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책 중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 있었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굳게 믿은 톨스토이는 기독교적인 시점에서 이것을 풀어서 써 내려갔다. 그리고 거기엔 사랑이 있었다. 즉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 최고의 가치라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나 보다.
가치에 대한 글을 과거에도 몇 번 썼었기 때문에 이 글에서 가치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서 많은 설명은 하지 않을 작정이다. 단지 오늘은 톨스토이가 표현했듯이 인간을 살아가게 해주는 근원적 목표가 되는 가치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하기만 할 뿐 우리가 잊고 사는 한계점과 유효범위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이라면 보통 하나 이상의 가치 기준점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 하면 가치관이라고도 하는데, 사람마다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전체가 공통적으로 중요하다고 믿고 그것을 절대화 시킨 가치 기준이 있으며 결국 이것은 보편적 가치관이란 이름으로 통용되며 우리 인류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랑', '인권', '가족', '국가', '정의', '종교', 신념' 등은 인류 전체에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믿는 가치가 되며 '하늘', '자전거', '모임', '가족', '돌봄', '여행' 등은 사람에 따라 매우 다른 의미를 갖긴 하지만 결국엔 누군가의 가치가 되어 줄 수 있는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쓴 글에서 우리 인간의 삶의 두 가지 단면에 대해서 말했었는데, 하나는 생존이라는 양적 영역, 다른 하나는 행복이라는 질적 영역이라는 근거로 보면 가치는 여기에서 후자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가치를 통해 생존을 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가치들은 우리의 생존을 스스로 포기하게끔 해주는 것들이 되는데 보통 이런 가치를 신념이나 종교라고 부른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은 과거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합된 시기에 이 땅의 조상님들이 생존을 포기한다는 생각으로 그 신념을 지기고자 한 가치였다. 그리고 특정 종교에 속한 어떤 분들은 자신의 종교를 위해 그 목숨을 미련 없이 내놓기도 하는데, 예전에 불교를 위해 목숨을 버린 이차돈이란 분이 있었고 현대에 들어서도 종교를 위해서 많은 이들이 순교도 하고 자살 테러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의 질적 영역이라고 말한 '가치'에 대한 우리의 정형적 사고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어떤 원리로 작동하고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나 떠올려 보자. 토끼 같은 자식, 너무도 사랑하는 사람, 나라를 위해 금메달을 따고 있는 선수들, 거금을 들여 산 너무도 갖고 싶었던 어떤 제품, 자신의 추억, 10년을 넘게 모아 온 통장 등등 개개인 마다 다를 것이지만 보통 적어도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어떤 가치들은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지기도 하고 어떤 가치들은 오랜 시간의 노력이 들어간 후 인공적으로 만들어 진다. 또한 종교나 신념과 같은 가치는 자신이 믿는 믿음의 힘으로 만들어 진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보면 우리 인간이 어떤 가치가 새로 생겼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 발생된 것처럼 보이는 자식에 대한 사랑에서도 보물처럼 여기는 자식의 존재가 자신의 수 많은 노력과 수년간의 시간이 투자되었기 때문에 소중해졌다는 뜻이다. 또한 어떤 일을 겪은 후 그것이 옳다는 확신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부여해서 활동해 온 일이어서 그것이 수년간 혹은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면 비록 언젠가 모든 이들이 그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해줘도 그 당사자는 그들을 부정하게 되어 있다. 이것이 가치가 가진 힘이며 가치가 가진 한계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렇듯 절대적으로 느껴지는 가치는 생각보다 상당히 주관적이며 시간과 노력에 종속적이면서 이것은 바로 그 범위가 개인적인 관점에서 다뤄져야 할 대상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인류 보편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그 집 자식에 대한 가치는 그 집안에서 유효하다. 만약 자신의 자식이 남의 자식과 경쟁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이면 남의 자식은 철저하게 극복해내야 할 남일 뿐이다. 우리는 선한 얼굴로 자식에 대한 인류 보편적 사랑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그 다른 자식들이 내 자식과 직접적인 경쟁을 하고 있지 않을 때만이 유효하다.
인간의 생명 역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권이란 말이나 인간 생명 존엄성이란 말로 우리가 가진 생명이란 가치를 무척 중요하게 여기지만 누군가를 죽여야만 그 자신이 살 수 있는 처지가 되었을 때 상대가 가진 이 가치는 휴지다 못하게 여겨진다. 심지어 우린 정당방위란 이름으로 살인을 법적으로 용서하기도 하고 전쟁의 경우엔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 되기도 한다.
남녀간의 사랑도 영화로나 소설로서 많은 이들의 가치 기준과 부합되어 많은 인기를 누리는 항목 중 하나인데 이것 역시도 경쟁자로서 등장하게 되면 상대가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에 대해 품은 감정은 쉽게 무시되고 인정하기 어려운 가치가 된다. 물론 그 연적 역시도 마찬가지 입장일 것이다.
국가에 속한 사람이라면 대부분 느낄 수 있는 애국심의 존재 역시도 인류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결국 이 애국심은 확실하게 그 나라 안에서만 유효하게 된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우린 타국의 국민이 애국심에 불타 총을 들고 전장에 나올 때 그를 쏘아서 죽여야 한다. 그것이 그 자신이 가진 가치를 지키고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많은 이들이 믿고 있는 종교 역시도 다른 종교와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그 종교는 이단이며 악마가 된다. 그래서 그 자신의 믿는 종교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가장 악랄한 행동도 서슴지 않게 하게 된다. 우리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거대한 학살은 대부분 종교적 배경을 통해 일어났었다. 일반적인 이득을 목표로 한 전쟁은 적국을 항복시키고 재물을 약탈하는 것에서 끝나는 반면, 종교와 관련된 전쟁은 상대를 반듯이 죽여야만 자신이 믿는 종교의 가치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충돌이 거의 없을 것 같은 개인의 취미생활은 그 자체가 유효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천 만원 짜리 자전거가 정말로 천만 원이란 돈을 드릴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누군가에겐 '미친놈' 소리가 나오게 만든다. 하지만 그 미친놈 소리를 하는 그 당사자도 또 어딘가에 이 돈을 쓰고 있다. 해외여행을 하거나 맛난 음식점을 찾아 다니면서 오랜 기간 동안 그 돈을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은 것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독서 광 역시도 명확한 한계가 있다. 우리는 보통 남에게 해를 끼치지도 않고 많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니면서 머리 속에 많은 지식을 쌓고 현명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매우 중요한 도구인 이 '독서' 에 대해 매우 호의적인 입장이지만, 이 독서는 인간 종족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 즉 인간이 아닌 존재들에게 이 독서라는 것이 어떤 가치가 있을까?
그렇다면 생명체 전체가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해보자. 생명이야 말고 그리 우아하지는 않지만 진정한 가치를 가진 대상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지구라는 지역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속한 우주의 크기에 비하면 우리는 지구에 있어서 모래 하나만도 못한 크기를 가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지구에 속한 생명에 대한 절대 가치를 논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우리가 가진 모든 가치는 명확한 한계점과 유효범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가진 가치에 대해서 생각보다 너무도 단단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즉 이 가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으로 인해 수 많은 가치 충돌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분법적 사고 방식이 동작하여 발생하는 문제이다. 즉 내 가치가 옳으니 그것에 반대되는 너의 가치는 그르다 라고 생각하기에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유효범위를 가진 어떤 종류의 가치가 옳다는 것이 과연 정당한 생각일까? 만약 사람의 머리 크기가 일정 크기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우스운 법을 가진 한 지역에서 머리가 크다는 이유로 어떤 이가 사형을 당했다면 그 사형이 정당할 수 있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고는 그 지방의 법의 우스움을 비웃겠지만 그 지역에서는 그것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약속일 수 있다. 과거에 머리가 큰 어떤 이들이 과도한 폭력을 휘둘렀거나 혹은 그 지역에서 머리가 큰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이상한 변화를 경험했거나.. 우리는 그 역사와 배경을 알지 못하는 한 그것을 이해하기 힘들다.
이렇듯 그 당사자들에게 유효하고 절대적으로 여겨지는 가치는 외부에서 보면 우스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입장에 서 있느냐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우린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한 절대성을 보장하고자 자신의 반대나 혹은 자신이 그리 신뢰하지 못하는 가치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고 심지어 폭력적인 성향까지도 보이게 된다.
이런 인간의 성향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불안함과 혼란스러움을 벗어나려는 본능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의 몸이나 생각에 있어서 안정되지 못한 상태를 꽤나 스트레스 받고 이 스트레스는 바로 우리를 불행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린 무엇인가 확실하게 정의되길 원한다. 그것이 종교든, 애국심이든, 가족 구성원이든 간에 상관없이 늘 명확하게 정의되길 바라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린 내부적인 갈등을 멈추고 다른 일을 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정리된 내부 갈등은 이젠 외부 갈등으로 이어진다. 즉 자신의 입장이 명확히 정해지는 만큼 다른 이들과 섞일 수 있는 한계지점도 명확해진 것이다.
자신의 집 주위에 높게 담을 쌓으면 그가 가진 땅의 한계를 명확하게 표시하지만 그 자신 역시도 그 높은 담안에서 외부와 단절되게 되는 현상을 야기한다. 그리고 누구나 이렇게 높은 담을 쌓는 시대가 도래하면 누구나 모두 그 안에서 나올 생각을 못하고 실수로 마주치게 되면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게 된다.
결국 이런 원리로 인해서 우리는 자신이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갖게 된 가치에 스스로 함몰되어서 서로가 가진 가치를 부정하는 현상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우리가 가치를 통한 행복추구라는 목표가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되지도 상대를 인정하기도 힘들게 만든다. 거기에 우린 경쟁이라는 인간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
가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심을 해야 할 대상이다. 우선 첫 번째는 그 가치가 정말로 그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우리는 실제로 그 자신이 그 가치를 가졌다고 믿긴 하지만 어떨 땐 누군가의 의도나 옆에 있는 사람을 따라 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즉 어떤 가치들은 소수 그룹이나 특정한 사람들 간에만 통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잘 알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주변인들에게 영향을 받아서 그들이 가진 가치를 자신의 것인 냥 믿기 십상이다.
이 현상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영아 교육, 영재 교육 등의 가치들이 바로 이 대상이 된다. 또한 좋은 집이나 비싼 가방과 차 등도 그런 가치 기준의 영향을 받기가 쉽다. 도대체 그것이 왜 중요하고 거기에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하지 못하면서 주변에서 그것이 가치 있다고 말하니 그냥 믿고 따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 지어진 가치 기준은 숫자가 더해갈수록 막강한 사회적 쏠림 현상을 일으키게 한다.
두 번째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배타심이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내 가치가 옳으니 그것에 반대되거나 혹은 경쟁되는 모든 가치는 부정하는 우리의 욕심에서 시작된다.
그나마 개인적이 취미는 그래도 덜 하지만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가치들은 이제 자신의 가치를 주장하고자 타인의 가치를 완전히 뭉개버리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데 서슴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가치 충돌의 현장을 야기 시킨다. 취미 생활에서 조차 자전거 타기와 마라톤 대회는 가끔 충돌을 하곤 하고 스키장,골프장과 별보기 취미가 지역적으로 충돌하기도 하는데 자식이나 애국심과 같은 생존에 대한 것이라면 정말로 말할 필요가 없다.
여기에서 최악의 경우는 바로 이 두 가지 단점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경우이다. 그 가치를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닌 누군가로부터 부여 받거나 얻어 들은 것을 시작으로 해서 그 후 막강한 배타적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에 커다란 악영향을 끼치고 살게 되는데 여느 범죄자 이상으로 인간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이런 이들을 보통 광신자라고 부르고 끝도 없는 애국심에 불타거나 배타적 종교에 빠진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난다.
이제 글의 결론을 내어 보자. 우리 인간은 생존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질적 영역인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가장 중요한 위치에 바로 이 가치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가치는 바로 우리가 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간접적 답을 주며 우리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우리는 이렇게 존재에 대한 필요성을 느낄 때 많은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만의 가치를 가지려고 애쓰고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더해서 그 가치에 대한 믿음이 강할수록 더욱 그 가치가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가진 가치를 강하게 믿고 추구할수록 결국 그 가치와 대척 점에 선 다른 가치를 부정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것이 바로 가치의 유효범위에 관한 역설인데 그것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가치를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켜야 한다.
가치는 내가 옳다는 자기 확신이 아닌 살아가는 의미이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살아가는 의미는 오직 그 자신에게만 유효하다는 한계점을 인정해야 한다.
가치의 원래 목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지 타인의 가치와 싸우라는 것이 아니다. 종교의 목적이 우리 인간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신에 대한 믿음으로 그것을 극복하라는 것이지 내 종교가 옳다고 다른 종교를 말살시키라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사회가 각박하고 삐뚤어질수록 가치에 대한 획일성은 증가한다. 과거에 나찌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던 독일의 문제점이 있었고 우리와 가깝게는 일본 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던 일본의 군국주의가 존재했었다. 이런 가치들은 모두 주변국 사람들을 매우 불행하게 만들었고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의 안에서 머물러야 하고 만약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내적 갈등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는 몰라도 그것을 완전히 없애 버린 후 갈등화 시켜버리는 순간 우린 수 많은 가치 충돌의 시대를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린 지금보다는 좀 더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