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생각의 연결

아이루다 2014. 4. 20. 09:48

 

이야기 하나.

 

꽤 예전부터 나는 개인적으로 '일체유심조' 라는 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그냥 단순하게 해석하면 세상일은 마음먹은 대로 라는 의미를 가진 이 말은 불교 경전 중 하나인 '화엄경'의 핵심사상이라고 한다.

 

단순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생각보다 매우 깊은 의미와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의미는 생각 할수록 점점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게 해준다. 세상 일은 보기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말 그대로 지옥과 천국을 오갈 수 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마냥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모두 긍정적으로 해석도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마다 상황에 따른 반응이 다르고 대처가 달라진다. 어떤 이는 위기가 닥치면 울면서 도망가고 또 다른 이는 위기는 기회라고 생각하면서 아주 적극적으로 자신을 단련시키는 계기로 삼는다. 하지만 이 두 사람에 일어난 위기의 본질은 동일하다. 단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뿐.

 

실제로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같은 사건에 대해 그 자신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에 따라 나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속한 환경에 따라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현재 우리 모두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과 자신의 세대, 주변 친분을 맺은 사람들의 가치관등이 뒤섞여서 오늘의 그 자신의 반응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개인적으로 마음 훈련을 열심히 해서 소위 말하는 부동심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인간을 가장 힘들게 하는 감정의 파고를 어느 정도는 극복하고 험한 파도가 치는 바다나 잔잔한 호수나 상관없이 나 자신은 흔들리지 않는 배와 같은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아니 실제로 그럴 것이다.

 

이야기 둘.

 

오래 전 개봉 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인간의 몸에 기계장치를 연결해서 그 사람으로부터 전기를 얻어 쓰고 대신 그 사람의 머리 속에 가상현실을 만들어주어 살게 해주는 사회를 표현했다. 하지만 그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안의 세계에서 자신의 오감을 통해 전달된다고 믿는 그 감각을 실제로 믿고 전혀 의심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 네오는 어떤 우연한 기회에 그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고 과감히 두 개의 알약 중 진실을 아는 약을 선택하여 건전지화 되어 있는 인류의 처참한 현실을 알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만약 정말로 감각을 속이고 머리 속에서만 상상이 되는 세상이라면 우리 자신은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물론 이 영화는 실제로 다른 여러 가지 철학적 짬뽕을 시도했지만 나에겐 이 부분이 가장 깊게 인식되었다.

 

분명히 나 말고도 다른 사람 모두 내 앞에 모니터가 있다고 하니 진짜로 모니터가 있는 것은 맞고 혹시라도 눈에 이상이 있을까 싶어서 손을 뻗어 그 모니터를 손을 만지면 내가 기대하던 촉감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고 켜진 모니터라서 미세한 열까지 감지되는데 실제로 이 모니터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그 모니터가 아닌 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과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관점에서 아주 단순하게 이해되긴 쉽지만 진실로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느끼는 그 모든 것이 가상이라도 해도 나는 그것을 인식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드릴 수 있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가 자신의 감각과 현재의 감정이 모두 인위적으로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이 인공적으로 조작되었거나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애인을 만지는 촉감이 어떤 기계장치로 인해 생성된 전기신호가 될 수 있음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실제로 나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의 실체를 의심하지 않고 살아간다. 우리 중에서 머리가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가 그것을 의심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매트릭스 일수도 있다. 그리고 매트릭스라고 한들 우리가 그것을 알아챌 방법은 없다.

 

이야기 셋.

 

살아가면서 느끼는 모든 가치와 자신이 소중하다고 여기는 감정 혹은 그 대상에 대한 느낌이 모두 자신의 죽음과 함께 무의미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을 때 우린 어떤 절망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인간에게서만큼은 살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숨쉬고 심장이 뛰는 신체적인 활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살아 있다는 것을 자신이 그 자신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존재가 오랜 기간 익숙해진 육체 속에서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을 받아 드릴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는 노쇠하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후로 많은 가설이 존재하지만 영혼을 믿지 않는 나의 경우라면 이것은 나 자신의 절대적 마지막이 된다. 그리고 난 후 내가 살아 생전에 가졌던 그 모든 가치는 모두 사라진다.

 

물론 어떤 글을 남기고 훌륭한 업적을 남겨서 역사 속에 기록될 수 있는 영광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도 오랜 시간이 흘러 인간의 역사 속에서 잊혀지거나 혹은 인류 그 자체가 멸종하여 없어지게 되면 결국 사라질 가치가 된다. 영겁의 시간을 흐르게 될 이 우주에서 그 시간은 아무리 길어야 보잘것없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서 갖게 되는 가치 있는 일들과 내가 매 순간 진실하고 절대적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 모든 감정들은 과연 그 본질이 무엇일까? 그것은 마치 봄 햇살이 가득 한 날 철없이 내리는 눈처럼 그냥 보기엔 아름답지만 금새 녹아 사라질 무의미한 실체가 아닐까?

 

이것의 질문이라고 할 것도 없이 당연히 '그렇다'가 답인데 그것을 인정하기란 너무도 힘들다.

 

***

 

위의 세가지 이야기는 각자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적어도 얼마 전까지 내 머리 속에서는 그랬다. 하지만 이 세가지 이야기는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금의 내 머리 속에는.

 

인간은 죽는다. 그것은 변함없고 중단되지 않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영원한 삶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장치를 개발했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다. 아니 실제로 죽지는 않을 것이라고 해도 천 년의 시간만 지내면 천년 전 나와 천 년 후 나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을 변하지 않겠지만 나는 변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두 개의 나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본 후 두 존재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하기 힘들고 인정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이다.

 

우리가 죽는다는 명제가 절대적 사실이라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죽지 않은 상태만을 의미한다. 우주의 역사 속에서 나의 삶의 시간은 내가 존재 하지 않는 시간에 비하면 너무도 짧은 시간이다. 그러니 이 우주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았었고 존재하지 않을 존재일 것이다.

 

실제로 내가 존재하느냐와 존재하지 않느냐는 무의미한 논쟁이다. 그것은 모두 나의 머리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사고 과정이기 때문에 그렇다. 물론 그것을 타인의 머리 속에서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나와 같은 똑같은 형태의 존재이다. 예를 들어 바보들끼리 서로 머리가 좋다고 칭찬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반론이 일어난다. 그것은 바로 만약 그것이 정말로 모두 내 머리 속에서 이루어진 인식의 결과라면 내가 인식한 것을 내 스스로 절대적 사실로 받아 들인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겠는가 에 대한 생각이다.

 

즉 내 존재의 무/유의미성에 상관없이 내 스스로 그것을 의미 있다고 판단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나의 거대한 착각이라고 해서 결국 달라질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다. 즉 내가 어떤 노력을 해도 변함없이 내가 죽고 무의미하다는 절대적인 사실을 받아드릴 수 있다면 그 무의미함에 또 다른 무의미함을 더해서 무슨 상관이 있겠냐는 말이다.

 

한강에 한 컵의 물을 부어 넣는다고 해서 한강이 넘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것은 존재감도 없이 금새 다른 물들과 합해져 어디론가 흘러가게 된다. 내 삶의 본질이 이렇듯 명확한 무의미성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면 거기에 더해서 또 다른 무의미한 생각을 더한다는 것이 실제로 그것 때문에 내 삶에 대한 정의가 달라질 것이 없다는 뜻이다.

 

과거 한 때, 이 세상에 대해 깊은 실망과 함께 우리 자신들에 대한 존재의식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스스로 어디론가 공간적으로 단절된 곳으로 향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공간의 단절은 실제로 거의 무의미한 시도였다. 그것은 단지 공간만 단절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물리적 시도와 다르게 머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단절은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내 스스로 매트릭스를 만드는 것이며 그 안에는 오직 나만 존재하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세상 모든 일을 내 마음에 따라 본다는 '일체유심조'의 사상과 흐름을 같이 한다.

 

내 스스로 세상을 창조하고 내 스스로 그 안에서 머물며 살아갈 수 있다면 내가 물리적으로 그 어떤 곳에 있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고 힘든 사고의 전환이지만 이 모든 상황을 고려한 후 내 스스로 내릴 수 있는 가장 현명하고 현실적인 판단이 될 것이다. 단지 이것을 위해 내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은 너무도 많은 난해한 과정을 남겨두고 있다.

 

공간의 단절은 아주 쉽다. 내가 어딘가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살면 된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내 스스로 교류를 끊으면 가능하다. 서울이란 도시는 이것이 매우 쉽다.

 

하지만 내 마음 속에서 내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고 그 안에서만 머무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물론 그것을 위해 어느 산속에 힘들게 집을 짓지 않아도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사는 곳에서 타인들과 계속 교류를 하면서 진정으로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 자만감일 것이다.

 

아마도 불가능한 목표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내가 앞으로 살아갈 방향은 이 길이 되어야 한다고 내 이성적 판단은 말하고 있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깨달음의 길인지 혹은 도피의 길이지 아니면 정말로 정신병자가 되는 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다른 이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어떤 결론이 나더라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내가 소중히 여기는 존재와 내가 스스로 진실되다고 믿는 그 모든 감정들을 가꾸어야겠다. 다른 이들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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