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행복의 종류

아이루다 2014. 3. 10. 23:12

행복이란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이다.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이들 조차도 그것이 행복하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 남을 위해 하는 일도, 남을 짓밟으며 하는 일도 모두 그것을 하는 이의 행복이 있기에 그리 하고 있다.

 

인간에게 있어서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거짓말이다. 설령 그 삶이 다른 이가 보기엔 전혀 행복해 보지 않더라도 그 자신은 적어도 그것이 자신이 최대한 불행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렇듯 우린 행복하기 위해서나 혹은 그럴 수 없다면 적어도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산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왜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이렇게 모두 행복만을 추구하고 살아갈까? 왜 행복 이외의 다른 것을 위해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실제로 그렇게 보이는 것이 있기는 하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치 있다고 알려진 좋은 단어들이 많이 있다. 정의, 헌신, 배려, 감동, 명예, 믿음, 사랑, 신념, 꿈, 희망 등등 우리 인간이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들은 꽤나 된다. 하지만 이것들 역시 행복의 다른 모습일 뿐이다.

 

또한 가끔 돈과 행복을 가지고 경쟁시키기도 하지만 돈 역시도 행복을 위한 도구이지 행복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도, 재미난 영화를 보는 것도, 쇼핑을 하는 것도 모두 돈이 들기에 돈이 필요할 뿐 결국 이 돈은 바로 행복과 교환하기 위해 필요하다. 잘 생각해보면 우린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쓰는 위해 산다. 단지 그것이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아주 원초적인 씀씀이가 되더라도 결국 배부름도 행복이기에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중요한 인간의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욕구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것에 대한 답은 생각보다 매우 단순하다. 그것은 바로 생존으로부터 온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의 몸이 동작되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좋다.

 

인간의 몸은 철저한 보상체계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기관이다. 우리의 각 신체 장기는 무척 중요하나 우리 몸에서 뇌만큼 중요한 장기는 없다. 실제로 뇌는 우리 몸의 신경망의 최종 판단을 해내는 중추적인 기관으로써 그 중요도는 다른 장기는 절대 따라갈 수 없다.

 

그런데 이 뇌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무엇일까? 당연히 그 자신의 영속성, 즉 생명의 연장을 보장 받는 것이 된다. 즉 자신이 속한 사람의 몸이 죽지 않고 계속 영양분을 공급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통 생존 본능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을 위해 뇌는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을 통해 그것을 계산하고 지시한다.

 

그 덕분에 아무리 힘들거나 위험한 곳이라고 해도 우리는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몸은 훨씬 편한데 우린 목숨을 담보한 채 먹을 것을 찾아 다녀야 한다. 그런데 우린 왜 이런 행동을 할까? 목숨이 위협받는 심한 스트레스 속에서도 우린 왜 죽을 각오를 하고 먹을 것을 찾아 다니게 될까?

 

이것은 바로 우리의 뇌가 더 강한 스트레스를 느끼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가만히 있으면 결국 굶어 죽는다는 생각을 알고 있기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몸이 주어서 결국 힘듬과 공포를 이겨내고 먹을 것을 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뇌는 우리가 만약 그런 행동의 결과로 먹을 것을 찾아 내어 먹게 되면 거기에 걸맞은 후한 상을 내려 준다. 즉 미각 만족과 포만감을 통해 행복감을 선사해 주는 것이다.

 

뇌는 이렇듯 단순한 원리인 당근과 채찍으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한다. 채찍에 해당하는 불행함은 우리를 걱정과 공포를 일으켜서 행동하게 만들고, 그 후 힘든 행동을 통해 목표를 결과로 만들어 냈을 때 당근에 해당하는 행복감은 우리를 크게 만족시켜 준다. 이렇듯 불행함이란 결국 여러 종류의 스트레스 속에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행복함이란 이런 스트레스를 하나씩 둘씩 해결할 때 뇌가 우리에게 주는 보상인 것이다.

 

우리의 몸이 이렇게 동작하고 있기에 우리는 행복 추구의 욕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즉 우리가 만약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땐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한다면 그 생각 자체가 바로 행복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존 본능을 자신의 의지로 느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그렇지 않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행복은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 이상 단순하게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사과를 먹기 위해 사과가 열려 있는 나무를 올라가는 사람을 상상해보자. 일단 나무를 오르는 행동은 힘든 일이다. 그래도 힘들게 올라 사과를 따서 내려오면 사과를 먹고 배를 채울 수 있다. 그래서 모두들 사과나무를 오른다.

 

그런데 우리는 머리 속에는 경험과 지식을 기반으로 미래를 계산할 수 있다. 그래서 한 번 올라갔을 때 최대한 사과를 많이 따려 할 것이다. 그렇지만 더 많이 따는 것은 더 많은 노동을 의미한다. 그래도 올라가는 것이 그리 쉽지 않으니 한 번 올라갔을 때 많이 따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이득이 된다. 즉 나중에 나무를 또 올라가야 하는 불행함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부터 계산이 복잡해진다. 원래는 한 번 사과나무를 올라가서 한 끼 먹을 분량만 따오면 되는데 이것이 계산이 되기 시작하니 선택을 할 수 있는 방법론이 다양하게 생겨나 버렸다. 사과를 너무 많이 따서 썩이게 되거나, 사과를 따 놨더니 주변 사람들이 훔쳐가거나, 한 번 엄청난 양의 사과를 땄더니 자꾸 먹어서 뚱뚱하게 되어 그 후 나무 오르기가 너무 힘들어 지거나 하는 일이 발생 할 수 있다.

 

분명히 계산 상으로는 사과를 딸 때 한 번에 많이 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결과로 인해서 차라리 처음처럼 사과를 그때 그때 마다 따는 것보다도 못할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가능성이다. 앞에서 말했듯 일반적으로 사과를 많이 따는 것이 현명한 생각이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예상치 못한 행복이 있다. 사과나무를 오르니 멀리 보여서 다른 사과나무가 있는 곳이 보일 수도 있고 사과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근육이 발달하여 몸이 건강해지고 생존력이 향상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누군가에겐 행복이지만 누군가는 늘 귀찮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멀리 보는 것도 근육이 느는 것도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꽤 된다.

 

이 예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행복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사과를 먹는 그 자체의 행복이고 다른 하나는 계산을 통해 행복을 얻을 가능성을 높였을 때 얻는 행복이다. 즉 사과를 먹는 그 자체도 매우 좋지만 사과를 많이 따서 집에 보관해 놓은 것을 생각하는 것도 기분이 좋다. 단 후자의 행복은 실제로 행복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서 도둑이 들거나 사과가 썩으면 금새 불행으로 바뀔 수 있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보통 행복을 얻는 것은 이 둘 중에 어떤 행복일까? 우린 먹을 것을 먹고 졸릴 때 자고 배가 아플 때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남녀가 성적인 행동을 할 때 가장 원초적인 행복을 얻는다.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나머지는 바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진 행복이다. 즉 우리의 본능인 생존에 대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높아졌을 때 우리는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진 것 정도의 행복을 얻는다. 이 후 글의 이해를 위해 전자를 본능 행복, 후자를 계산 행복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본능 행복은 보통 생명체 본연의 행복을 의미하고 계산 행복은 우리가 먹고 살만 하니까 생겨난 행복이다. 즉 우리가 문명을 이루고 충분한 지식을 쌓을 수 있는 뛰어난 지능을 가졌기에 가능한 행복이란 뜻이다. 만약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면 우리가 사과를 많이 따서 저장할 생각을 하겠는가? 적어도 추운 겨울이 오는 것을 예측해야만 그런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먹을 것은 인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행복함을 줄 수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행해지는 계산법은 사람마다 너무도 다르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중간 계산을 통한 행복은 사람마다 모두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이것이 소위 우리가 말하는 가치 추구이다.

 

하지만 계산이란 것은 정보와 경험을 기반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즉 사람마다 똑똑함이 다르고 경험 역시도 크게 차이가 난다. 그러니 같은 본능적 행복을 추구해도 모두 다른 계산법의 결과로 얻어진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계산 능력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

 

어린 시절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 주변의 끊임없는 간섭과 지시로 커 온 사람은 스스로 자신이 계산 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남들이 계산 해준 결과만을 손에 쥐고 그것을 따라 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뭐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다. 왜냐하면 행복 중 본능적인 행복은 다들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을 것을 좋아하고 졸리면 자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도 행복의 두 가지 얼굴 중 하나는 충족이 된다.

 

그런데 그 중간 계산을 통해 얻어지는 행복은 본능적 행복과는 달리 사람마다 차이가 크기에 남들이 계산해 준 공식대로 살면 자신과는 잘 안 맞는다. 물론 재수가 좋아서 맞을 수도 있다. 또한 아무리 다양하더라도 보편적인 행복 계산법들은 있다. 돈을 버는 것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이 행복한 이유는 바로 돈을 쓰는 것이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돈을 쓰는 것은 버는 것만큼의 보편성이 없다.

 

이것은 사람들이 어떤 것에 돈을 쓰고 사는지를 보면 되는데, 이 역시 엄청난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결국 남이 계산 해준대로 살아가면 돈은 벌지만 돈을 써도 그 사람의 머리 속만큼 보상 받지 못한다. 이것은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줄여서 결국 돈을 버는 행복마저도 줄어 버린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도 보편적인 행복이다. 물론 돈 만큼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인간이 행복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보편적 가치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것은 종족 번식이라는 우리의 욕구와도 연결되어 있다. 생존 욕구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이 종족 번식은 우리의 유한한 삶을 책임져 준다.

 

하지만 이 역시도 사람마다 다양성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지만 누군가는 자식을 원수처럼 여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남의 아이를 키우기도 한다. 또한 그 의지와 상관없이 결혼을 하지 못하거나 했더라도 불임이라서 애를 갖지 못해 그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살아 오면서 행복 계산법을 훈련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우리들 대부분은 보통 이렇게 돈과 자식이 주는 행복에 많은 가치를 두고 살아간다. 그리고 아까도 말했듯 이것은 보편적이기에 그리 틀린 선택은 아니다. 단지 우리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계산법의 결과로 이루어진 좀 더 자신에게 잘 맞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을 찾으려고도 안하고 찾을 능력도 안되니 거기에 안주한다.

 

여기에서 행복 낙오자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남의 것을 베낀 후 따라 하다 보니 절대로 처음에 그것을 한 사람들을 따라 잡을 수 없다. 그리고 계산 행복은 한 가지 추가적인 문제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계산된다는 그 본질적 방법 때문에 그렇게 되는데, 남들과 비교가 된다는 점이다. 즉 계산식에 타인과의 비교 값이 대입되어 최종 결론이 나온다.

 

배가 부른 것은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짓이다. 물론 배가 몹시 고팠다면 배부른 이가 부러울 테지만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면 이것은 좀 다른 문제다. 배가 부른 건 무엇을 먹든 배만 부르면 되지만 맛이 있는 것을 먹고 싶은 것에는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하다.

 

앞에서 말했듯 계산 행복은 문명이 발달 할 수록 더욱 중요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먹는 것 자체보다 무엇을 먹는지를 더욱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원래 가지고 있던 본능 행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이젠 배만 채우기를 바라진 않는다.

 

행복의 두 얼굴 중에서 계산 행복의 역할이 훨씬 커졌는데 우리는 이것을 계산 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황이 벌어져 결국 남의 것을 컨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컨닝한 그 사람 역시도 어딘가에서 베껴 왔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도대체 언제 누가 시작했는지도 모를 정체 모를 행복이 우리 사회에서 보편적 지지를 받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우리의 어리석음은 이것을 한층 더 고착화 시킨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한 선택이 옳기 바라기에 이젠 거기에 대고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바닷가에서 모래성을 쌓는 게 행복인 어떤 특이한 사람의 이야기가 퍼져서 누구나 바닷가에 나가 모래성을 쌓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왜 그 모래성을 쌓는 것이 행복한지를 물어 볼 필요도 물어 볼 생각도 안하고 그저 남들이 쌓으니 같이 쌓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뒤에선 시시각각 파도가 몰려오고 있으나 사람들은 자신의 모래성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서로 설명하고 들어주고 공감하고 있다.

 

본능적 행복은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고 경험하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 얻는다. 하지만 계산 행복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는 이것을 제대로 자신에게 맞는 맞춤형 계산으로 해내지 못할 경우 그 자체가 모래성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결국 모래성이 무너진 후 행복 낙오자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이젠 다시 몰려가 또 다른 행복 전도사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있을지 답을 달라고 요구한다. 그리고 행복 전도사들은 자신의 책과 강의를 듣길 바라고 돈을 받는다. 물론 그 시간과 돈을 투자한 덕분에 약간의 교육은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은 보통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한다. 하나는 자신이 느끼는 행복 수준에 만족해 하는 것인데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보편적 행복에 잘 어울리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고, 다른 하나는 바로 포기하는 것이다. 즉 이 경우엔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서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 살기 보다는 불행하지 않기 위해 살아간다.

 

이렇게 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같은 행복 계산법을 가르친 후 잘 적응하면 행복하게 살고 잘 적응하지 못하면 불행하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 실제로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드물고 대부분은 절반쯤 성공한 채 살아간다. 그리고 그러니 이젠 그것이 의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서로가 모여서 그들이 이루어 낸 행복을 자랑하고 칭찬하고 공감하고 부러워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실패해서 얻지 못한 행복에 대한 대안으로 삼는다.

 

그 덕분에 제대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행복을 타인에게 더 많이 설명을 해야 하며 더 많이 공감을 얻어내야 하게 되었다. 다행히 기술의 발전은 그것을 많이 쉽게 해줬다.

 

그렇지만 아무리 노력을 해도 원래 자신에게 맞지 않은 타인의 행복 계산법의 원천적인 문제는 해결이 안 된다. 그래서 결국 가끔 공허함이나 불행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남의 행복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하게 만들어 버린다.

 

이런 상황에 이르러도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 보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행복할지에 대한 더 이상의 깊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왜냐하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 번 살 수 없기에 자신이 선택한 것의 다른 선택에 대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늘 현재의 자신의 삶이 자신이 선택한 최고의 삶이길 바란다. 이것은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결국 이 합리화 현상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가 좀 더 깊게 생각하지 못해서 놓치고 있는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평생에 걸쳐서 놓치고 있다.

 

즉 현재의 삶이 만족스럽다고 해서 더 나은 삶이 없다는 뜻은 아니란 말이다. 이것들은 좀 더 스스로를 열심히 되돌아 봄으로써 지금의 행복함 보다 더 높은 행복 수준을 느끼고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이미 자신에게 주어진 누가 말했는지, 누가 옳다고 했는지 모르는 남의 공식을 가져다가 자신의 머리 속에 평생을 두고 그 계산법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것은 그 자신이 선택한 삶이니 딱히 이것이 틀렸다고 말 할 필요는 없지만 나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안타까움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우리는 좀 더 많이 행복할 수 있는데 그리 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가정이 아니다. 정말로 우리는 지금과 완전히 동일한 물질적 조건에 있어도 최소 두배 이상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사회적으로 합의 하지 못해서 행복하기 위해 살지 못하고 불행하지 않기 위한 삶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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