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철학

존재감의 본질

아이루다 2014. 2. 23. 06:53

 

하얗고 두텁게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듬성듬성 난 나무들은 허리 아름까지 눈에 잠겨 있고 태곳적부터 내려온 이 고요한 정적은 이 숲에 과연 살아 있는 것이 존재 할 지 의문이 들게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깊은 숲 어느 곳에서 아주 작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움직임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 놀랍게도 거대한 덩치를 가진 호랑이였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동물은 푹푹 빠지는 눈을 부드럽게 밟으면서도 겨우 발목 근처만 잠긴 채 조심스럽게 걷고 있다. 도대체 그는 얼마나 이곳에서 살아 온 것일까? 그 육중한 몸을 마치 새끼 고양이처럼 가볍고 부드럽게 움직이고 있는 이 매력적인 동물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인함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었다. 이곳은 겨울이 한참인 시베리아였다.

 

인간은 이 멋지고 아름다운 동물을 동경해서 호랑이와 같은 눈, 호랑이와 같은 용기, 호랑이와 같은 담담함 등의 표현을 사용해 이 동물의 위대함을 닮고 싶어 해 왔다. 하지만 실제로 당사자인 이 호랑이에게 세상은 먹을 것, 먹을 수 없는 것, 거의 없지만 자신에게 위협적인 대상, 무시해도 될 대상 정도로 구분 될 뿐이다. 이런 호랑이를 우리의 시선에서 판단하는 것은 그저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혼자 살아가는 호랑이처럼 자아 의식이 거의 발달하지 못한 이 동물에게는 존재감은 아예 필요가 없고 자존감 역시도 느낄 수도 없으며 현실적으로 느낄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우린 이 호랑이를 닮았다고 표현하면서 그 자신의 존재감과 자존감을 부각시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차라리 존재감이라면 우리가 그 모습을 우습게 여기는 원숭이들에게서 훨씬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감에는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과 그것으로 인해 서열이 매겨진다는 현실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서열은 말 그대로 육체적 능력에 따른 존재감의 순위이면서 결국 생존 가능성에 대한 순서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 말 그대로 생명 줄인 셈이다.

 

또한 무리의 대표는 적에 대항하여 무리를 지키고 용감히 싸울 의무가 있지만 무리 내 암컷을 차지하여 자신의 새끼를 많이 낳거나 혹은 맛난 먹을 거리가 발견되었을 때 그 자신이 다른 녀석들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기에 그 힘든 무리의 대표직을 최대한 유지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 자리에 가지 못한 다른 개체들은 호시탐탐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기회를 노리면서 살아간다.

 

결국 개미와 같은 절대 충성적 존재들의 모임이 아닌 인간의 사회처럼 각 개인의 이득이 끝없이 충돌하는 사회를 살아가는 그 모든 생명체에게 있어서 존재감이란 생존과 자손을 남기는 권리를 의미한다. 특히 인간은 동물처럼 대 놓고 서열을 매기지 않기 때문에 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존과 연결되는 존재감이 가진 의미는 특히 더 중요하고 필수적으로 작동하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우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 받는 자리에 있으면 호랑이가 운 좋게 살집이 제법 오른 사슴 한 마리를 사냥했을 때와 같은 큰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 행복하기 보다는 타인들과 어울리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 받으면서 행복을 느끼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그 자신들의 삶의 과정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각과 결정에 있어서 이 '존재감'의 충족이란 목표를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어쩌면 이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존재감이란 바로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고리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부모에게 칭얼대는 것, 노인이 자신을 공경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부부가 서로 자신의 존재를 좀 더 아껴달라고 말하는 것, 친구와 한 약속시간에 늦지 않아야 하는 것,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 재빨이 와서 받아 가는 것, 조직에서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자신의 전화기에 많은 사람들의 연락처가 적혀 있는 것, 자신의 페이스북/블로그에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것, 자신의 트윗에 많은 이들이 팔로워로 등록되어 있는 것, 어떤 제품을 살 때 아주 잘 골라내는 것,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것,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것..

 

이 모든 행동은 우리 일상 중 하나이지만 결국 하나하나를 다 따져보면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감을 증명 받거나 혹은 과시하는 행동의 일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우리는 이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위해 살아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말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이것에는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이외 다른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우리가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과 끝없이 교류를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일단 첫 번째는 교류는 경제적 효율성의 극대화를 가지고 온다. 즉 이것은 각자 자신이 타인들에 비해 좀 더 잘하는 일을 한 후 그것을 그 자신이 못하지만 갖고 싶은 것과 교환을 한다. 물론 이때 돈이 사용되긴 하지만 결국에 보면 우린 누구나 직업을 통해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하고 난 후 돈을 받아 그것을 갖고 싶은 제품이나 식품을 사는데 쓴다.

 

두 번째 교류는 바로 첫 번째 이유에 대한 가능성 때문에 일어난다. 즉 두 번째 교류의 원인은 바로 우리가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이득에 대한 예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존재감이라고 알려진 우리가 그리 얻고자 노력하는 가치를 평가 받는 자리를 마련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이 된다.

 

이것은 우리가 미래를 예측 가능한 지능을 가졌기에, 우린 현재의 관계 맺음을 통한 이득을 미래의 가치로 환산시킬 수 있기에, 현재 시점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감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수단화 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다. 즉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등과의 교류를 통해 어떤 의미에서 순수한 교류를 한다고 느끼지만 이것 역시도 미래의 어떤 종류의 이득에 대한 보장을 해준다는 것이 그 자신을 안심시키고 그럼으로써 안락함을 느끼면서 행복감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실제로 믿을 수 있는 상대란, 삶을 함께 살아갈 매우 좋은 동반자가 된다. 또한 자신에게 호의를 가진 능력이 많은 이들 역시도 매우 중요한 교류 상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양한 능력이나 혹은 생존에 필수적인 능력을 가진 이들을 볼 때 자신도 모르게 그것을 매력으로 느끼고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이 타인들에게 그런 사람 이길 바라기도 하여 열심히 노력도 한다.

 

결국 잘생긴 외모는 건강함의 상징이고 뛰어난 두뇌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의사와 같은 직업이나 다양한 재주를 가진 능력이나 뛰어난 육체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대상이 되는데 이들 모두가 자세히 살펴보면 건강이나 경제력과 같은 요소와 밀접한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된 상황이니 그 누구나 자신이 좀 더 나은 능력을 갖고자 노력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능력을 갖게 되면 그 능력을 가진 것 이상으로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사회이며 이것의 원리에는 역시나 미래에 대한 기대치를 두고 현재를 보는 우리의 나름 뛰어난 예측 능력이 한 몫하고 있다. 즉 우리는 두 번째 원인이 되는 두 번째 이유로 인해 타인과의 교류에 있어서 당장 현실적인 이득만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말 그대로 의사와 친해지면 언젠가 아플 때 꽤나 유용하다.

 

그래서 우린 좀 능력 있는 사람들을 보면 괜히 더 그들에게 신경 쓰고 어떻게든 친해지려고 애를 쓰며 결국 대부분의 김칫국만 마시다가 끝나지만 그들과 운 좋게 잘 어울리게 되면 자신의 미래에 어떤 문제에 놓였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을 잘 모르는 학창시절 맺은 일명 순수한 우정일 경우엔 정말로 평생에 걸쳐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게 보이는 존재감이 만약 혼자 살아가는 호랑이처럼 살게 되면 순시간에 아무런 의미 없는 개념이 되어 버린다. 즉 존재감이란 철저하게 다수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기반으로 한 개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존재감은 우리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진 가치는 아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다수가 함께 살아가는 환경에 놓여 있기에 발생한 현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감은 생존에 있어서 너무 큰 역할, 아니 현대에 와서는 생존이 아닌 행복함에 대한 욕구로 많이 변화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우리가 이제 좀 먹고 살만해진 탓이다.

 

쉽게 말해서 혼자 사는 상황이 되면 존재감이나 자존감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우린 그저 본능이 말하는 생존을 어떻게 잘하느냐에 만 신경 쓰고 살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이미 다수가 모여 사는 삶이 그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커다란 이득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우린 이 이득을 위해서 모여 살 수 밖에 없게 된다.


현대 사회는 원래 처음부터 모여 살고 있는 환경에서 모두들 태어나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서 둔감해졌을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모여 사는 것은 단지 우리가 모여 살기 때문에 얻는 이득이 너무 커서 그렇다. 만약 이 이득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거나 혹은 모여 사는데 있어서 받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면 산으로 들어가게 된다.

 

혼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오늘 어떤 사냥감을 구했느냐 혹은 어떤 과일 나무를 발견했느냐가 바로 생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일이 된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문제가 이렇게 단순하게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바로 둘이 있으면 시작되는 경쟁이란 요소 때문에 그렇다.


경쟁은 옆 사람과 나의 순위를 정하는 아주 단순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인간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인간의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린 정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무리들 사이에서의 존재감이며 이것을 곧바로 개인이 갖는 자존감으로 연결이 된다. 즉 여기까지 장황하게 늘어 놓은 말을 정리하면 존재감은 바로 생존의 필수요소이며 이 존재감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살아갈 이유가 되는 자존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혼자 살아가는 존재는 경쟁이란 단어가 불필요하다. 혼자서는 경쟁을 할 대상도 경쟁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둘 이상 살아가게 되면 이 경쟁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다. 경쟁은 바로 적은 자원에 비해 각자의 욕구가 크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몇 천년 동안 문명을 이루고 발전해 온 인간의 사회는 이 경쟁을 꽤나 고상한 형태로 변형시켜 두었다.

 

물론 스포츠를 통해 직접적인 경기를 할 때 우린 원시적인 경쟁 형태의 즐거움을 맛보기도 하지만 우린 보통 그 상대가 누군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채 자신을 얼마큼 잘 다독이는지가 중요한 경쟁을 하곤 한다. 우리나라의 수능과 같은 시험은 전체 고등학생이 하는 경쟁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그 옆자리에 앉은 다른 학생을 경기에 나선 상대와 같은 경쟁자로 느끼진 못한다.

 

그것은 바로 그 외에도 상대가 너무도 많기 때문인데, 보통 우리의 경쟁이 모두 그렇다. 여자를 두고 하는 남자들의 경쟁 역시도 엄청난 치열함을 가지고 있지만 남자들은 대 놓고 싸우질 않는다. 보통 싸울 때 같은 여자를 두 명의 남자나 혹은 여자들이 동시에 좋아할 때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 시기엔 보통 상대가 생긴 것을 축하해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쟁에서 존재감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것은 마치 수능에서 받은 점수와 비슷하다. 이 점수가 높을수록 해당 학생은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으며 이후로도 삶에 있어서 좀 나은 경제적인 환경에 놓일 확률이 높다.

 

얼굴, , 몸매, 학벌, 지적 능력, 운동신경, 성격소속된 집안 등등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존재감에 커다란 역할을 하는 요소들이다. 어떤 것들은 타고나서 고치기가 힘들고 어떤 것들은 노력을 하면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통 대부분의 요소들은 타고 났거나 매우 어려운 노력을 장시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당연한 것인데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가치라면 누군들 가지지 않으려 하겠는가? 요즘 많이 유행하고 있는 성형이나 몸매 만들기 등등이 바로 기술의 발전에 의해 제법 쉬워진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것은 많은 돈과 고통과 위험이 따르고 있다.

 

존재감, 현대의 사회에서 이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이들은 이것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살아간다. 하지만 이것은 꽤나 본능적인 영역에 속한 개념이다. 즉 계속 설명했다시피 이 말은 생존의 다른 말이란 뜻이다. 하지만 생존을 행복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사회는 어쩐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생존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니.. 우리가 원시인도 아니고 말이다.

 

결국 존재감에 대한 끝없는 추구는 바로 우리가 옆 사람에 대한 끝없는 눈치보기와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무조건적인 따라가기 현상을 야기 시킨다. 전체 무리가 한곳을 향해 움직일 때 왜 그곳을 향해 가는지 궁금하기 보다는 가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물론 생존을 위해 어느 정도는 이것이 필요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엔 너무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것을 마치 신앙처럼 믿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를 살 수 있긴 하지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긴 힘들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한 것들은 타인들에게 온통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를 행복해질 수 있는 자존감으로 연결되어 그 자신만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가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갖추게 된다.

 

이것이 혼자 사는 순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쟁을 기반으로 한 '존재감'의 유령에서 우리가 벗어나 좀 덜 종속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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