동일한 '이득'을 근거서 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좀처럼 좁히지 못해서 매일매일 사회적으로 크고 많은 갈등들이 수 없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바로 서로가 절대적으로 자기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는 기본적인 입장이 명확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그 둘의 입장은 산을 깎아야 한다고 우기는 쪽이나 산을 지켜야 한다고 우기는 쪽처럼 절대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결국 이런 갈등은 최종적으로 많은 비용 발생을 초래한다. 즉 이득을 얻고자 했으나 결국 손해만 보고 마는 상황이 늘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늘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너무도 극단적 이기심으로 인해 우리 스스로를 망쳐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갈등 상황에 놓이게 되었을 때 그 본질적인 것에 대한 깊은 사고가 있을 수 있다면, 아니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쳐도 시간이 지나 차분히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면, 그 때 자신의 감정적 흥분을 가라앉히고 난 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고 자신과 갈등을 겪은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여 좀 더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은 누구나 이득을 추구한다. 설령 그것이 전 인류를 대상으로 한 평화로운 행동이라고 해도 그 자체도 이득을 추구한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성인들로 알려진 인물들이 주장한 것도 포함된다. 예수, 석가, 공자 등이 주장한 사상 역시도 인간의 번영을 통한 이득 추구를 근거로 하고 있다. 성녀로 알려진 테레사 수녀가 한 일 역시도 인간 전체의 이득을 위해 한 일이 된다.


우리가 쥐가 되거나 외계인이 되지 않는 이상 우린 철저하게 인간 편일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리의 한계이며 우리가 인정해야 할 절대적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우린 지금과 같은 입장을 절대 버리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인지만 한다면 어떤 상황을 판단할 때 그것을 옳고 그름의 입장에서만 보는 편협한 시각을 조금이라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처럼 어느 날 우리보다 훨씬 발전된 외계 생명체가 지구에 와서 너희는 지구에 해로운 생명체이니 멸종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를 모두 죽인다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우리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을까? 과거 우리가 인간을 위협하는 거대 포식자들을 그렇게 멸종시켜 왔는데 말이다. 그것도 그 이유가 바로 우리를 위협하기 때문이거나 가진 털이 탐스러워서였는데 말이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내 판단으로는 외계인이 좀 더 옳다. 단지 그 옳음을 받아 드릴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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